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철학에 대한 (타 문화 철학과의) 간단한 비교와 역사

(0) 아마 인도 철학만큼 요근래 급성장한 철학사 연구는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를 뽑자면 이슬람/유대 철학을 포괄하는 서양 중세 철학인데, 요즘 상황을 보면 약간의 공회전을 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20세기 초반에 나온 라디크리슈난의 <인도 철학사>에서 다루는 내용은 이제 거의 앙상한 뼈대만 다룬 수준일 정도다.

이 글은 최근 내 공부를 간략히 요약하려 적은 것이기에, 오류가 많을 수도 있다.

(1)

인도 철학에 대해서 간단히 아시는 분들이라면, 인도 철학이 크게 힌두교 육파철학과 불교, 자이나교 등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하지만 서양 철학에 익숙한 눈으로 이 구분을 보자면, 몇 가지 오해가 있을 수 있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힌두교가 명확한 경계를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악명 높은 종교라는 점을 말해야 할 것이다. 사실, 불교나 자이나교처럼 '난 힌두교와 다르다!' 선언한 종교를 제외한 인도 아대륙의 모든 종교/문화적 전통을 다 힌두교로 부르는 것 아닌가....싶을 정도다.

힌두교에는 공통의 경전도, 공통의 의례도 없다. 따라 공통의 사상/교리가 없는 것은 당연지사다. 어떤 의미에서 힌두교도들이 공유하는 것은 딱 하나다. 해탈(모크샤)를 위한 삶의 방식이다.

이런 느슨한 전통에서, 육파 철학이란 무엇인가? 우선 힌두교도들이 모두 믿는 교리 혹은 그 교리와 세상에 대한 이론을 통합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애당초 모두가 믿는 교리 같은 것은 없으니깐!)(따라서 서양 중세 철학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면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처럼, 하나의 학파인가? 그조차도 적절한 분류가 아니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 학파에 속하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에 속하는 사람이 있다 말하는 것은 조금 기묘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각 학파는 (영향을 주고 받을지언정) 서로 독립적인 하나의 온전한 시스템을 만들고자 했다.

차라리 육파 철학은 오늘날의 분석 철학에서 심리철학, 언어철학 등의 분야를 나누듯 여섯 개의 (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 분야에 관한 논의라 보는 것이 적절하다.

(1-1)

육파 철학, 샹키아, 요가, 니야야, 바이쉐시카, 미망사, 베단타. 이들 여섯은 모두 하나의 텍스트, 수트라에 대한 연구를 기반으로 성립한 학파다.

수트라는 흔히 경으로 번역되는데, 힌두교의 맥락에서는 부적절할 수 있다. 불교에서 경은, 석가모니 본인의 말이나 여러 보살의 말이 담긴 문헌을 경이라 한다. (이것이 차후 동북아에서 경이 의미하는 바가 되었다.) 하지만 힌두교의 수트라는 두 가지 점에서 전혀 다르다. (a) 굳이 신의 말일 필요는 없다. 그저 (지적이든 뭐든) 어떠한 권위가 있는 말이면 된다. (b) 아포리즘, 즉 논문의 스타일로 쓰인 글이다. 즉, 사실상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을 담은 책이다.

예컨대, 니야야 학파의 수트라인 <니야야 수트라>는 논리 (추론 방식)과 지식의 문제, 즉 인식론과 논리학을 다루는 텍스트다. 미망사 학파의 수트라인 <미망사 수트라>는 베다에 대한 해석을 다루는 언어학적 문제와 베다 의례를 정확히 수행/평가하는 것을 다루는 텍스트다. 요가 학파의 <요가 수트라>는 요가라는 수행법에 관한 문헌이다.
또한 육파 철학에 속하지 않는 다른 수트라도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성 기술에 관한 문헌인 <카마 수트라>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심리 철학을 하면서 언어 철학을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듯, <니야야 수트라>를 연구하면서도 <미망사 수트라>를 연구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 셈이다.

(1-2)

힌두교 육파 철학의 정통과 불교/자이나교의 외도를 구분하는 큰 기준으로 보통 '베다의 권위에 대한 인정'을 말하지만, 이는 오해의 여지가 있는 해석이다.

베단타처럼 베다의 권위를 굉장히 존중하며, 사실상 추후 유신론적 종교 그룹인 비슈누파/시바파와도 밀접한 연관이 되어 있는 파도 있는 반면, 미망사처럼 베다의 문제를 다루지만 어느순간부터 언어철학에 가까운 논의를 다루는 그룹, 니야야처럼 베다에 관한 언급 자체가 드문 그룹까지 있다.

따라서, 정확한 표현은 <베다의 권위에 명시적으로 도전하지 않는> 그룹이 육파인 셈이다. 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베다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누구는 문자 그대로 해석할수도, 누구는 비유적으로 볼 수도 있다.

(1-3)

힌두교의 학파/종파는 사실 정확히 정의하기 까다로운 문제다. 내가 보기에, 이들은 특정한 텍스트/그에 대한 해석을 기반으로 형성된 일종의 집단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니야야 학파는 <니야야 수트라>를 연구하는 그룹, 미망사 학파는 <미망사 수트라>를 연구하는 그룹.

혹자는 그럼 왜 여섯 개를 '파'로 구분하느냐, 그냥 학문으로 구분하면 되는 것 아니냐, 되물을 수 있다. 이는 힌두교 특유의 교육 시스템과 연관되어 있다.

불교와 자이나교는 승원처럼 거대하고 독립적인 일종의 대학을 운용하였다. (이는 이슬람교의 마드라스, 서양 중세의 대학과 유사하다.) 따라서 이들은 (같은 종교의) 각기 다른 종파/학파일지라도 하나의 공통 커리큘럼을 가졌다.
반면 힌두교는 철저한 구루 제도, 즉 사승 제도로 운용되었다. <니야야 수트라>를 배우기 위해선, 이 수트라에 정통한 선생을 찾아가 배워야하는 것이다. 따라서 힌두교 지식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스승에게서 한 분야의 지식을 전수 받은 전문가로서, 왕궁 등지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고 때론 다른 왕궁에도 가는 (고대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식객과도 같은 위치였던 셈이다. 이러다보니, 한 수트라에 정통한 사람이 다른 수트라에 정통하기는 어려웠다.

(1-4)

요즘 인도 철학의 범위는 힌두 육파 철학과 불교/자이나교/차르비카 같은 외도뿐 아니라, (당대에는) 독립된 학문으로 취급받던 문법학, 수학 등의 학자들도 포함하는 추세다. 왜냐하면 이들은 문법/수학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도, (오늘날에는 언어철학/수리철학이라 부를만한) 형이상학/인식론에 대한 주장들을 했기 때문이다.
문법학자로서는 바르트하리(Bhartrhari), 수학자로는 Sridhara 등이 철학의 영역에서 논의되는 듯하다.

(2)

인도 철학의 간단한 시기 구분은 다음과 같다.

(a) 베다 시대/브라흐만교 시대
; 통상 베다에 나오는 복잡한 의례를 집전하고, 그에 대한 지식을 담당한 전문층이 정치적 권력까지 획득하고 있을 때의 (초창기 힌두교를) 브라흐만교라 한다. 이런 베다에 관한 논의들은 점차 살을 붙여서 우파니샤드 문헌과 같은 세상에 대한 논의들, 즉 우리가 흔히 아는 철학의 형태를 이루게 된다.

(b) 수트라의 시대
; 우파니샤드의 논의에 집중하던 사상가들은, 의례 중심의 브라흐만교와 거리를 둔 채 이곳저곳을 떠돌며 수행과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 흐름에서 등장한 것이 오늘날 육파 철학과 불교/자이나교/차르바카와 같은 외도다.
이 시기 학자로는 육파 철학의 창시자들 (다만 이때 창시자들이 아비달마처럼 체계적인 시스템을 만들었다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들은 대체로 학파의 수트라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상정된 인물들이다.), 아비달마 불교, 나가르주나(대승 중관), 바수반두(대승 유식), 자이나교, 차르바카 등이 있다.

(c) 논쟁의 시대
; 육파 철학과 불교/자이나교/차르바카는 각각의 독립된 학문과 기관을 성립한다. 그 후, 이들은 공통된 '산스크리트어' 학문 공동체에 속하며 서로를 대상으로 여러 논쟁을 펼치면서 학문을 성립시킨다. 이 시대가 이전 시대와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다.
(i) 첫째 이 시기 학술 문헌들은 산스크리트어로 쓰였다는 점이다. 이는 당연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지만, 사실 상황은 복잡하다. 산스크리트어는 (a) 베다 시대부터 쓰였던 고급 언어였지만 (b) 수트라의 시대에 와서는 문어와 구어의 차이가 생기고 있었다. (문어/구어가 사실상 동일한 한국어 화자로서는 쉽게 와닿지 않는 현상이긴 한데, 우리가 글로 쓰는 한국어와 채팅에 쓰는 한국어가 다르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된다.) 그리고 이 시기 쓰인 수트라는 산스크리트 구어인 프라크리티로 왕왕 쓰였다. (중요한 초창기 불경들은 프라크리티의 일종은 팔리어로 보존되어있다.)
이러한 지역 간 차이, 계층 간 차이에도 불구하고 학술 공동체는 다시금 산스크리트어라는 공통의 학술 언어를 고른 셈이다.

(ii) 둘째, 공통의 논리적 규범이 확립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이후 고대 철학과 중세 철학에서 '논의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공통의 툴이었던 것처럼, 이제 니야야 - 불교의 디그나가 - 자이나교 등은 모두 (세부에서는 다를 수 있지만) 어떤 공통의 논리학적 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이 인도 고전 논리학이라는 주제는 인도철학자들이라면 (비판하든 수용하든) 다룰 수 밖에 없는 주제가 되었다.

보통 여기까지를 고전기 인도 철학이라 부른다.

이 시기의 학자로는 디그나가/다르마키르티 (불교 인식 논리학의 확립자), 바비베카/산타라크쉬 (중관 철학에 불교 인식 논리학을 결합시키려 한 그룹), 웃도타카라 (니야야 학파의 체계화한 인물), 쿠마릴라 (미망사 학파를 체계화한 인물), 샹키아 (베단타 학파를 체계화한 인물) 등이 있다.

(d) 회의주의와 신비주의의 시대
; 대략 10세기 경을 기준으로 한다. 이때의 인도의 정치적 상황은 혼란기였다. 북서부 인도를 점령했던 그리스 - 페르시아 - 중앙아시아 계통의 사람들은 빠르게 힌두화되었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새로 출현한 무슬림들은 힌두화되기는 커녕,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며 남하하였다. 이 과정에서 불교가 사라진다. (이후 티베트 불교 철학이 사실상 인도 불교 철학을 계승한다.)
또한 인도 각지에서 박티/탄트라 운동이 일어난다. 이는 신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는 일종의 종교적 운동이었다.

따라서 기존의 논리학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던 사변적 학문이었던 철학을, 박티라는 틀에서 재해석하는 학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시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듯하다. Jayarasi [차르비카의 영향을 받은 독립적인 학자], Sriharsa는 전 시대의 논리학적 논의들에 급진적인 회의주의를 주장한다. 다만 둘의 배경은 다른데, Jayarasi는 베다조차 부정한다면, Srihasa는 회의주의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베다를 믿어야 한다는 유신론적 주장을 한다.
Srihasa 같은 유신론적 흐름은 나가르주나 - 바수반두의 회의주의/유심론을 적절히 힌두교적으로 변형한 샹키아, 그리고 샹키아의 사상을 수용한 시바파/비슈느파에 의해서 꾸준히 주장된다. 카슈미르 시바파와 타밀 시바파, 여러 베단타 학파가 이러하다.

다만 기존의 실재론/논리학적 학풍은 여전히 계승된다. Gangesa에 의해 신-니야야 학파가 주창된다.

(e) 무굴 제국의 시대
; 인도 철학계는 크게 신-니야야 학파의 실재론, 베단타/시바파의 관념론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인도 아대륙에서 이슬람 철학이 이때부터 연구되기 시작한다.
이븐 시나의 논리학, 수흐와라마르디의 조명 철학은 물론 신플라톤주의에 가까운 수피즘/시아파 교리까지 골고루 수입된다. 다만 얼만큼의 독자성이 있었는가? 그리고 기존 인도 사상과 교류가 있었는기? 이는 연구가 거의 되지 않은 분야이기에 대답하기 어렵다.

(3)

인도 철학의 스펙트럼을 아주 넓게 보자면 다음과 같다.

니야야/바이셰쉬카/미망사/아비달마 ; 이들은 마음 독립적 실재에 관해 논의한다. (다만 자아에 관한 견해, 범주의 구성 요소에 관한 견해가 다를 뿐이다.)

샹키아/요가/베단타/유가행/카슈미르 시바파/타밀 시바파 ; 이들은 마음 독립적 실재를 부정하며, 일종의 유심론/관념론을 주장한다.

Jayarasi/나가르주나/Sriharsa ; 회의주의. 다만 이들이 회의주의는 각기 다른 목적에서, 각기 다른 것들을 부정하며 성립한다.

(3-1)

14세기 쓰여진 Sarva-darsana-samgrha (모든 철학적 체계에 대한 개요서)라는 책은 당대 존재하는 주요한 인도 철학의 학파들을 개괄한다. 이는 총 16개로 순서는 다음과 같다.

a) 차르바카 ; Jayarasi가 대표적인 차르바카로 여겨진다.
b) 불교
c) 자이나교
d) 스리 비슈느파 ; 라마누잔으로 대표되는 제한적 불이원 베단타에 기반한 종파다. 베단타는 기본적으로 절대적인 실체인 브라만과 개별자들의 관계에 대한 이견으로 분파가 갈라진다. 그 중 제한적 불이원 베단타는 개별자들은 브라만에서 기원한 것이지만 질적? 양태적 차이가 있다는 입장이다.
e) 이원 베단타 ; 브라만과 개별자가 독립적인이며 구분된다 주장한다.
f) 파슈파타 시바파 ; 비슈느파는 대부분 베단타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것에 반해, 시바파는 제각기 다른 철학적 입장을 지닌다. 내가 대충 읽어본 바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형이상학-자연 철학에 불교의 구원론을 한 스푼 섞은 느낌이다. 이들은 비슈느파/베단타의 구원론이 절대적 실체-자아의 (동일한 것이든 독립적이든 뭐든) 의존성을 강조한다며, 이는 진정한 해탈이 아니라 본다. 이들은 (아비달마 불교처럼) 세상의 구성 요소 하나하나를 올바르게 앎으로서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긴다. (이들에게 시바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처럼 최초의 원인에 가깝다.)
g) 시바파
h) 카슈미르 시바파 ; 이들은 앞서 말했듯, 유심론/관념론에 가까운 입장이다.
i) 라세즈바라 ; 시바파의 일종이지만, 도교의 신선술에 가까운 주장을 한다. 이들은 해탈을 위해서는 수은을 사용해 몸을 불멸로 만들어야 한다 주장했다 한다. (근데 정말 도교에 가까운 주장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j) 바이쉐시카
k) 나야야
l) 미망사
m) 파니니 ; 문법학자. 의외로 인도 문법학은 고대 인도에서도 독립된 철학 학파로 여겨질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여겨지지 않는 근거는 이들은 해탈 혹은 마음에 대해 다루지 않기 때문이었다.)
n) 샹키아
o) 요가
p) 불이원 베단타 ; 책의 저자가 궁극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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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어 배워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1) 산스크리트어....전 독학을 몇 번 시도했었는데 정말 쉽지 않더군요. 고전 한문은 고도의 기묘한 화용론적 센스가 필요해서 어려웠다면, 산스크리트어는 엄격한 격변화라는 모든 경우의 수와 싯다라는 악명 높은 음운 변화의 산을 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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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스크리트어하는 동료들이 있는데 고대그리스어 배웠으면 크게 어렵지 않다고 막 꼬시더라구요. ㅋㅋㅋ 조금만 더 시간이 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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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나가르주나가 '회의주의'라는 카테고리로 묶인다는 점이 개인적으로는 약간 아쉽네요. 나가르주나 같은 인물들은 현대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인용되기도 하잖아요. 2000년대 한국에서만 하더라도, 나가르주나, 노자, 장자 등을 데리다와 연결시키는 논의가 유행했고요. (서강대 김형효 교수님이 이런 논의들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신 분이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래서 단순한 회의주의보다는, 뭔가 다른 분류로 묶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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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나가르주나(용수)를 해석하는 방식은 (여느 회의주의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처럼) 꽤 층위가 다양한 편이지만, 특히 문화권마다 특색이 꽤 달라지는 듯합니다.

(2)

대체로 인도 철학사의 맥락에서 나가르주나를 접근하게 될 경우, 아무래도 논리학과 인식론적 측면의 방법론적 회의주의자로 인식되는 듯합니다. (아무래도 나가르주나의 선대였던 아비달마 논의들과 후대의 디그나가-쿠마릴라 같은 학자들의 영향이겠죠.)

다만 중국을 포함한 동북아의 맥락에서 용수는 대체로 장자와 유사한 회의주의/신비주의?적(형이상학적?) 뉘앙스가 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이는 당연히 아비담마가 주류가 아니였으며, 디그나가 같은 논리학적 논의는 사실상 수용되지 않았고/없었던 중국 사상계 내에서, 장자 같은 현학적 논의로 중관을 수용한 이상, 어쩔 수 없는 귀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볼 때 김형효님의 논의는 이러한 반-이성주의랄까요..일종의 해체주의적 논의의 한 갈래로 보이네요.)

다만 화엄/법상에서는 (단순한 불립문자로 끝나지 않는) 꽤 거대한 이론을 장자-용수라는 스펙트럼에서 만들었으니, 이 부분을 연구하다보면 무언가 새로운게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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