원글: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이후 글: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는 외부 세계를 성공적으로 보증하는가?(2)
Ⅰ. 들어가는 말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을 ‘표상주의’로 해석해야 하는지 ‘직접적 실재론’으로 해석해야 하는지는 근대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되는 주제이다. 두 입장은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에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두고서 서로 대립한다. 즉, 표상주의적 해석은 데카르트가 ‘관념’을 직접적 지각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관념이란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고, 물체란 관념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우리에게 알려질 뿐이다. 그러나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은 데카르트가 ‘물체’를 직접적 지각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관념을 지각과 물체 사이에 놓여 있는 또 하나의 대상인 것처럼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오독일 뿐이다.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에 대한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 사이의 논쟁은 주로 ‘관념’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벌어진다. 표상주의적 해석을 지지하는 입장은 대체로 ‘관념에 대한 행위-대상 이론(act-object theory of ideas)’에 근거하여 데카르트를 독해하고,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을 지지하는 입장은 대체로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act theory of ideas)’에 근거하여 데카르트를 독해한다. 즉, 표상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관념’이란 주체의 행위로서의 의미와 지각의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모두 지닌다. 따라서 표상주의적 해석에서는 지각의 대상이 직접적으로는 관념이고, 간접적으로는 물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 연구자로는 호프만(P. Hoffman)과 뉴먼(L. Newman) 등이 있다. 그러나,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관념’이란 단순히 주체의 행위로서의 의미만 지닌다. 따라서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에서는 지각의 대상이란 언제나 물체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 연구자로는 욜톤(J. Yolton), 쿡(M. Cook), 네들러(S. Nadler) 등이 있다.
그러나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 사이의 논쟁을 ‘관념’의 의미에 대한 분석을 통해 다루고자 하는 시도는 모두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 관념에 대한 행위-대상 이론과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 중 어느 쪽이 옳다는 사실만으로는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이 표상주의인지 직접적 실재론인지가 곧바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가령, ‘관념’이 지각의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관념과 물체가 서로 대응한다는 사실이 보증될 경우,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은 ‘직접적 실재론’과 결과적으로는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상(관념)과 외부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실재)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관념’이 주체의 행위라고 하더라도, 관념이 물체와 전혀 상관없이 일어나는 행위일 경우,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은 ‘표상주의’와 결과적으로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대상을 떠올리는 방식(관념)과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실재) 사이에는 얼마든지 괴리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에 대한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 사이의 논쟁이 ‘관념’의 의미를 둘러싼 주석적 문제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는 두 해석 사이의 논쟁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 관념과 실재의 대응에 대한 철학적 문제에도 개입해야 한다. 즉, 우리가 과연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에서 관념과 실재의 대응을 성공적으로 보증하는 논증을 발견할 수 있는지가 두 해석 사이의 논쟁에서 진정으로 주목받아야 하는 문제이다. 해당 논증이 존재할 경우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은 ‘직접적 실재론’이 되고, 해당 논증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은 ‘표상주의’가 된다. 이러한 평가는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라고 일컬어지는 진리 규칙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데카르트는 관념과 실재의 대응을 보증하기 위해 명석판명한 지식에 최종적으로 호소하기 때문이다. 본고는 우선 ‘표상주의’와 ‘직접적 실재론’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서로 다른 맥락을 고려하여 두 용어의 의미를 정리할 것이다(Ⅱ). 다음으로,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 사이의 논쟁을 ‘관념에 대한 행위-대상 이론’과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으로 환원하고자 하는 시도를 비판할 것이다(Ⅲ). 오히려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야말로 두 해석 사이의 논쟁에서 쟁점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성찰』의 내용을 중심으로 해명할 것이다(Ⅳ). 마지막으로,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가 관념과 실재의 대응을 성공적으로 보증하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에 대한 ‘표상주의적 해석’을 지지할 것이다(Ⅴ).
Ⅱ. 표상주의 vs. 직접적 실재론
근대 이후로 ‘인식론’ 혹은 ‘지식 이론’은 철학의 중심적 분야로 떠올랐다. 많은 연구자들은 이러한 ‘인식론적 전회(epistemological turn)’의 계기로 데카르트의 철학을 지목한다. 우리 외부의 ‘물체’에 대한 탐구를 위해 우리 내부의 ‘관념’에 대한 성찰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관점은 데카르트를 통해 철학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즉, 데카르트는 소위 ‘방법적 회의’를 통해 우리가 물체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내용을 의문에 붙였다. 그는 검증되지 않은 믿음들을 철저하게 배제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사물’이라는 사실만을 더 이상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의 토대로 삼아 형이상학의 체계를 성립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그의 철학에서는 인식 주체의 ‘생각하는 행위(act of thinking)’에 대한 지각과 인식 주체가 ‘생각하는 대상(object of thinking)’에 대한 지각이 외부 세계에 대한 다른 모든 지식에 앞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무엇이 인식 주체에게 확실하게 사유되고 있는지로부터 무엇이 외부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지가 도출되는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
정통적 연구자들은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해 흔히 ‘표상주의적 해석’을 제시한다. 여기서 ‘표상’이란 인식 주체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idea)’의 작용을 의미한다. 즉, 정신은 “흡사 사물의 상과 같은”(AT Ⅶ: 37)1 것으로서 수많은 관념들을 지니고 있다. 우리가 태양, 키마이라, 천사, 신 등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떠올리는 ‘상(image)’들이 바로 관념이다. 물론, 모든 관념이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물체에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에는 키마이라의 관념처럼 실존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관념들도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 그러나 외부 세계를 파악하고자 하는 인식 주체의 시도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지니고 있는 관념들에 의존한다.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인식 주체는 다양한 관념들 중에서 무엇이 사물을 올바르게 표상하고 무엇이 사물을 그릇되게 표상하는지를 구분해내는 방식으로 외부 세계에 도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외부 세계는 결국 ‘관념’이라는 상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인식 주체에게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의 연구자들은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표상주의적 해석’에 반대하여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은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인식 주체가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은 ‘관념’이고, 인식 주체가 관념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지각할 수 있는 대상은 ‘물체’라는 설명에 대해 비판적이다. 즉, 데카르트는 인식 주체가 지각할 수 있는 영역을 관념에 한정한 적이 없다. 인식 주체가 표상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로 물체를 지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데카르트의 철학에서도 열려 있다. 가령,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태양’에 대한 지각은 결코 ‘태양의 관념’에 대한 지각으로 환원될 수 없다. ‘태양의 관념’을 마치 지각의 대상인 것처럼 상정하는 독해는 ‘관념’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 오히려 인식 주체가 지각의 상황에서 경험하고 있는 대상이란 정신 속에 존재하는 태양의 상이 아니라 하늘 위에 존재하는 태양 자체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이 언제나 명확한 대립 구도 속에서 각각의 주장을 전개하는 것은 아니다. 두 입장 사이의 논쟁은 서로 다른 용어의 사용으로 인해 종종 매우 혼란스러운 양상을 보인다. 가령, ‘직접적’이라는 용어는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표상주의적 해석은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인식 주체의 직접적 지각 대상’은 관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인식 주체의 직접적 관심 대상’이 물체라는 생각을 거부하지는 않는다.2 또한 ‘표상주의’는 흔히 ‘간접적 실재론’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는 점에서 ‘직접적 실재론’과 차이점뿐만 아니라 공통점 역시 지니고 있다. 두 해석은 데카르트의 철학이 ‘어떠한 실재론’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의견이 다를 뿐이다. 심지어 ‘직접적 실재론’을 주장하는 해석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라진다. 인식 주체가 관념이 아니라 물체를 직접적으로 지각한다고 주장하더라도, 그 물체를 다시 ‘마음 독립적’ 대상이라고 볼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강조점에 미묘한 차이가 생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이 정확히 어떠한 문제에서 대립하고 있는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두 입장을 특징짓는 용어들에 대한 정리가 필수적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등장한 ‘표상주의(representationalism)’, ‘실재론(realism)’, ‘직접적(direct)’, ‘간접적(indirect)’과 같은 용어들을 일관된 기준 아래에서 비교해야 한다. 이러한 작업은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에 대한 정통적 독해인 ‘표상주의적 해석’을 먼저 정의하는 방식으로 수행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은 표상주의적 해석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사후적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즉,
(1) 표상주의적 해석은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지는 대상이 ‘관념’이라고 지적한다. 외부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물체’는 우리가 정신 속에서 사유하는 관념을 통해 추론적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해석에서 관념은 인식 주체를 가로막는 일종의 ‘지각의 베일(veil of perception)’3로 작용한다. 인식 주체는 자신이 지각하는 관념 뒤편에 마음 독립적 물체가 놓여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관념을 완전히 걷어낸 상태에서 마음 독립적 물체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다. 물체가 어떠한 성질을 지니고 있는지는 언제나 관념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즉, 표상주의란 (a) 마음 독립적 물체가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 실재론(metaphysical realism)’과 (b) 관념은 지각을 매개한다는 ‘지각에 대한 간접적 이론(indirect theory of perception)’의 결합이다.4 표상주의의 입장은 아래의 <표 1>에서 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2)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은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인식 주체가 마음 독립적 물체를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표상주의적 해석을 구성하는 두 가지 논제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층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즉, 표상주의적 해석을 반대하는 입장은 ② 마음 독립적 물체가 존재한다는 가정을 긍정하면서도 관념이 지각을 매개한다는 가정을 부정하는 선택지를 취할 수 있다. 또한 ③ 마음 독립적 물체가 존재한다는 가정을 부정하면서도 관념이 지각을 매개한다는 가정을 긍정하는 선택지를 취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④ 마음 독립적 물체가 존재한다는 가정과 관념은 지각을 매개한다는 가정 모두를 부정하는 선택지를 취할 수도 있다. 각각의 입장 ②, ③, ④가 표상주의적 해석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는 아래의 <표 2>를 통해 요약될 수 있다.
표상주의에 반대하는 세 가지 입장 ②, ③, ④ 중에서 ‘직접적 실재론’이라는 이름에 적절한 입장은 ②와 ④이다. ③은 실재론 자체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일 뿐이다. 그러나 ②와 ④가 모두 관념이 아니라 물체를 인식 주체의 직접적 지각 대상으로 제시하더라도, 두 입장이 ‘물체’라는 용어로 염두에 두고 있는 실재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②에서 물체는 ‘마음 독립적(mind-independent)’ 실재이고, ④에서 물체는 ‘마음 의존적(mid-dependent)’ 실재이다. 형이상학과 인식론에서 더욱 널리 통용되는 용어를 사용하자면, ②는 물체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정신 속에 주어진다는 ‘소박 실재론(naive realism)’이고, ④는 물체의 존재가 관념의 작용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비판적 실재론(critical realism)’이라고 할 수 있다.
(3)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 사이의 논쟁은 주로 ①과 ② 사이에서 벌어진다. 물론, 데카르트의 철학을 ③처럼 회의주의로 해석하거나 ④처럼 비판적 실재론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표상적 실재론은 회의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종종 제기되기도 한다는 점에서5, ③이 논쟁과 전혀 상관없는 입장인 것은 아니다. 또한, 비판적 실재론은 표상주의에 반대되는 진영이라는 점에서, ④ 역시 그 자체로는 충분히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으로 고려할 만하다. 그러나 ③의 경우 ‘표상주의’나 ‘직접적 실재론’이라는 이름이 제시하는 비판의 쟁점을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④의 경우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에 대한 논의에서 아직까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입장은 아니다.6 따라서 대결의 구도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두 입장을 잠시 보류하는 편이 더욱 효율적이다.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 사이의 논쟁을 ‘표상적 실재론적 해석’과 소박 실재론적 해석‘ 사이의 논쟁으로 한정할 때에야 비로소 두 입장이 동일한 ‘실재론’의 문제를 중심으로 어떻게 대립하는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Ⅲ. 관념에 대한 행위-대상 이론 vs.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은 대개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을 토대로 제시된다.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은 17세기 철학에서 사용된 ‘관념’이라는 용어가 ‘지각’이나 ‘이해’라는 용어처럼 ‘사고의 행위(act of thought)’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1970년대에 욜톤을 통해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데카르트, 아르노, 로크 등에 대한 독해에 커다란 영감을 주었다.7 특별히, 많은 근대철학 연구자들은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이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을 함의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관념이 사고의 행위라는 관점에서는 인식 주체가 관념을 일차적으로 지각하고 물체를 이차적으로 지각한다는 구분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에서는 ‘물체의 관념’을 가진다는 것이 ‘물체에 대한 지각’을 수행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관념을 물체에 대한 인식을 가로막는 ‘지각의 베일’처럼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물체에 대한 인식을 수행하는 ‘지각의 행위’로 상정한다는 것이다.8
그러나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표상주의적 해석은 주로 ‘관념에 대한 행위-대상 이론’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내세운다. 관념에 대한 행위-대상 이론은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관념’이라는 용어가 이중적 의미로 사용된다고 지적한다. 가령, 데카르트는 “관념이 사고의 양태로 고려되는 한에서는, 그들 사이에 인식 가능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AT Ⅶ: 40 인용자 강조)라고 하면서도, “서로 다른 관념이 서로 다른 사물을 표상하는 상인 한에서는, 그 관념들이 서로 크게 다르다는 사실이 분명하다.”(AT Ⅶ: 40 인용자 강조)라고도 이야기한다. 그의 설명에서 ‘관념’이라는 하나의 용어는 사고의 행위를 의미하는 ‘양태(mode)’라는 표현과 사고의 대상을 의미하는 ‘상(image)’이라는 표현에 모두 적용되고 있다. 여기서 관념이 일종의 ‘상’으로 설명되기도 한다는 사실이 표상주의적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관념이 ‘행위’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관념이 ‘대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반드시 부정하지는 않은 경우, 인식 주체의 일차적 지각 대상은 관념이고 이차적 지각 대상은 물체라는 표상주의적 해석의 주장은 여전히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 여왕 크리스티나에게 천문학을 가르치는 데카르트
따라서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 사이의 대결은 주로 ‘관념에 대한 행위-대상 이론’과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 사이의 대결이라는 양상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있다.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이 ‘행위-대상 이론’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 ‘행위 이론’으로 이해되어야 하는지에 따라, 데카르트의 철학이 ‘표상주의’로 해석되어야 하는지 ‘직접적 실재론’으로 해석되어야 하는지가 달라진다는 생각이 연구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다. 특별히, 이러한 경향은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을 둘러싼 비교적 최근의 중요한 논쟁인 네들러와 호프만의 논쟁에서 잘 드러난다.9 우선, ‘행위-대상 이론’, ‘행위 이론’, ‘표상주의’, ‘직접적 실재론’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자들 사이의 논의가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네들러의 해석을 통해 살펴보자(Ⅲ. 1.). 다음으로, 각각의 입장들 사이의 연관성에 근거하여 표상적 실재론적 해석과 소박 실재론적 해석을 평가하려는 시도가 과연 정당한지를 네들러에 대한 호프만의 비판을 통해 논의하자(Ⅲ. 2.).
1. 네들러의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
네들러는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관념’이 기본적으로 ‘지각적 행위(perceptual act)’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그는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관념’이라는 용어가 종종 ‘행위’와 ‘대상’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데카르트가 관념에 대한 정의를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언제나 ‘사고의 형식(form of thought)’, ‘정신의 양태(moidfication of mind)’, ‘지성의 작용(operation of the intellect)’과 같은 행위의 측면을 가장 먼저 내세운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가령, 데카르트는 『성찰』에 제기된 두 번째 반박에 대한 답변에서 “나는 ‘관념’이라는 용어를 주어진 사고의 형식이라고 이해한다. 즉, 사고를 내가 의식하도록 만드는 직접적인 지각이라고 이해한다.”(AT Ⅶ: 160 인용자 강조)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데카르트는 세 번째 반박에 대한 답변에서 역시 “나는 관념으로 주어진 지각의 형식을 의미한다.”(AT Ⅶ: 188 인용자 강조)라고 설명한다. 데카르트의 정의에서 ‘관념’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고나 지각이 이루어지는 형식으로서 우선적으로 제시된다. 관념에 대한 다른 설명은 관념이 지각적 행위라는 정의에 의존적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관념’이 인식 주체의 지각 대상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주장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충분한 설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관념이 지닌 대상의 측면이란 관념이 지닌 행위의 측면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관념의 ‘질료적(material)’ 의미와 ‘표상적(objective)’ 의미 사이의 구분이 등장하는 『성찰』의 구절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관념’은 질료적으로, 곧 지성의 작용으로 여겨질 수 있다. […] 그렇지만, 관념은 표상적으로, 곧 그러한 작용에 의해 표상되는 사물로서 여겨질 수도 있다.”(AT Ⅶ: 8 인용자 강조) 즉, ‘표상되는 사물’로서의 관념이란 ‘지성의 작용’으로서의 관념과 분리된 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은 인식 주체의 정신 속에 ‘관념’이라는 이름의 대상들이 마치 기성품들처럼 진열되어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관념을 정신 속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입장은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을 오해이다. “그[데카르트]는 분명히 외부 대상이 그 자체로 관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관념’은 정신 바깥의 사물을 지칭하지만, 오직 그 사물이 사고의 대상으로서 마음속에 존재하는 한에서만, 즉 지각적 행위에 의해 표상된 한에서만 그렇다.”(Nadler, 1989: 129)
표상주의적 해석은 관념을 인식 주체의 직접적 지각 대상인 것처럼 상정한 채 데카르트의 철학을 독해한다는 점에서 잘못되었다. ‘관념’이라는 별도의 대상이 물체의 앞에 따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 행위(지각이 행위)과 그 행위가 향하는 외부 대상 사이를 가로막는 표상적 관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Nadler, 1989: 107) 단지 인식 주체에게 표상된 물체가 맥락에 따라 종종 ‘관념’이라고 불릴 뿐이다. 즉,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은 기본적으로 지각적 행위를 ‘관념’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관념은 아무런 매개에 의존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부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물체를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다. 물체는 단지 ‘표상된’ 혹은 ‘사유된’ 한에서만 지각적 행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관념’의 지위를 얻는다. 즉, 지각적 행위가 물체를 일차적 지각 대상으로 삼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지각의 베일’ 따위란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상정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지각적 행위는 물체를 직접적으로 자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2. 호프만의 표상주의적 해석
호프만은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에 근거하여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을 도출하고자 하는 네들러의 시도에 회의적이다. 그는 크게 두 가지 비판을 통해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을 논박한다. 즉, (a) 호프만은 텍스트에 대한 주석을 통해 데카르트의 철학이 표상주의적으로 독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관념이 ‘표상적 존재(objective being)’를 지닌다는 데카르트의 설명에서는 인식 주체의 정신 속에 있는 ‘태양의 관념’과 외부 세계 속에 존재하는 ‘태양’을 엄격하게 구분되고 있다.10 지각적 활동이 태양을 직접적으로 파악한다고 강조하는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에서는 ‘태양’과 ‘태양의 관념’을 구분하는 데카르트의 설명이 제대로 이해되기 힘들다. 또한 (b) 호프만은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이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을 반드시 함의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가령, 우리가 유리창을 통해 나무를 바라보는 상황에서는, 우리의 지각이 지향하고 있는 직접적 대상은 ‘유리창’이 아니라 ‘나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지각적 활동은 ‘유리창’을 매개물로 삼아 이루어진다. 인식 주체가 ‘관념’이 아니라 ‘물체’를 지각의 직접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주장만으로는 인식 주체가 아무런 매개물 없이 물체를 지각하고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는 것이다.11
데카르트에게 공기의 중력 실험에 대해 설명하는 파스칼과 데자르그
두 가지 비판 중에서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과 ‘직접적 실재론’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다는 지적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지적은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 물론, 호프만의 비판 자체는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으로부터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을 도출해내고자 하는 입장에 제시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논점은 관념에 대한 행위-대상 이론으로부터 표상주의적 해석을 도출해내고자 하는 입장에 역시 동일하게 적용된다. 즉, ‘행위-대상 이론’과 ‘행위 이론’ 사이의 논쟁이 반드시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 사이의 논쟁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른 논쟁이 마치 하나의 짝을 이루고 있는 것처럼 다루려는 시도는 정작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에서 진정으로 쟁점이 되는 문제를 놓치고 있을 수도 있다. 가령,
(1) 관념이 지각의 대상이라는 주장로부터 표상주의가 곧바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직접적 실재론조차 인식 주체가 ‘아는 것(knowing)’과 실제로 ‘존재하는 것(being)’이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동의한다.12 지각적 활동에서 물체가 인식 주체의 정신 속에 ‘물리적으로’ 박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외부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은 지각의 과정을 통해 인식 주체의 정신 속에 ‘아는 것’으로 나타난다. 표상주의와 직접적 실재론은 지각의 과정에서 동일한 물체가 물리적 대상에서 추상적 대상으로 변화한다는 생각을 모두 받아들인다. 따라서 인식 주체에게 ‘아는 것’으로서 주어진 추상적 대상을 ‘관념’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것인지 말 것인지 자체는 표상주의와 직접적 실재론 사이의 구별에서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인식 주체가 ‘아는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 있는지가 진정한 쟁점이다. 인식 주체가 ‘아는 것’을 ‘관념’이라고 명명하면서도 ‘아는 것’과 ‘존재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매개물이 없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직접적 실재론으로 귀결될 수 있다.
(2) 관념이 지각의 활동이라는 주장으로부터 직접적 실재론이 곧바로 도출되는 것도 아니다. 지각의 활동이 외부 세계에 존재하는 물체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지는 여전히 열린 문제로 남아 있다. 가령, 우리가 ‘통 속의 두뇌’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만으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식 주체의 지각적 활동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체와 아무런 관계도 없이 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인식 주체가 지각적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식 주체가 실재를 직접적으로 지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증하지 못한다. 즉, 인식 주체의 지각적 활동을 ‘관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더라도, 관념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우리의 정신에 나타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그 자체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관념이 실재를 제대로 그려내고 있는지가 불분명하다고 보는 입장은 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을 주장하면서도 표상주의로 빠지고 만다. 직접적 실재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관념이 실재에 대응한다는 생각이 정당화되어야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이 ‘행위-대상 이론’인지 ‘행위 이론’인지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표상주의’인지 ‘직접적 실재론’인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데카르트가 행위-대상 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직접적 실재론을 제시하였을 가능성이나 행위 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표상주의를 제시하였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오히려 표상주의와 직접적 실재론 사이의 논쟁에서 진정한 쟁점은 관념과 실재 사이의 대응이다. 즉, 두 입장은 모두 마음 독립적 물체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는 점에서 ‘실재론’이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인식 주체의 정신이 마음 독립적 물체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가능성에 놓여 있다. 관념이 지각의 대상인지 지각의 활동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외부 세계가 관념을 통해 있는 그대로 나타날 가능성을 보증하지 않는 입장은 ‘표상주의’가 되고, 외부 세계가 관념을 통해 있는 그대로 나타날 가능성을 보증하는 입장은 ‘직접적 실재론’이 될 뿐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관념과 실재 사이의 대응을 정말로 보증하고 있는지가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 사이의 논쟁에서 진정으로 부각되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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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데카르트의 텍스트로 코팅햄(J. Cottingham), 스투트호프(R. Stoothoff), 머독(D. Murdoch)의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Descartes를 국내 번역본들과 함께 참고하였다. 그러나 본고는 데카르트의 텍스트를 인용할 경우 아당(C, Adam)과 타네리(P. Tannery)가 편집한 Oeuvres de Descartes의 쪽수를 기준으로 삼았다. 본고가 참고한 번역본들은 모두 Oeuvres de Descartes의 쪽수를 여백에 병기하고 있다. 따라서 번역본들의 쪽수를 별도로 기입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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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먼(L. Newman)은 ‘대상적 직접성(objective directness)’과 ‘현상적 직접성(phenomenological directness)’이라는 용어로 이러한 구분을 제시한다. 그는 두 가지 직접성 이외에도 추론 없이 직관적으로 정당화되는 명제가 ‘인식적 직접성(epistemological directness)’을 지닌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또한 그는 직접성들 사이의 구분을 통해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감각 지각이 ”현상적 의미와 관련해서는 직접적이지만, 인식적이고 대상적인 의미와 관련해서는 간접적”(Newman, 2017: 208)이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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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의 베일’ 혹은 ‘관념의 베일’이라는 표현은 베넷(J. Bennett)이 본래 로크의 ‘지각에 대한 표상적 이론’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처음 사용한 이후로 표상주의를 설명하는 용어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Bennett, 1971: 69; Carriero, 2009: 22; Newman, 2011: 205-210; Newman, 2017: 20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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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의는 간접적 실재론에 대한 뉴먼의 설명을 참고한 것이다. “간접적 실재론이라고 불리는 입장은 지각에 대한 직접적 이론을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결합시킴으로써 도출된다. 후자는 물질적 대상이 마음 독립적 존재라는 관점이다. 반면, 간접적 실재론은 지각에 대한 간접적 이론―그 중 유명한 한 가지는 지각에 대한 표상적 이론이라고 불린다―을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결합시킴으로써 도출된다.”(Newman, 2017: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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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①을 ‘인식론적 회의주의’로 ③을 ‘존재론적 회의주의’로 명명할 수도 있다. 표상적 실재론은 인식 주체가 ‘직각의 베일’ 바깥의 실재를 결코 알 수 없다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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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에 대한 비판적 실재론적 해석으로 카리에로(J. Carriero)의 해석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물론, 카리에로는 자신의 해석을 ‘비판적 실재론’이라는 용어로 명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해석은 데카르트의 철학을 비트겐슈타인과 맥도웰의 철학처럼 독해한다는 점에서 다른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과는 크게 구별된다. 비트겐슈타인과 맥도웰은 ‘개념’과 ‘실재’ 사이의 착종 관계를 매우 강조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뉴먼은 카리에로의 해석이 일종의 ‘선언주의(disjunctivism)’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여기서 ‘선언주의’란 맥도웰을 통해 유명해진 현대 인식론의 주요한 실재론적 입장이다. 카리에로의 데카르트 해석과 관련해서는 Carriero (2009)와 Newman (2011)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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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이 사고의 행위를 의미한다는 주장 자체는 본래 리드(T. Reid)를 통해 제시되었다. 욜톤은 자신의 논문에서 리드의 주장을 더욱 철저하게 확장시키고 있다(Yolton, 197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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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에 대한 행위 이론과 직접적 실재론을 연결시키는 연구로는 Yolton (1975), Cook (1987), Nadler (1989)를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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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K. Smith)는 스탠포드 철학백과의 ‘데카르트의 관념 이론(Descartes’ Theory of Idea)’에서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 사이의 논쟁을 소개하기 위한 범례로 네들러에 대한 호프만의 비판을 제시하고 있기도 하다(Smith, 202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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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내용은 Hoffman (2002), 167-169쪽에 나타난다. 여기서 호프만은 데카르트가 카테루스에게 제시한 답변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태양의 관념이란 지성 속에서 존재하는 태양 자체이다. 물론, 태양은 하늘에서처럼 형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표상적으로, 곧 대상이 지성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만 말이다.”(AT Ⅶ: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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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만은 ‘내용 접근(content approach)’이라는 지향성 이론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설명한다. 정신적 활동은 그 활동의 내용이 아니라 그 활동의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활동은 여전히 ‘관념의 표상적 존재(object being of idea)’라는 그 활동의 내용을 통해 방향 잡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Hoffman, 2000: 174-17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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욜톤이 바로 이러한 사실을 지적한다. “분명해 보이는 것은, 직접적 실재론이 공간적 현전과 인식적 현전을 혼동할 수 없다는 사실, 곧 ‘아는 것’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을 구별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Yolton, 1975: 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