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나교의 철학?

예전에 와일드버니님이 올리신 글에, 제가 짤막하게나마 자이나교를 언급한 적이 있었고, 와일드버니님이 자이나교에 대해 물으셨을 때 제가 아는 바가 없다고 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오늘, SEP를 보던 도중 자이나 철학이 새롭게 업데이트 된 것을 보았습니다.
Jaina Philosophy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처음 보는 저자인데, 역시 영미권에서 활동하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전체 번역도 시간이 나면 할건데,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만 짤막하게 번역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인식론
    3.4. 실제론(realism)과 다면성(many-sideness)
    3.4.1. 구분하기

자이나 철학에서 이러한 지식의 목적이 가진 복잡성[앞 부분인 '추론하기' 파트에 있는 부분인데, 자세한 내용은 저도 읽어봐야 알 것 같습니다.]은 깊이 분화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원전 5-6세기, 마하비라(Mahavira ; 사실상 자이나교를 만든 개조)가 있던 시기, 하나의 방법이 떠돌아다니는 탁발승들의 여러 지적인 흐름에서 관찰된다. [이 흐름에는 불교를 만든 싯다르타도 있습니다.] - 바로 철학적인 질문에 한 면뿐인 대답을 하는 대신, 그 질문이 가진 각기 다른 전제와 가능한 의미를 밝히는 것이다. (이는 아마, 성스러운 텍스트를 해석하는 주석학적 전통에서 기원했을 것이다. 이 전통은 하나의 문장이 가질 수 있는 여러 관점을 분석하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자이나교 전통에서 이에 대한 가장 유명한 예시는 다음과 같다.

"loka"(세상과 자아 모두를 의미한다)는 영원한가요? 아니면 영원하지 않는가요, 자말리?"

"세상은 영원했었고, 영원하며, 영원할 것이다."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 왜냐하면 뒤로 간 뒤 다음에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간 뒤에 뒤로 가기 때문이다."
"영혼은 영원하다. 어느 순간에도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은 영원하지 않다. 지옥에 있다가 동물이 되고, 동물이 되었다 사람이 되고, 사람이 되었다 신이 되기 때문이다."

즉, 자이나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 물질/실체(substance)의 측면에서, 원자가 그러하듯 자아는 영원하다.
  • 그렇지만 그것의 양태(modes)의 측면에서, 원자의 결합이 그러하듯 자아는 영원하지 않다.

흥미롭게도, 붓다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답하기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함경> 어딘가에 있는 일화입니다. 세계와 자아에 대해서 묻자, 붓다는 이는 수행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기에 불필요하다 답할 뿐입니다. 하지만 결국 불교 역시도 붓다 사후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자이나교와 같은 형이상학적/자연학적 설명들과 틀을 도입하게 됩니다.)

3.4.2. 인과의 패러독스에서 변화와 지속에 대해서 설명하기

앞서 본 이러한 형태의 구분은, 인과에 대한 숙고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자이나교는 언제나 인과 과정에 대해서, 지속과 변화를 모두 고려할 때만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논의 역설을 예시로 변화와 지속을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하는데, 이게 적절한 부분인지 모르겠네요. 제논의 역설은 물체의 시공간적 움직임이라는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 아니었던가요? 차라리 테세우스의 배가 적절한 설명이지 않나? @.@)

남아시아 철학자들은, 이러한 인과(변화)라는 사태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명을 제시하였다.
예컨대, "도공이 도자기를 만들었다"에 대해 네 가지 가능한 설명이 있다.

  • 누구는 "도자기"라는 효과(effect)가 이미 그것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현실화되기 전에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 누구는 이를 부정하고, 인과 과정의 적절한 결과로 인해 그러하다 말할 것이다.
  • 누구는 인과 과정 전에는 그것이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 누군가는 그 이전에 그것이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자이나교는 언제나 이 마지막 주장을 고수하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자이나교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도자기는 물질의 관점에서 이미 존재하였다. 진흙으로.
  • 동시에 존재하지 않기도 했다. 특정한 양태로 ; 형태, 기능 등등.

자이나 철학은 이들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 주장하지 않는다. 이는 물질과 양태가 단순히 같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지만 별개의 것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만으로는 굉장히 헷갈리는 설명이네요.] 이 하나이면서 별개의 것이 다면적인 지식의 대상이다.
이는 당대의 여러 학파들의 입장과 상충된다. 예컨대 바이셰쉬카 (힌두교)는 "황토색이 됨" 같은 속성이 "도자기" 같은 물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내속(inherence) 관계로 인해 묶인다고 보았다. 한편 불교와도 상충되는데, 불교는 복잡하지 않은 단순한 것만이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보론 ; 즉, 자이나교는 굉장히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입장을 가진 것처럼 보이네요. 불교는 원자(최소단위)만이 있고 원자가 결합된 것들은 일종의 '순간적인 결합체'라고 보았죠.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변화하고 가변적인 것인데 이에 집착하는 것은 고통이다, 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생각해보면 좀 극단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언제나 합니다.) 데모크리토스나 에피쿠로스 학파처럼요. (@wooya0902 님 지적처럼 이 비교는 조심해야할듯합니다. 불교가 딱히 무엇이 진짜 있는 건지에 대한 질문에는 무관심한 편이였으니깐요. 굳이 따지자면 칸트와 같은 노선이라고 해야할까요?) 반대로 바이셰쉬카로 대변되는 힌두교는 관념적인 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본 듯하네요. (플라톤처럼요.)
자이나교는 두 입장을 모두 벗어나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물 밖에 없으며, 이 사물 안에는 다양한 양태-물질들이 존재한다고 본 듯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자이나교 학자들을 특별히 "리얼리스트"라고 부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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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원자만이 실존하고, 원자가 결합된 것들은 일종의 '순간적인 결합체'라고 보았죠.

이 대목은 아마 불교의 무아와 오온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 같은데 오온을 '원자'와 비교하는 것은 오해를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이해하는 한에서, 초기불교의 오온은 경험의 더미(蘊은 집합, 덩어리의 의미)라는 점에서 물질적 성격을 가진다고 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설사 설일체유부에서 말하는 '법' 개념으로 본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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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선 "원자"(atom)이라는 표현은 물질적/비물질적이라는 구분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라기보단, 어떠한 구성체를 이루는 최소 단위라는 표현을 의도한 바입니다.

어쩌면 뒤에 달려있는 데모크리토스와의 비교가 오독의 여지를 주는 것 같네요.

(2) 그리고 저도 모든 불경을 디테일하게 알지 못해서 문헌학적 근거를 제시하기 어렵지만,

초기 불교라도 오온에 색이 포함된 이상, "물질적 성격이 없다."라고 단언하시는건 조금 과격한 주장이 아닐까요? (특히 이 색 안에 사대 [지수화풍]이 대체로 포함된다는 점에서요.)

(3) 쓰다보니 불교에 대한 제 이해를 적는게 상황을 명확히 하는데 도움이 될 듯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불교를 "원자론"으로 이해하는 편입니다. 이 말은 불교가 물질적인 실체만을 인정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불교는 우리의 경험 세계가 그것들을 구성하는 더는 분해할 수 없는 최소단위(=원자)로 이루어졌다 생각한다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전 불교를 물질적-유물론적으로 보든 관념론-유심론으로 보든 모두 부질 없는 논의라고 생각합니다. 불교가 애당초 구분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 경험 세계를 이루는 "최소단위"이지 이 최소단위가 물질적인지 관념적인지 독립적인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두 요소 간의 관계인지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본 틀을 토대로, 여러 초기 불교 경전에 흩어져있는 최소단위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시도에서 아비달마 불교가 생겼고, 이 최소단위에 대한 부정이 중관, 최소단위를 모두 "식"으로 환원하려는 시도가 유식이라 이해하는 편입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모래성이고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이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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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불교가 물질적인 실체만을 인정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만달라님이 위와 같이 이해하고 있어서 데모크리토스를 인용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데모크리토스가 말하는 원자가 아니라면 제가 글쓴이의 생각을 오해한 것 같군요.

불교가 애당초 구분하고 싶었던 것은 우리 경험 세계를 이루는 "최소단위"이지

저 역시 위의 설명에 동의합니다.

특히 이 색 안에 사대 [지수화풍]이 대체로 포함된다는 점에서요.

지수화풍은 물질적 성격을 갖고 있죠. 그렇다고 완전히 '물질'이라고만 보기도 힘든 애매한 경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파니샤드만 보더라도 존재(sat)가 물과 불이 되고 마음이 된다는 서술이 보이고(길희성, 인도철학사, 33쪽), 유부전통에서는 지수화풍을 견고성, 습윤성, 온난성, 운동성을 가진 작용같은 걸로 보기도 하니까요(권오민, 아비달마불교, 59쪽). 그래서 저 역시 만달라님과 유사하게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을 적용하기 힘들다는 입장이고, 아예 물질적 성격이 없다고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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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저는 비서양철학에서 물질/정신 구분이 얼마나 적절한지...언제나 의문을 품어왔습니다.

이 생각의 발단은 "기"라는 개념에 있습니다. 서양철학 전공하시는 분들과 수업을 같이 듣고 이야기하다 보면, 기를 추상적인 에너지나 형이상학적인 영혼과 비스무리한 것처럼 이해하시는 듯 했습니다. 동북아 철학 전공자들도 별 차이는 없었고요. 무슨 온라인 게임의 마나를 보듯 다들 이해했으니깐요.

하지만 문헌을 볼수록, 기를 이렇게 보면 죄다 잘못 이해하는거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컨대, 결국 동북아철학에서 만물은 기로 이루어져있고, 이 기가 "고밀도로 압축될 수록" 우리가 일상 경험 세계에서 오감으로 느껴지는 구체적인 사물이 된다는 점에서, 단순한 물질/정신 구분과는 결이 다르다는 생각도 들고.

일상 용례에서 습기/색기/분위기/패기/음기 등,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이성적 반성 혹은 직관을 통해 얻는 형이상학적 대상(이데아라던가 등등)과는 다르게, 오감을 제외한 어떤 방식으로 "느끼는" 대상을 "기"라고 통칭한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2) 그래서 사실 범-철학적 차원에서는 물질/정신 구분보다는 구체적 사물/비 구체적 사물로 구분하는게 더 옳지 않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서양에서는 구체적 사물은 오직 물질이고 그게 아니면 영혼인 셈이지만, 동북아 철학에서는 구체적인 사물이면서도 영혼 같은 것이 아닌 기 같은 카테고리가 존재할 수도 있는 셈이지요.

적어주신 "사대"도 이러한 방향으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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