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힌두 육파의 수트라들은 한역본이든 영역본이든 이제서야 번역되는 실정이다. (번역은 불경이 사정이 좀 더 낫다.) 그 중 <니야야 수트라>의 영역본을 읽고 흥미로운 부분을 중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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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cket에서 나온 Dasti의 역본이다.)
<니야아 수트라>(와 그에 대한 세 주석)
서론 (아직 니야야 수트라 본문에 대한 주석이 아님)
Vatsyayana (니야야 수트라에 대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첫번째 주석가)
; 대상이 지식 수단(pramana ; 서양 철학이든 동북아 철학이든 적절한 번역어가 없다. pramana는 '타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경로' 정도의 의미다. 감각 지각, 추론, 유비 추론, 증언 등이 여기에 속하며, 각 학파에 따라 pramana라고 인정하는 범위가 다르다.)에 의해 충분히 이해될 때, 그 (대상을 통해 얻은 지식)은 성공적인 목적-지향적 행위에 사용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지식 수단은 유용하다. 지식 수단 없이는, 대상에 대한 성공적인 인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인지가 없다면, 성공적인 행위 역시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지식 수단을 통해 무언가를 획득한다면, 그 사람은 그것을 얻고자 하거나 거부하고자 할 것이다. 목적-지향적 행위는 이러한 욕망/혐오를 동기로 누군가의 행동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목적-지향적 행위에서, 성공은 그 행위의 결과와의 관계성이다. 즉, 대상을 얻거나 거부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기쁨이나 불쾌함을 얻거나 다른 것을 얻을 수도 있다. 지식 수단을 활용할 방법은 셀 수 없는 데, 왜냐하면 지식 수단을 사용하는 생명체 그 자체가 셀 수 없기 때문이다.
; 흥미로운 지점을 '지식'을 (인지자의) '인지적 능력'[심적 상태]와 연결하면서, 동시에 '행위'와 연결짓는 부분이다.
; 내 기억상 플라톤에게 '지식'은 '정당화'가 된다면, 인간을 '믿게 되고' 마땅히 그걸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걸 따르지 않으면 '비합리적인' '광증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니야야 수트라>의 강조점은 이와 살짝 다르게, 인지자의 능력/상황을 강조하는 실용주의적 테제가 밑바닥에 깔린 듯하다.
의혹/의심은 특정한 것에 대한 세부적인 사실들을 필요로 하는 신중한 지각(awareness)이다. 이는 (i) 인지되는 공통된 속성에 의해서 (ii) 인지되는 속성들을 구분함으로서 (iii) 논쟁을 통해 (iv) 경험에 의해 결정할 수 없을 때 (v) 경험의 부족으로 결정할 수 없을 때 발생한다.
Vatsyayana ; (i) 인지되는 공통된 속성에 의해 생기는 의혹의 예시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보자. 기둥과 사람에게는 공통된 속성이 있다. 과거 기둥과 사람을 모두 경험한 인지자가 먼 거리에 있는 어떤 높이/너비를 가진 것을 보고는 그것에 대해 알고자 한다 해보자. "저게 사람인가? 아니면 기둥인가?" 그는 결정할 수 없다. 결정적인 확인을 제공하지 않는 이러한 인지는 의심을 만든다. 인지자는 두 대상의 공통적인 속성을 경험했지만, 각자를 구분해줄 수 있는 속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인지자가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지금 경험에) 추가적인 정보가 필요하다. 이것이 의심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은 특정한 것에 대한 세부적인 사실들을 필요로 하는 신중한 지각인 셈이다.
(iii) 논쟁을 통해 생기는 의혹의 예시는 무엇인가? 논쟁이란 단일한 대상/주제에 대해 대립하는 견해를 말한다. 대립이란 반대되며,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는 "자아가 있다" 말한다면, 다른 하나는 "자아가 없다"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대상이 같은 곳에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다. 또한 이 논쟁에서 어느 쪽 견해도 완벽히 증명될 것이라는 근거가 없다다면, 이 상황에서 의심이 발생한다. 참에 대한 확인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 이는 비교철학적으로 흥미로운 내용이다. '지식'에 대한 필요충분 조건적인 정의를 구성할 수 있는 텍스트를 드물지만, 우리는 (a) 지식이 아닌 것들에 대한 예시 ; 의혹, 망상, 환각, 회의, 거짓 등과 (b) 지식인 것들에 대한 예시를 고대 텍스트들에서 재구성해 볼 수 있다.
(특히 <묵자>의 [경설] 파트와 <순자>의 [해폐]의 다음과 같은 논의들이 있다. <묵자>의 '변'은 모순율을 허용하지 않는 논쟁 상황을 의미한다.)
(아마 이와 같은 접근법에서 그레이엄 프리스트가 동북아 철학에서 역설과 모순을 테마로 한 앤솔로지를 발간한 듯하다.)
; 그리고 이와 같은 접근법은 '잘 구성된 학문적 자료'가 부족한 구전 문화 사회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 특히 수수께끼(riddle), 법적인 판결, 연설 등은 이러한 추론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잘 보여주는 장르들이다.
인도에서는 '무아', 즉 자아가 없다는 생각은 (그것에 동의하든 안 하든) 모든 사상가들이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또한 동북아에서는 '기'를 느낀다는 것, 즉 분위기를 느낀다는 사회적 인지(social cognition)/혹은 공감(empathy)가 언제나 있다고 가정되어 왔다. 반면 서양 철학에서는 무아든 공감이든 논의되지 않거나, 항상 의심되어 온 내용이었다.
오늘날 인도/중국 철학이 당당하 비교 철학의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심리적 요소들이 심리학/인지과학을 통해 결코 헛소리가 아니라는 점이 어느정도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아(anatman) 같은 경우 신경생리학적 연구에 의해 어느 정도 그 존재가 밝혀졌다고 믿어지고 있기도 하고요,
기(氣) 혹은 prana 같은 것은 그 존재가 아직 직접적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키를리안 사진기의 결과가 과학적으로 인정받는다면 또 모르지만요). 그래서 사회적 인지/공감을 '기'와 연결시키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무아' 또는 '기'가 순수한 철학적 개념으로만 사용되었다고 가정하면 인도/중국 철학의 많은 부분의 기술이 무의미하거나 허구로 변해버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심리학/인지과학 등에 의한 실증적 연구에 의해 뒷받침을 받아야만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서양에서도 기와 유사한 메스머의 'animal magnetism'이 있죠. 또, 데이비드 흄은 우리 내면에 '자아'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고요, Derek Parfit은 자아의 존재에 대한 일반적 논변이 가지는 오류를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러한 연구가 있기 이전에도 서양철학은 당연히 진정한 철학으로서 여겨졌지요. 이는 어쩌면 서구 학자들이 선점한 글로벌 지식계의 특권적 지위라는 극히 '사실적/현실적'이라는 요소 때문인 것인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