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인 모순'과 동상이몽

양진주의(兩眞主義, dialetheism)의 핵심 명제는

참인 동시에 거짓인 진술이 있다 (혹은 '있을 수 있다')

입니다. 이는 곧 참인 모순을 받아들이는 근간이 되죠. 이러한 입장을 뒷받침해주는 초일관 논리(paraconsistent logic)가 근래에 보다 깊게 연구가 됨에 따라 양진주의 또한 철학적으로 보다 진지한 논의 대상이 되어가지고 있죠.

이를테면 그레이엄 프리스트(Graham Priest), JC 빌(JC Beall) 등 명망있는 양진주의 연구자들은 (사실 다른 많은 학자들의 반응은 좀 뜨듯미지근합니다만) 각각 불교 철학 및 기독교에서의 삼위일체 문제에 양진주의에 의거한 해법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또한 당시 많은 논리학도, 철학도들이 경악했다시피, 2018 수능 9월 국어영역 모의평가에 프리스트의 초일관 논리가 지문으로 등장하는 충격과 공포의 사건이 있기도 했죠.

2020년 Philpapers에서 열린 철학자 의견 앙케이트에서도 양진주의가 한 항목으로 올라왔습니다. 그 결과는 이러했는데요.

일단 응답자의 71%는 양진주의를 부정하는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에 달하는 응답자는 양진주의가 현실적으로 성립한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이 설문조사를 두고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언제 양진주의가 이렇게 득세했지?"라는 의문이 Reddit에 올라왔는데요.

이 결과를 두고 여러 설왕설래가 오고 갔습니다. 철학적인 분석도 있었고, 최근 비고전 논리학 및 논리철학계에서 오고간 여러 흐름에 대한 논의도 있었는데요. 케니 이즈와란(Kenny Easwaran) 텍사스 A&M 대학 교수가 데이터를 살펴보고 내린 설명이 꽤 흥미로웠습니다.

한마디로 "참인 거짓이 있다" 라는 명제에 찬성한 응답자 중 상당수는 적어도 현대 양진주의적 맥락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이유 때문에 찬성을 했을 것이라는 분석인데요. 저한테는 적어도 폐부를 찌르는, 결정적인 설명인 것 같습니다.

이처럼 특정 철학 개념 혹은 명제를 두고 별개의 철학자들, 혹은 철학적 전통에서 동상이몽을 꿈꾸는 사례는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러 전통에 속하신 철학도께서 함께 계시는 이곳 포럼에서도 사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 같은데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이런 양진주의 해프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더 나아가 이런 '동상이몽' 시나리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시게 되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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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선 양진주의에 대해서는, 불교(사실 그레이엄 프리스트가 인용하는 불교논리학을 사용하는 방식을 보았는데, 제가 생각하는 양진주의와는 좀 거리가 있어 보였습니다. ~~A = A라는 걸 부정하는 방식인데, 이게 과연 양진주의로 이어지나 좀 의문입니다. 사실 자이나교의 철학이 여기에는 더 정확한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언제나 합니다. 자이나교는 양진주의와 동일한 "참이면서 거짓인 진술이 있다."라는 주장을 자신들의 핵심으로 삼으니깐요.)에 관심이 있어서 생각을 했었는데,

여기에는 단순히 논리학이나 논리철학의 문제보다는, 보다 많은 걸 함축하는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필연적으로 이 문제는 '참'이나 '모순'이 무엇이냐, 하는 형이상학적 문제로 이어진다고 개인적으로 느낍니다. 짤막하게 나마 자이나교를 언급했지만, 자이나교가 저 주장을 하는 근거에는, 결국 모든 인간의 인지능력은 한정되어있고, (깨닫지 못한) 인간의 주장이란 곧 한계가 있다는 인식론적 주장입니다. (유명한 장님 코끼리 일화는 원래 자이나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레토릭입니다.) 어찌보면, 이 주장은 포퍼/과학철학류의 반증 가능성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참이라 생각하지만, 언제든 반례가 등장해 반증될 수도 있다.

(2) 그것과 별개로, 동상이몽 시나리오는 재미있다 여깁니다. 동상이몽이야 말로 학문의 발전으로 나아가는 핵심적인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동서고금의 맥락에서 (동일하지 않더라도) 비슷한 사례들과 논증들을 모으고, 그 과정에서 특이성들을 포괄할 수 있는 설명이 나온다면, 항상 이렇게 이론이 발전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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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지적이네요. 듣고보니 "참인 모순"이라는 말이 아주 다른 방식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Mandala 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어쩌면 이런 논의에는 조금 더 깊은 층위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프리스트가 ~~A=A를 부정하는 게 양진주의로 본 건 맞는지 모르겠네요. 이중부정 원리를 부정하는 건 직관주의 논리의 IP같은 건데 양진주의 논리에서 함축되는 주장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실제로 여러 가지 대안적인 논리 체계들이 많이 연구되면서, 논리학과 형이상학 사이의 밀접한 관계(특히, 양화나 양상이 개입되는 경우)에 대해서도 꾸준히 논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wildbunny 님께서 언급하셨다시피 양진주의라는 건 초일관논리(paraconsistent logic)의 전개 과정에서 발전된 것으로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약간 사족을 달아보겠습니다.
고전 논리학에서는 p와 ~p로부터 임의의 q로의 논증이 언제나 타당한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초일관논리는 이를 거부하는 입장을 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경우에는 p와 ~p로부터 q로의 논증이 부당할 수 있다는 것이죠. 말인즉슨, p&~p가 참이면서 q가 거짓인 논증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p&~p라는 자기모순명제가 참인 경우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셈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충분히 좋은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은 내적인 비일관성이 있다면 그 이론으로부터 아무 것이나 추론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측면도 있는 것 같긴 합니다. 문제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연역 논리를 수정하는 게 좋은 방법이냐 하는 거겠죠. 글쎄, 제 생각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동상이몽은 피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꾸준한 대화가 이몽을 다소 제거해줄 수는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도 있지 않을까 해요. 서로에 대한 이해가 언제나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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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또한 이런 동상이몽이 학문적 담론을 발전해낸다고 생각합니다. 니체를 끌어와 얘기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니체는 학문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않을 경우에만, 다시 말해 학문이 연구를 종결하지 않는 경우에만 이 확신이 학문으로 들어가는 허가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니체의 생각은 '영원회귀'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학문적 담론은 많은 신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분위기에서 발전해 갑니다. (중략) 니체가 영원회귀를 주장할 때 학문적인 근거를 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이 아포리즘(=영원회귀)을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수의 가능한 신들과 다수의 가능한 진술들이 존재하며 이들 중 어떤 것도 독점적 요구를 할 수 없는 장을 밝히는 것이 학문이라면, 모든 가설들 중에서 가장 학문적인 가설이 중요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학문이 "우리 한번 살펴봅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당신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계속 살펴봅시다"를 토대로 해서 서로 불일치하는 진술들이 발전해 가는 장이라면, 영원회귀는 모든 가설들 중에서 가장 학문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영원회귀가 니체가 학문과 관련해 해석해 낸 이 논리의 장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의 진술이 독점적 권리를 갖는다는 신학적 가설을 완전히 포기할 때에만 비로소 영원회귀는 존재할 수 있습니다. - 출처: 리오타르, Nietzsche und die Sophisten

니체의 위와 같은 입장은 "참인 동시에 거짓인 진술이 있다(혹은 있을 수 있다)는 양진주의와도 어느정도 일맥상통한다고 보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양진주의는 진리를 거부하고 양가성을 인정함으로써 이항대립의 독단성을 거부하는 주의입니다. 그리고 양진주의는 모순된 삶의 문제에 더 다가간다는 점에서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물론 여전히 참과 거짓의 문제(진리와 가상의 대립)를 포함하는 양진주의보다 가상만이 존재한다는 니체가 더 효과적인것 같지만, 흥미롭게 보고(만)있습니다. (논리학 공부 어려워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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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dala
말씀해주신 것처럼 사실 인도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프리스트의 해석에 대한 반응은 뜨뜻미지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그런데 프리스트의 주된 해석은 중관 학파에서의 4구(catuskoti) 논리에 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관 학파와 자이나교 간에도 철학적 연결점이 있나요?

더불어 @Raccoon 님이 말씀해주신 것처럼 ~~A에서 A를 끌어내는 이중부정 규칙은 양진주의와는 독립적입니다. 다만 프리스트의 논문을 보니 불교 철학을 해석할 때 쓰는 논리 체계로 First-degree entailment(FDE)를 제안하네요. FDE는 양진주의의 기반 논리(예. Logic of paradox)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논리 체계입니다만, FDE는 배중률/이중부정의 논리적 참을 부정하는게 맞습니다 여전히 이중부정 규칙은 받아들입니다.

@Raccoon
'연역 논리를 수정하는게 좋은 방법이냐'하는 것 역시 최소 콰인, 퍼트남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본적인 질문이죠!

@sophisten
리오타르의 니체 해석 역시 곰곰히 따져볼 주제입니다만 ... 사실 현대 양진주의의 주창자라 할만한 프리스트는 '양진주의를 받아들이는 논리 체계야말로 (타 논리 체계들에 비해) 옳은 논리 체계다!'라는 논제를 옹호하는 영향력 있는 논변을 제시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프리스트는 양진주의를

진리를 거부하고 양가성을 인정함으로써 이항대립의 독단성을 거부하는 주의

로 파악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을 듯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말씀해주셨듯이, 어쩌면 동상이몽이야말로 철학적 발전의 원동력일 수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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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질문 주신 내용은 대답하기 어렵네요. 일단 자이나교는 거의 연구되지 않는 영역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종교학적으로 연구하는 소수의 학자를 제외하면 엽미권에는 자이나교 전공자가 없습니다. 유럽도 사정은 비슷한데 미국보다는 살짝 나은 정도입니다.
그러다보니 저도 자이나교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합니다.

다만 자이나교와 불교의 중관, 힌두교의 미망사와 나이야 학파가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티베트 불교 개론서(일종의 책 장르명입니다. 체계적으로 불교의 교리를 정리해놓은 입문서 격은 책들이죠.)에 언제나 미망사, 나이야와 함께 자이나교가 외도로 언급되며 비판된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미권에서는 불교와 힌두 철학의 관계에 대해선 꽤 논의가 진전되었지만 자이나교에 대해서는 아직 잘 다루고 있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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