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는 외부 세계를 성공적으로 보증하는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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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는 왜 중요한가?

데카르트의 철학이 관념과 실재 사이의 대응을 보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관념’의 의미를 둘러싼 주석적 문제를 넘어서 철학적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 가령, 데카르트는 자신이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 주체의 지각을 정당화하였다고 공언하고 있다. 물론, 그는 인식 주체가 지각하는 모든 요소가 언제나 물체 속에 존재한다고까지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물체에 대한 잘못된 판단의 가능성은 인식 주체에게 언제나 남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수, 크기, 도형 등 물체가 지닌 수학적 속성에 대한 지각만큼은 틀릴 수 없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 그의 입장은 관념과 실재 사이의 대응을 분명히 주장한다.13 따라서 쟁점이 되어야 하는 문제는 데카르트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지이다. 데카르트의 주장이 정당화될 경우 그는 일종의 ‘직접적 실재론’을 제시한 것으로 여겨져야 하고, 데카르트의 주장이 정당화되지 않을 경우 그는 ‘표상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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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성찰』

많은 연구자들은 지각에 대한 데카르트의 정당화가 ‘신 존재 증명’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성찰』은 제3성찰과 제5성찰의 신 존재 증명을 발판으로 삼아 제6성찰의 외부 세계 존재 증명을 수행한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물체에 대해 지각하고 있는 내용이 실제로 물체와 대응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신이 기만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지, 전능, 전선한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신이 세계를 창조하였다면, 그 신이 인식 주체의 지각과 외부 세계의 물체 사이에 ‘지각의 베일’ 같은 매개물을 상정하였을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신 존재 증명으로부터 관념과 실재 사이의 대응을 도출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살펴보자.

(1) 신의 관념은 명석판명하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정신 속에 있는 관념을 우유에 대한 관념, 유한 실체에 대한 관념, 무한 실체에 대한 관념이라는 세 가지 분류로 우선 구분한다. 그는 이러한 관념들 중에서 ‘무한 실체’ 혹은 ‘신’에 대한 관념이 매우 특수한 성질을 지닌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신에 대한 관념은 다른 관념들에 비해 무한히 더 큰 표상적 실재성을 지닌다. 우리는 신을 다른 어떠한 것보다도 생생하고, 뚜렷하고, 분명한 실체로서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다.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더라도, 신의 관념이 명석판명하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그것[신의 관념]은 완전히 명석판명하고, 그 자체로 다른 어떠한 관념보다 더 많은 표상적 실재성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신의 관념보다] 더 참되거나 거짓의 의혹에 덜 빠지는 관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최고로 완전하고 무한한 존재자에 대한 관념은, 말하건대, 최고의 등급으로 참되다.”(AT Ⅶ: 46)

(2) 신은 존재한다: 신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신의 관념이 다른 어떠한 관념들보다도 훨씬 명석판명하다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성찰』에서 등장하는 신 존재 증명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제3성찰의 첫 번째 신 존재 증명은 신의 관념이 지닌 무한한 표상적 실재성이 결코 무로부터는 나올 수 없다는 논증을 통해 신의 존재를 도출한다. 다음으로, 제3성찰의 두 번째 신 존재 증명은 신 자신 이외에는 어떠한 실체도 무한한 표상적 실재성을 지닌 신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논증을 통해 신의 존재를 도출한다. 마지막으로, 제5성찰의 증명은 신이 자신의 실존을 정립하는 힘을 지닌다는 사실을 명석판명한 신의 관념으로부터 논증하여 신의 존재를 도출한다. 물론, 이러한 세 가지 증명이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이 제시된다. 다만, 각각의 증명은 모두 신의 관념이 다른 관념들과 달리 유일무이한 방식으로 명석판명하다는 자각을 전제하고 있다. 다른 관념들에는 곧바로 적용될 수 없는 논증이 무한한 표상적 실재성을 지닌 신의 관념에만 예외적으로 허용되고 있는 것이다.14

(3) 신은 완전하다: 신의 관념에 있는 무한한 표상적 실재성으로부터 신의 완전성 역시 도출된다. 즉, 무한한 표상적 실재성을 지닌 신의 관념을 우리가 명석판명하게 인식한다는 사실은 (a) 그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증하고, (b) 그 신이 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증한다. 따라서 이러한 신은 우리를 속이는 기만자일 수가 없다. 기만자란 결함을 지닌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신’이라는 용어로 나는, 그것에 대한 관념이 내 안에 있는 존재자를, 곧 내가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나의 사고 속에서 도달할 수는 있는 모든 완전성의 소유자를, 어떠한 결함에도 종속되지 않는 존재자를 의미한다. 이로부터 그가 기만자일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데, 왜냐하면 자연의 빛에 의해 모든 사기와 기만은 어떠한 결함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AT Ⅶ: 52)

(4) 신은 관념과 실재의 대응을 보증한다: 신이 기만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 대한 지각에서 속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정당화한다. 완전한 신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 관념과 실재 사이에 간격을 만들어 두었을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내용이 물체에 완벽하게 대응한다고까지 주장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지각하는 많은 내용이 물체를 직접적으로 그려낸다는 주장은 신의 완전성을 통해 보증된다. 즉, 우리가 지각하는 외부 세계란 단순한 허상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관념은 외부 세계의 실재로부터 직접적으로 주어진다. 신의 완전성이 관념과 실재 사이의 대응을 보증하는 근거이다.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신은 기만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그 [감각] 관념들을 나에게 직접 전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매우 분명하다. 또한 그가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을 형상적으로가 아니라 오직 우월적으로 포함하는 어떤 피조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감각 관념들을 나에게 전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매우 분명하다. 왜냐하면 신은 나에게 그 관념들의 그러한 근원을 인식하기 위한 어떠한 능력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신]은 나에게 그것들[감각 관념]이 물질적 사물로부터 생산되었다고 믿는 커다란 경향성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만일 그 관념들이 물질적 사물이 아닌 다른 근원으로부터 전달되었을 경우 어떻게 신이 기만자가 아니라고 이해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 이로부터 물질적 사물이 현존한다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 (AT Ⅶ: 79-80)

여기서 외부 세계의 존재에 대한 데카르트의 증명이 ‘신’이 아니라 ‘신의 관념’을 토대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데카르트의 증명에서 출발점이 되는 전제는 “신이 존재한다.”가 아니라 “신의 관념이 존재한다.”이다. 특별히, 그는 신의 관념이 모든 관념들 중에서 가장 명석판명하다는 인식으로부터 자신의 논증을 쌓아 올린다. 즉,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신의 관념은 다른 관념들과는 구별되는 특수성과 예외성을 지닌다. 어떠한 관념도 신의 관념만큼 명석판명하지는 않다. 어떠한 관념도 신의 관념만큼 무한한 표상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어떠한 관념도 신의 관념만큼 완전하지는 않다. 신의 관념이 다른 모든 관념들보다 명석판명하다는 사실이 외부 세계의 존재에 대한 논증을 작동하도록 하는 중심축이다. 따라서 신의 관념을 통해 데카르트가 진정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은 바로 명석판명한 관념들의 인식론적 위계이다. ‘신 존재’ 증명으로부터 ‘외부 세계 존재’ 증명을 도출하는 작업이란 ‘가장 명석판명한 관념’으로부터 ‘다른 명석판명한 관념들’을 정당화하는 작업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 자체가 아니라 신의 관념이 가장 명석판명하다는 인식이야말로 관념과 실재 사이의 대응을 보증하려는 시도에서 진정한 핵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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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있는 데카르트

명석판명한 지식과 신 존재 증명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데카르트에게 제기되는 유명한 순환논증의 혐의에 대해 해명하는 과정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흔히 (a) “무엇이든지 내가 매우 명석판명하게 지각하는 것은 참이다.”(AT Ⅶ, 35)라는 주장과 (b) “모든 지식의 확실성과 진리는 참된 신에 대한 나의 자각에 유례없이 의존한다.”(AT Ⅶ, 71)라는 주장 사이에서 순환논증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데카르트의 제3성찰은 명석판명한 지식에 의존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도, 제5성찰은 신의 존재에 의존하여 명석판명한 지식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핏 순환논증처럼 보이는 두 가지 주장 사이의 관계는 층위의 구분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각각의 주장을 ‘납득(persuasio)’과 ‘앎(scientia)’이라는 서로 다른 수준에 귀속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에게 제시된 비판에 대답한다.15 신 존재 증명은 ‘납득’의 층위에서는 명석판명한 신의 관념에 의해 직관적으로 정당성을 얻고, ‘앎’의 층위에서는 다른 복잡한 관념들에 연역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가령, 김은주가 데카르트의 순환논증을 해소하는 방식을 살펴보자.

―자족적 확실성을 지니는 명석판명한 지식은 ‘수준 1’에 속한다고 규정하자. 우리는 명석판명한 지식이 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토대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수준 1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데카르트는 얼핏 ‘신 존재 증명’이라는 연역적 추론을 통해 신의 존재에 대한 지식을 이끌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에서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활동이란 신의 관념에 대한 명석판명한 지식이다. 연역적 추론은 단지 스콜라 철학에 익숙한 독자들을 위해 제시된 외관상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신의 관념을 명석판명하게 인식한 사람에게는 별도의 연역적 추론 없이 신의 존재까지도 명석판명하게 인식된다는 주장이 데카르트가 진정으로 강조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가 수준 1에 속하는 지식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신의 관념은 수준 1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명석판명한 지식들 중 하나이다. “신은 수준 1의 명석 판명한 관념을 정초할 필요도 없고, 정초의 역할을 할 필요가 없으니 순환의 혐의도 해소된다.”(김은주, 2014b: 91)

―기억의 취약성이 극복되는 상황에서 확실성을 지니는 지식은 ‘수준 2’에 속한다고 규정하자. 우리는 종종 명석판명한 지식을 한 번 얻은 뒤에도 정신의 집중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여 다시 회의에 빠지곤 한다. 우리가 정신의 집중 상태를 지속하는 동안에는 명석판명한 지식이 유지되어도, 우리가 정신의 집중 상태를 조금이라도 놓는 동안에는 회의가 다시 생겨난다. 과거에 어떠한 대상에 대해 명석판명한 지식을 가졌다는 기억만으로는 현재에도 그 대상에 대해 명석판명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보증되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전제와 결론을 한꺼번에 지각학기 어려운 복잡한 인식은 기억의 취약성에서 발생하는 회의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신의 존재는 바로 이러한 인식에 확실성을 부여하기 위해 필요하다. 신이 기만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끊임없는 회의의 가능성을 차단해 주어야 단순한 인식에서 복잡한 인식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정신이 결론을 근거들과 동시에 주목할 때(“증명에 주의를 기울이는 동안은”), 이 인식은 수준 1에 속하며, 정신이 근거들에 주목하지 않고 결론에만 주목하는 경우, 이 인식은 수준 2에 속한다. 수준 1에서는 근거와 결론이 동시에 현전하지만, 수준 2의 경우 근거들은 ‘지나간 확실성’이 되며, 신에 대한 인식이 보증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김은주, 2014b: 92)

따라서 데카르트의 철학은 수준 1을 구성하고 있는 명석판명한 지식에서 ‘신의 관념’이라는 매우 특수한 지식을 발견해내어 수준 2를 정당화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명석판명한 지식이 다른 명석판명한 지식들에 확실성을 부여하는 근본적 토대이다. 즉, 인식 주체가 지닌 수많은 관념들 중에는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AT Ⅶ: 126)라고 일컬어지는 규칙에 근거하여 자족적 확실성을 지닌 관념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관념들은 다시 ‘명석판명한 지식’이라는 이념을 얼마나 철저하게 실현하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인식론적 위계를 이루고 있다. 가장 명석판명한 지식인 ‘신의 관념’이 다른 명석판명한 지식들을 기억의 취약성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관념과 실재 사이의 대응 역시 가장 명석판명한 지식인 신의 관념을 통해 증명된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표상주의로 해석되어야 하는지 직접적 실재론으로 해석되어야 하는지는 바로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로부터 이루어지는 외부 세계에 대한 증명이 과연 얼마나 성공적인지에 달려 있다.

Ⅴ.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는 관념과 실재의 대응을 성공적으로 보증하는가?

데카르트는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를 관념들 사이의 인식론적 위계를 설정하기 위한 기준으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인식 주체의 1인칭적 관점을 강조하는 사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이 인식 주체의 정신에 가장 확실하게 주어지는 지식인지에 대한 논의로부터 철학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하는 시도들은 모두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제시된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를 따르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데카르트의 철학이 주장하는 신 존재 증명과 같은 세부적 논증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신의 관념’에 해당하는 자리에 다른 대체물을 상정하여 인식론적 위계를 구성하려는 시도는 오늘날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신의 관념이 지닌 특수성과 예외성을 ‘감각 자료’에 대한 인식에 부여하는 러셀(B. Russell)과 에이어(A. J. Ayer), ‘감각질’에 대한 인식에 부여하는 네이글(T. Nagel)과 잭슨(F. Jackson), ‘기초 믿음’에 대한 인식에 부여하는 본주어(L. BonJour)는 모두 데카르트의 철학을 계승하고 있는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유가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 속에 ‘명석판명성의 정도 차이’를 암묵적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수많은 ‘명석판명한 지식들’ 중에서도 ‘가장 명석판명한 지식’을 다시 골라내어 관념과 실재 사이의 대응을 보증할 수 있는 토대로 정초하는 작업이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를 통해 수행되는 작업이다. 그러나 문제는 (a) 인식 주체의 1인칭적 관점에 ‘명석판명하게’ 주어진 인식은 모두 참이라는 전제로부터 (b) 인식 주체의 1인칭적 관점에 ‘가장 명석판명하게’ 주어진 인식과 ‘덜 명석판명하게’ 주어진 인식이 상이하게 존재한다는 결론이 어떻게 도출되는지가 그다지 분명하지는 않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성찰』과 『반박과 답변』에서 ‘실제로 명석판명한 것’과 ‘단순히 명석판명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두 가지가 어떠한 기준으로 나누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대답하고 있지 않다. 가령,

(1) 데카르트는 제3성찰에서 자신이 이전에는 명석판명하다고 생각한 수많은 관념들이 회의의 과정을 통해 이후에는 명석판명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중에 내가 의심스럽다고 깨닫게 된 많은 것들을 나는 이전에는 전적으로 확실하고 분명한 것들로 받아들였다. […] 내가 단언하였고, 내가 명석하게 인식한다고 습관적 믿음을 통해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명석하게 인식하지 못한 것들이 존재한다.”(AT Ⅶ: 35) 여기서 데카르트는 어떠한 관념이 우리에게 명석판명한 것처럼 생각된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관념이 실제로 명석판명하다는 결론이 아직 도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명석판명하다고 자신이 생각한 관념과 실제로 명석판명한 관념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내가 매우 명석하게 지각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자체”(AT Ⅶ: 36)에 주의를 집중하는 순간에는 그 인식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여 ‘자신이 명석판명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명석판명한 것’ 사이의 구분을 다시 무너뜨리고 있을 뿐이다.16

(2) 메르센은 『성찰』에 대한 두 번째 반박에서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제기한다. 그는 우리가 아무리 무엇인가를 명석판명하게 안다고 확신하더라도, 우리가 틀렸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당신이 명석판명하게 안다고 생각하는 문제에서 당신이 속지 않는다는, 혹은 속을 수 없다는 확실성을 어떻게 성립시킬 수 있는가? 우리는 종종 자신들의 지식이 햇빛만큼이나 분명하다고 스스로 생각한 문제에서조차 속은 것으로 드러나는 사람들을 보지 않는가? 당신의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에는 그러므로 명석판명한 설명이 요구된다.”(AT Ⅶ: 126) 데카르트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지성’에서 도출한 명석성과 ‘감각’ 혹은 ‘잘못된 선입견’에서 도출한 명석성을 구별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17 그러나 과연 그의 대답이 메르센의 반박이 제기하는 논점에 정확히 대응하는 것인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a) 메르센의 반박은 감각이나 잘못된 선입견에 근거한 명석성을 넘어서 모든 종류의 명석성에 대해 적용될 수 있다. 또한 (b) 데카르트의 대답이 ‘지성에서 도출한 명석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뚜렷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토마스 홉스와 피에르 가상디

(3) 홉스는 “지성 안에 있는 커다란 빛”(AT Ⅶ: 59)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여 명석판명한 지식을 설명하려는 데카르트의 시도가 부적절하다고 비판한다. 단순히 고집스러운 태도를 지닌 사람조차 자신이 주장하는 내용이 참이라고 강조하기 위해 ‘빛’이라는 은유를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18 데카르트는 홉스의 이러한 반박이 “인식의 투명한 명료성”(AT Ⅶ: 192)이라는 기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포착하였다. 그는 ‘빛’이라는 은유가 과연 “[인식의 투명한 명료성이라는] 주제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AT Ⅶ: 192)가 쟁점이라고 지적하면서 자신은 적절한 설명을 제시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이것[빛]을 소유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실제로 그것[빛]을 소유하지는 않는다.”(AT Ⅶ: 192)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인정한다. 그러나 적어도 데카르트의 답변에서는 ‘빛’을 소유한 사람과 ‘빛’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데카르트의 답변은 단지 ‘빛’과 ‘고집스러운 의견’이 자명하게 다르다는 그의 입장을 이미 전제한 상태에서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4) 가상디 역시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에 대해 여러 가지 비판을 제시한다. 특별히, 그는 우리가 명석판명하게 지각한다고 여기는 것을 그 자체로 참이라고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중에서 무엇이 실제로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당신이 착수해야만 하는 일은 […] 우리가 어떤 것을 명석하고 판명하게 지각한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언제 우리가 실수하고 언제 그렇지 않은지를 우리에게 안내하고 보여주는 방법을 제시하는 일이다.”(AT Ⅶ: 280) 데카르트는 이러한 반박에 대해 자신은 무엇이 실제로 명석판명한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를 구분할 방법을 제시하였다고 주장한다. 선입견을 제거한 상태에서 관념들의 종류를 구분하는 제3성찰의 작업이 데카르트가 염두에 두고 있는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내가 적절한 장소에서 그러한 방법을 제공하였다고 주장한다. 내가 우선 모든 선입견을 제거하고, 그 이후에 명석한 것을 불분명하고 혼동된 것과 구분하면서 나의 모든 주요한 관념들을 열거한 부분에서 말이다.”(AT Ⅶ: 361-362) 그러나 제3성찰에서 과연 명석판명하다고 생각되는 것과 실제로 참인 것 사이의 구분 기준이 제시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오히려 제3성찰은 관념들의 종류를 구분하는 과정에서 다시 명석판명한 인식의 원리에 호소하여 무한 실체의 관념이 지닌 특수성과 예외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가 관념들 사이의 인식론적 위계를 설정하는 기준으로 과연 얼마나 적절한지는 논란의 대상이다. 단순히 어떠한 지식이 ‘명석판명하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지식이 인식론적 위계에서 상부와 하부 중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가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즉,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명석판명한 지식이란 주관적 관점에서는 인식 주체에게 ‘가장 명석판명한 것’과 ‘덜 명석판명한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또한 객관적 관점에서는 ‘실제로 명석판명한 것’과 ‘단순히 명석판명다고 생각되는 것’으로도 구분될 수도 있다.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두 가지 층위의 구분은 지식들 사이의 정초 관계를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철학은 정작 명석판명한 인식의 원리로부터 두 가지 층위가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제시해야 하는 부분에서 언제나 설명을 중단한다. 오히려 “무엇이든지 내가 명석판명하게 지각하는 것”(AT Ⅶ: 35)이라는 용어는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가장 명석판명한 것’과 ‘덜 명석판명한 것’ 혹은 ‘실제로 명석판명한 것’과 ‘단순히 명석판명다고 생각되는 것’에 모두에 상황에 따라 애매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일종의 딜레마가 발생한다. 즉,

―인식 주체의 주관적 관점에서는 명석판명한 지식들 중 무엇이 더 근본적이고 무엇이 덜 근본적인지를 평가할 기준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 주체가 얼마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고수하는지에 따라 ‘가장 명석판명한 것’과 ‘덜 명석판명한 것’이 구별된다는 생각에는 데카르트 역시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식 주체의 주관적 관점에 근거한 평가를 배제한 상태에서 과연 무엇이 기준의 자리를 대체해야 하는지는 결코 분명하지 않다. 애초에 ‘명석판명한’ 것들이란 인식 주체에게 참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기본 층위의 지식들이다. 적어도 인식 주체의 믿음 체계 내에서는 이러한 기본 층위의 지식들이 다른 지식들을 평가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본 층위의 지식들로 상정된 ‘명석판명한 것’들을 다시 구분해야 한다는 요구는 역설에 빠진다. 인식 주체는 자신이 기본 층위에 두고 있는 지식들을 구분할 적절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외부 세계의 객관적 관점에서는 ‘참’과 ‘거짓’이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제시된다. ‘실제로 명석판명한 것’과 ‘단순히 명석판명다고 생각하는 것’이란 결국 ‘참인 것’과 ‘거짓인 것’이다. 이러한 구분에서는 단순히 어떠한 인식이 우리에게 명석판명한게 주어지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인식이 참되게 실재에 대응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으로 강조된다. 그러나 적어도 데카르트의 철학에서는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에 앞서서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가 미리 규정될 수 없다. 애초에 참과 거짓을 정의하는 기준으로 제시된 규칙이 바로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석판명한 것들 중에서 ‘실제로 명석판명한 것’과 ‘단순히 명석판명다고 생각되는 것’을 다시 구분하려는 시도는 순환논증에 빠진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를 토대로 참과 거짓의 기준을 정의하려는 과정에서 참과 거짓의 기준으로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를 정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여기서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가 지닌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난다. 명석판명한 지식들 중에서 특수성과 예외성을 지닌 지식을 구분해내어 관념과 실재 사이의 대응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즉, 인식 주체의 주관적 관점에서는 관념과 실재의 대응을 보장하는 토대가 발견될 수 없다. 우리에게 가장 명석판명한 관념조차 참과 괴리되어 있을 가능성은 언제든지 남아 있다. 또한 외부 세계의 객관적 관점에서는 명석판명한 인식의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관념과 실재 사이의 대응은 무엇이 우리에게 명석판명한지가 아니라 무엇이 실제로 참인지에 근거하여 보장될 뿐이다. 따라서 무엇인가가 ‘명석판명한’ 지식이라는 말은 그 지식이 정말 명석판명하기만 한 상황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고, 그 지식이 단순히 명석판명하기만 하지 않은 상황에서야 의미를 지닌다. ‘명석판명한 지식’이라는 개념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불분명하고 혼동된 개념인 것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에 대한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 사이의 논쟁은 바로 이러한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를 중심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데카르트가 정말로 모든 선입견을 배제한 상태에서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로부터 관념과 물체 사이의 대응을 보증하려 하는 경우, 그는 ‘지각의 베일’을 넘어설 방법을 발견할 수 없다. ‘신의 관념’을 다른 어떠한 명석판명한 지식으로 대체하더라도 외부 세계에 대한 회의는 끊임없이 발생한다. 인식 주체의 1인칭적 관점만으로는 우리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이 실제로 참인 지식과는 다를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관념은 근본적으로 실재에 도달하지 못한다. ‘관념’이라는 용어가 지각적 활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는지 지각적 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는지는 쟁점이 아니다. ‘지각의 베일’이 과연 명석판명한 지식의 원리만으로 극복되는지가 쟁점이다. 적어도 명석판명한 지식이 인식 주체의 1인칭적 관점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상, 데카르트의 철학은 표상주의로 남는다.

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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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그것들[물질적 사물들]은 나의 감각적 파악과 정확히 대응하는 방식으로 현존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많은 경우 감각의 파악이란 불분명하고 혼동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것들은 내가 명석판명하게 이해하는 속성들, 곧,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순수 수학의 주제를 구성하는 모든 속성들을 소유한다.”(AT Ⅶ: 80)

  2. 단락 (2)의 내용은 김은주(2014a)를 상당 부분 참고한 것이다. 특별히,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에 대한 김은주의 해석은 데카르트의 철학에서 신 관념이 지닌 특수성과 예외성을 강조한다(김은주, 2014a: 71; 80; 85 참고).

  3. 데카르트는 레기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납득’과 ‘앎’을 구분하면서 신에 대한 지식을 ‘앎’의 층위에 귀속시킨다. “우리를 의심으로 이끌지도 모를 이유가 남아 있을 때는 납득이 있지만, 앎은 이유에 매우 강하게 근거하고 있어서 더 강한 어떠한 이유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다. 신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경우 어느 누구도 후자[앎]를 가지지 못한다.”(AT Ⅲ: 65) 또한 그는 메르센과 지인들이 제기한 두 번째 반박에 대한 답변에서도 신에 대한 지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앎’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전까지는 확실한 어떤 것도 알 수 없다고 내가 말했을 때, 나는 오직 결론들에 대한 앎만을 말하고 있었다고 명백히 선언하였다. 우리가 그 결론들을 연역하는 데 사용한 논증들에는 더 이상 주목하지 않을 때 회상될 수 있는 그러한 결론들을 말이다.”(AT Ⅶ: 140)

  4. “하지만 내가 아주 명석하게 지각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자체로 내가 돌아설 때, 나는 그것들에 의해 매우 설득되어 자연스럽게 선언한다. 누구든지 할 수 있으면 나를 속여 보아라. 그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도록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나를 어떤 것이라고 계속 생각하는 한에서는 말이다.”(AT Ⅶ: 36, 인용자 강조)

  5. “이러한 일[속는 일]이 지각의 명석성을 추구하면서 오직 지성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본 적이 없고, 실제로 누구도 볼 수 없다. 우리는 그러한 일[속는 일]이 감각이나 어떤 잘못된 선입견으로부터 그러한 명석성을 도출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난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AT VII: 146)

  6. “‘지성 안에 있는 커다란 빛’이라는 구절은 은유적이다. 따라서 논증의 힘을 지니지 않는다. […] 이러한 ‘빛’은 왜 어떤 사람이 주어진 의견을 고집스럽게 방어하거나 유지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이 사실이 진리에 대한 그의 지식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AT Ⅶ: 191-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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