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이유는 이슬람의 유입과 정치 권력과의 타협 실패였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당대 인도 명상가들이 굳이 불교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부수적인 이유로 보고 있습니다. 힌두교 철학에서 '목격자(seer)로서의 자아' 관념과 베단타의 '둘이 아님으로서의 자아' 개념 등이 당시 요가 명상가들의 경험과 일치한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수행을 위해 무아론과 불교를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 풍조가 점점 커져갔을 가능성입니다. 게다가 불교의 견해를 상당수 흡수해서 힌두교 전통에 속한 여러 사상들(예: 상키야, 아드바이타 베단타 등)이 정교해져가면서, 불교를 어쩌다 접하더라도 '이거 우리 스승님 말씀이랑 똑같잖아' 하면서 별 관심을 두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최근 나온 책 중 "자아와 무아(마크 시더리츠 외, 2022)"가 인도 철학에서의 자아론 및 무아론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불교와는 달리 자이나교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자이나교에서 설하는 것과 같이 지와(jiva)를 전제한 '목샤(moksha)'는 받아들일 수 있었어도, 무아(anatman)를 전제로 한 불교의 열반(nirvana)에 대해서는 '그 열반도 결국 어떤 실체나 자아가 아니냐'는 의문 때문에 쉽사리 납득하지 못하는 요기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단순히 인도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유신론자들의 입장에서, 불교도들이 '불경'스러웠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예: 라마누자는 불교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한 아디 샹카라를 두고, 신에 대한 박티(bhakti)의 필요성을 없앤다며 삿된 자라고 비난했습니다).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십지보살 등 대승불교 특유의 복잡한 수행 체계도 평신도 입장에서 불교를 굳이 계속 신행해야 할 필요성을 납득시키는 데 효과적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출가자 입장에서라면 모르지만, 재가 신자들 입장에서는 그 목적지까지의 거리감이 아주 컸을 것이고, 해탈을 '이생에서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것이며, 그래서 더 쉽게 불교를 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지금도 '참나 논쟁' 등이 불교계에서 계속 제기되는 것처럼, '어디까지를 깨달음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명상가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1) 굉장히 흥미로운 견해입니다. 제가 보았던 서적들에서는 거의 나오지 않던 내용인데 혹시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 서적이 기억나시는지 궁금합니다.
(2)
; 즉 인도 대중에게 무아론에 기반한 불교는 더 이상 해탈(모크샤)를 위한 매력적인 길이 아니었다는 해석이신거죠?
일리가 있는 해석이라 전 생각합니다. 특히
이 두 부분에 대한 지적은 와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실제로 열반(니르바나)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선 초기 불교부터 복잡다단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3)
다만 재가신도의 불교 이탈에 관해서는 조금 다른 견해가 있긴합니다. 결국 인도 불교도 종국에는 밀교가 되었고, 밀교는 축 중 하나가 재가신도들에게 베푸는 다라니 등과 같은 의례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름 불교도 신도들의 이탈에 대해 나름 적응하려 했다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벵골처럼 한정된 지역에서만 그런 흔적이 보이는 것보면, 뒤늦은 적응일 수도 있겠죠.)
; 이 부분도 사실 확신이 잘 들진 않습니다. 서양 중세 근대에서도 맘에 안 드는 사람을 공격할 때 무신론자나 이단이라고 부르는게 횡횡했지만, 정말 비판자가 무신론자인지 공격자가 충실한 유신론자였는지 의문의 여지가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 특히 박티의 시대에도, 박티와 큰 관련이 없는 신 니야아 학파 등이 북인도와 카르타나카 전체를 걸처 아름아름 활동했던 점에서도 과연 무신론이라는게 정말 문제였나 싶기도합니다. (따지고보면 자이나교도 무신론이기도 하고요.)
해외에서는 Kalupahana, Griffiths, Siderits 등의 분들이 불교 철학과 힌두 철학 사이의 연관성, 상호 영향에 대해 많이 연구합니다.
사실 둘을 상호 비교하는 연구는 기원전이나 초중기 중관/유식 정도의 시간대를 주로 다루고, 제2천년기(예: 슈리하르샤, 찟수카) 시간대는 상대적으로 잘 다루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미 다르마키르티가 활동할 시대부터 불교의 세력이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인도에서 불교의 쇠퇴는 이미 기원후 제1천년기 내내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고, 이슬람은 단지 쐐기를 박았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주제에 관심이 있어서 겉핥기로나마 자료를 찾아보면서 느낀 점은, (b)에 대해서는 상당히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반면 (a)는 아직 한참 연구가 진행중이고 구멍이 많지만, 그래도 흥미로운 내용들이 제법 나와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경래(2012)에서 지적한 바처럼, 힌두교적 배경이 있었던 분별설부의 붓다고사가 베다와 유식학파뿐 아니라 상키야의 영향까지 두루 받았을 가능성입니다. (c)의 경우, 타밀 지역의 불교 전통은 시바파와 비슈누파에 밀려 대체되고 있었지만, 의외로 몇 번의 재부흥을 거치며 18세기까지만 해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었고, 문학 작품(예: 11세기의 타밀어 문법 교재 Veerasoliyam)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 주제는 (a)보다도 연구 성과가 적은 편입니다.
이 부분은 아무래도 남아시아 연구, 그것도 사상사 연구는 대체로 산스크리트어에 집중해서 생기는 일 같습니다. 드문드문 지역학이나 문학/문화 연구하시는 분들은 로컬 언어를 하는 전공자분들이 계시지만 (물론 그래도 영미권에서는 한 언어당 다섯명 안팎이라는 적은 수처럼 보이긴합니다.) 사상사쪽으로는 본 적이 없습니다.
이제 인도 학계가 점점 커지고 좋은 퀄리티의 논문들이 나오니 이 부분에 있어서의 정보 격차가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비해 10년 전후로 나오기 시작한 인도관련 영문 논문/단행본들은 인도 내에 있는 연구자든 영미권에 있는 연구자든 그 수준이 상당하더군요. 싱가포르의 논문 퀄과 함께 굉장히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