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5)

조금 늦었습니다..! 지금 급하게 작업하고 있는 게 있어서 당분간 연재가 조금 더딜 것 같네요ㅠ 그래도 완결은 내고 싶으니 꾸준히 올려보겠습니다!


새로운 흐름에서의 의미론은 다시 크게 두 갈래로 나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전의 방법론에 비하면 이들 사이의 방법론적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은 것이긴 했다. 한 갈래는 가능세계 의미론이었는데, 그 기원은 카르납에서 찾을 수 있고 1973년까지 크립키, 루이스, 카플란, 스톨네이커, 그리고 몬태규와 같은 언어 철학자들이 발전시킨 것이었다. “형식 언어로서의 영어”(English as a Formal Language; 1970), “일상 영어에서 양화 표현의 적절한 처리”(The proper treatment of quantification in ordinary English; 1973) 및 몇몇 논문들에서 몬태규는 자연 언어의 많은 부분에서 어떻게 엄밀하게 작동하는 조합적 의미론을 적용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의 작업은 바바라 홀 파티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내포 의미론(intensional semantics)이 언어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른 한 갈래는 콰인의 영향 하에서 전개된 외연 의미론이었다. 콰인의 의미 회의주의의 가르침을 받은 이 갈래의 사람들은 의미적 영역에 직접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서 의미 자체보다는 지시체와 참에 대한 명시적인 이론화를 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조합성 원리를 강조했다. 또 형식적으로는 타르스키의 진리 이론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갈래의 대표적인 지지자는 도널드 데이빗슨이었다. 이 갈래 역시 언어학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러한 영향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자연 언어의 동사와 부사에 관한 데이빗슨 의미론이었는데, 이는 동사와 부사를 포함하는 문장이 암묵적으로 사건에 대한 양화를 하고 있다고 상정하는 이론이었다. 데이빗슨식 의미론을 전개했던 선도적인 언어학자는 제임스 히긴보덤(James Higginbotham)이었다.
내가 언어 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마주한 것은 학부 첫 학기 때였다. 나의 튜터는 존 로크 강연에 가볼 것을 권했고 그 때 존 로크 강연은 미국 철학계의 떠오르는 스타였던 솔 크립키의 강연이었다. 나는 그의 명료함과 형식적이지 않은 엄밀함, 핵심을 찌르는 예시, 상식, 그리고 유머에 크게 감명 받았다. 강연 자체에는 기술적인(technical) 부분이 거의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누구든 그 강연과 무관하게 해당 주제에 대해 그가 얼마나 기술적으로 통달해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크립키는 이상 언어 철학의 탁월함과 일상 언어 철학의 탁월함을 조화롭게 결합시켰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때는 그가 말하는 내용에 관한 언어 철학적 배경이 조야했고 강연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그 뒤에 이어진 토론의 내용을 완전히 따라갈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어쨌든 크립키는 내가 생각하는 철학하는 방법에 대한 모범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다.
그 당시에 크립키의 작업이 젊은 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옥스퍼드에서 널리 논의되고 있긴 했지만, 새로운 흐름이 벌여놓은 판에서 주류는 내포적 의미론보다는 외연적 의미론이었다. 데이빗슨은 1970년에 존 로크 강연의 연사로 섰다. 가장 존경받는 옥스퍼드의 신세대 이론 철학자인 개릿 에반스(Gareth Evans)와 존 맥도웰(John McDowell)은 그들이 연 합동 강의에서 청중들 앞에서 데이빗슨과 프레게를 결합하는 것을 보였다. 그건 “데이빗슨 붐”(Davidsonic Boom)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비록 사람들은 “문장 ‘눈은 희다’가 영어에서 참이면 오직 그러한 경우에 눈은 희다”같은 타르스키 주문(Tarskian mantra)을 조용하고 느릿한 목소리로 말하는 경향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즉, 만일 당신이 X의 철학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면, X가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X에 관해 말하는 언어의 진리 이론에 관한 글을 쓰려던 참인 것이다. 나는 데이빗슨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진절머리 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건강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언어 철학적 작업을 위해 사변적이고 논쟁적이긴 외연주의 의미론을 출발점으로 고르는 것,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이끌고 가는 것은 괜찮지만, 그러한 기획은 출발점으로 삼은 이론들의 가정들을 테스트하는 등 과학적 정신에 입각해 수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대체로 낮은 레벨에 있는 자들(lower in the hierarchy)은 그러한 가정을 신비스럽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도그마로 간주했다. 데이빗슨의 압축적이고 다소 얼버무리는 스타일에 자극받은 태도를 가지고 말이다. 데이빗슨의 의미론이 자연 언어를 구성하는 얼핏 보기에 비외연적인 요소들, 예컨대 믿음이나 욕구의 귀속, 가능성과 필연성 등에 대해 조합적 의미론을 제시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대안에 대한 논의는 게임의 규칙에 대한 개방성이나 명료함 없이 해당 주제에 침묵했다. 기술적인 이해가 미미한 일부 철학자들은 불분명한 기술적 제약을 도입함으로써 경쟁 가설을 배제하려고 했다. 예컨대 대입적 양화(substitutional quantification)를 금지한다든지 유한한 공리화가능성(finite axiomatizability)이라는 조건을 도입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대입적 양화를 거부하는 데이빗슨주의자들에 대해 크립키가 한 비판(“Is There a Problem About Substitutional Quantification?”)은 맹렬하게 비난받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당시에 크립키가(역자-원문에는 “he”인데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잘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불만을 표했던 그런 기류가 있었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내포적 의미론은 좀 더 개방적이고 과학적 정신을 가지고 데이빗슨주의자들이 거부한 어둠의 자식(creatures of darkness)인 가능세계를 다루는 것처럼 보였다.
데이빗슨주의자들은 언어 철학이 형이상학과 독립적인 것이 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데이빗슨이 1977년에 쓴 글은(“The Method of Truth in Metaphysics”) 명시적으로 사건에 대한 그의 존재론적 관점의 동기가 되었는데 이는 콰인의 영향을 받은 해석에서의 자비의 원리에 따른 것이었고 부사구에 대한 의미론을 통해 드러났다. 이는 루이스가 가능세계 존재론을 주장하게 된 원래의 동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루이스 역시 자비의 원리를 따랐고 양상 연산자에 대한 의미론을 통해 이를 구체화시켰다. 하지만 데이빗슨은 선험론적 논증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마치 스트로슨을 연상케 하는 형이상학을 제시했다. 선험론적 논증이 종종 그렇듯이, 그의 논증 또한 은폐된 검증주의적 가정들(verificationionist assumptions)에 의존한다는 것이 드러난다.(이에 관해서는 아래에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에 관한 부분을 보라) 더 최근의 형이상학은 선험론적 논증에 훨씬 덜 의존한다.
새로운 흐름 안에서의 외연적 의미론과 내포적 의미론이 공유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는 진리 조건성(truth-conditionality)이다. 두 의미론 모두 서술문의 의미를 그것이 참이 되는 조건이라는 의미로 다루었다. 이와 달리 새로운 의미론에 가담했던 옥스퍼드의 원로 철학자인 마이클 더밋(Michael Dummett)은 그런 진리 조건적 의미론에 반대하고 주장 조건적 의미론(assertibility-conditional semantics)을 지지했다. 이는 서술문의 의미를 참이 되는 조건이 아니라 그것의 주장가능한 혹은 검증가능한 조건으로 보았다. 주장 조건 의미론은 아렌트 하이팅(Arendt Heyting), 대그 프라윗츠(Dag Prawitz) 및 직관주의자들이 개발한 수리 논리의 언어에 대한 증명 조건적 의미론(proof-theoretic semantics)의 영향을 받았다. 증명 조건적 의미론은 수학적 언어로 쓰인 문장의 의미를 그 문장의 증명 조건과 같은 것으로 본다. 더밋의 기획은 수학적 증명을 검증(verification)의 한 종류로 간주함으로써 증명 조건적 의미론을 언어 전체로 일반화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문장의 의미를 그것의 검증 방법으로 보았던 논리실증주의의 후예처럼 보일 수 있지만 더밋은 그런 식으로 제시한 것은 아니었다.
논리실증주의자들과 달리 더밋은 조합성 원리를 받아들였을 때 검증 중심의 의미론이 고전적 논리학에 던지는 체제전복적인 위협을 가한다는 것을 보았다. 예를 들어, “A 또는 B” 꼴의 선언 문장에 대한 주장(검증) 조건적 의미론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즉, “A 또는 B”가 검증된다면 오직 그러한 경우에 “A”가 검증되거나 “B”가 검증된다. 그런데 이는 즉시 “A 또는 ~A”라는 고전적인 배중률과 충돌한다. 왜냐하면 “B”를 “~A”로 대체했을 때, “A 또는 ~A”가 검증된다면 오직 그러한 경우에 “A”가 검증되거나 “~A”가 검증된다고 해야 하는데, 우리는 하나의 문장과 그것의 부정 모두 검증할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폴레옹은 죽을 때 짝수 개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문장은 우리가 검증할 수 없다. 또한 “나폴레옹은 죽을 때 홀수 개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라는 문장 또한 검증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나폴레옹은 죽을 때 홀수 개 혹은 짝수 개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검증할 수 없다.
이런 방식으로 더밋은 언어 철학이 어떻게 실재가 이러저러한지 알 수 있는 우리의 능력과 독립적일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실재론적 형이상학이 보는 실재 관념을 의문에 붙이게 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여기서 언어 철학의 역할은 단지 하나의 형이상학적 이론을 믿을만한 이유를 주는 증거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보다 그는 대안적인 의미 이론을 대안적인 형이상학적 이론에 현금 가치를 부여해주는 것이라 여겼다. 방법론적으로 보자면 그는 형이상학적 이론들 간의 헛된 논쟁을 각각에 대응되는 의미 이론들에 관한 논쟁으로 대체하기를 제안했고 이것이 관련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하게 과학적인 방법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형이상학적 논쟁은 무의미(senseless)한 것도 아니었고 보이는 그대로의 실질적인 논쟁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논쟁은 암묵적으로 언어 철학적 논쟁이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에 대해 더밋이 이해하는 바를 스트로슨의 이해와 견주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 체계적인 탐구를 통해 답하고자 그 질문들을 정합적인 사고의 구조와 한계에 관한 질문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밋은 스트로슨보다 더 교정적 형이상학에 열린 태도를 취했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배중률을 받아들이는 것을 포함해서)이 근본적으로 비정합적일 수 있다는 위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반면 스트로슨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밋은 또한 현대 논리학이 그 이전의 논리학에 비해 결정적으로 진일보했다고 여기는 점에서 스트로슨과 달랐다. 또한 그는 언어 철학에서 사용하는 형식적 방법론과 모델 언어를 제시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그는 그런 것들에 능숙했다. 바로 그 점에서 또한 그는 새로운 흐름에 속한 언어 철학자였다.
더밋은 이러한 자신의 기획을 1959년의 초기 저작에서 내놓았다. 크립키가 존 로크 강연을 했던 그 해, 더밋은 그의 첫 역작인 『프레게: 언어 철학』(Frege: Philosophy of Language, 1973)을 출간했다. 더밋은 이 저작에서 자기 자신의 관점을 발전시키기 위해 프레게를 창의적으로 전유했다. 나의 학생시절 옥스퍼드 철학계의 가장 중심적인 논쟁은 데이빗슨주의로 대표되는 실재론과 진리 조건적 의미론과 더밋으로 대표되는 반실재론과 주장 조건 의미론이었다. 나는 데이빗슨주의에는 동조하지 않았지만 실재론에는 강력하게 동조했다. 더밋은 1979년부터 1980년까지 나의 박사과정 마지막 해 지도교수였는데, 그 때는 그가 위컴 논리학 교수직(1979-92)을 막 시작했을 때였고 그 자리를 맡은 사람들 중에는 처음으로 현대 논리학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 논문이 드러내는 귀에 거슬릴 법한 실재론적 입장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관용적이었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나의 실재론적 입장이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해온 일생의 작업이 헛된 것이라고 전제하고 시작점부터 다른 주제를 좇았던 것임에도 말이다. 나는 이 시기에 있었던 몇 가지 기억들을 지울 수가 없다.
내가 옥스퍼드에 있었던 다른 철학자들에게 과학적 이론에 적용되는 진리로의 근사(approximation to the truth)라는 아이디어에 관해 작업하고 있다고 말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항상 “그게 모호성(vagueness)이랑 어떤 관계가 있는 주제냐?”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모호성은 그 당시 옥스퍼드 철학계의 큰 이슈 중에 하나였다. 왜냐하면 모호성은 실재론, 진리 조건적 의미론, 그리고 다른 전통적인 이론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반응들이 항상 짜증스러웠다. 왜냐하면 내 생각에 그런 주제는 언어 철학의 근시안적인 집착을 배반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역자-아마도 언어 철학 자체에 대한 못마땅한 생각이 좀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내 논문 주제가 모호성이랑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대답하며, 내 논문 주제는 정밀하지만 틀린 두 개의 과학적 이론이 있을 때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보다 더 진리에 근접한 것일 수도 있다는 주장에 관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또한 그러면서 내가 데이빗슨보다 포퍼가 더 흥미롭다고 말할 때 사람들이 충격 받는 것을 즐기기도 했다) 좁게 보면 내가 옳았지만, 내 관심사가 바뀌어온 과정을 돌이켜보면 나와 대화를 했던 사람들이 그 점에 관해서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실은 내가 나중에 모호성에 관한 작업을 한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모호성이라는 것이 반실재론적인 접근을 요하는 현상의 전형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나는 반실재론 진영의 가장 튼튼한 요새일 것이었던 그곳을 공격하고 싶었다.
또 다른 기억은 더밋의 지도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내가 내 논문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했던 논증이자 그가 생각하기엔 최악이라고 생각했던 논증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었다. (나중에 그 논증은 나의 박사학위 연구에서 비롯된 저작의 핵심이 되었다.) 잠시 후에 더밋은 “너는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이 철학에서 적합한 논증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우리 사이의 차이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철학에서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을 사용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에 대해 약간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그의 관점은 대략 이랬다. 깊은 철학적 문제는 결국 잠정적인 설명을 제시하는 여러 이론들 중 어떤 이론이 의미 있는(meaningful) 이론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런 문제는 우리가 잠정적 설명의 가치를 평가하기 이전에 해결되어야 하는데, 이 문제가 일단 해결되고 나면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과 철학에서의 가추법적(abductive) 방법을 선호한다. 사실 더밋이 언어 철학에서 추구했던 체계적이고 일반적인 이론이 이런 방법 외에 어떤 방식을 통해 수립될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는 과학에서 그러하듯이 철학적 문제가 장기적으로는 결정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 낙관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 이론의 유의미성(meaningfulness)을 귀추법보다 더 결정적인 논증을 통해 수립하고자 한다면 바로 그 논증의 유의미성을 귀추법보다 더 결정적인 논증을 통해 먼저 수립해야 되지 않겠는가? 여기서 무한퇴행이 일어난다. 더밋이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을 싫어했던 것이 어떤 점에 있어서는, 그의 주장조건 의미론이 왜 수학적 언어가 아닌 언어의 사소하지 않은 부분(역자-예컨대 모호한 표현?)에 관한 적절한 의미론적 모델을 개발하는 핵심적인 부분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기획 단계에만 머물렀는지에 대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 설령 그런 모델이 잘 작동하더라도 기껏해야 그것은 그의 기획을 지지해주는 일종의 귀추적 논증을 제시해줄 뿐이었던 반면 그는 더 결정적인 것을 원했다. 결국에는 그런 한계가 주요한 원인이 되어서 그의 기획은 실패했다. 특히 그의 언어 철학적 기획이 논리학과 형이상학에 관해 함축하는 급진적으로 교정적이고 그럴듯하지 않은 결론들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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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처럼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제 생각을 몇 개만 덧붙이자면

"proof-theoretic semantics"

은 '증명(이)론적 의미론'으로 번역하는게 맞습니다. 더밋, 프라위츠의 기획은 논리학에서의 증명(이)론(proof theory)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proof-theoretic semantics'에 대비되는 개념이 '모형(이)론적 의미론(model-theoretic semantics)'이라는 점도 이를 방증합니다.

"I thought it betrayed a myopic obsession with the philosophy of language."

이 문장은

"내 생각에 그런 반응은 언어철학에 대한 근시안적 집착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정도로 번역하는게 적절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아마도 언어 철학 자체에 대한 못마땅한 생각이 좀 깔려 있는 것 같습니다"

라는 진단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윌리엄슨 본인이 훗날 언어철학적 주제에 관해서도 연구를 한 것을 고려하면 언어철학 자체보다는

"언어 철학이 형이상학과 독립적인 것이 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는 데이빗슨주의자들의 시각이나

"형이상학적 논쟁은 [...] 암묵적으로 언어 철학적 논쟁이었기 때문이다"

고 보는 더밋 등의 시각에 대한 못마땅함을 드러내는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의 주장조건 의미론이 왜 수학적 언어가 아닌 언어의 사소하지 않은 부분(역자-예컨대 모호한 표현?)에 관한 적절한 의미론적 모델을 개발하는 핵심적인 부분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기획 단계에만 머물렀는지"

사실 (현재의 관점에서 돌아보는 것이기에 시대착오적이긴 하지만) 여러 비고전 논리에 대한 연구 현황을 볼 때 '모호성' 자체는 주장조건 혹은 증명론적 의미론을 통해서도 원리적으로 다루기 까다로운 주제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오히려 지표사, 부사 등 수많은 자연언어의 특성들을 주장조건적 전통에서는 여전히 잘 설명하지 못하고 있죠 (물론 브랜덤 같은 비슷한 전통의 학자가 여전히 애를 쓰는 것 같기도 합니다만 ...).

반면에 진리조건적/모형론적 의미론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데이빗슨주의식 의미론조차도 주장조건적 전통에 비해서는 더 나은 이론을 제공하고 있고요. 모형론에 대한 강조 및 이론의 체계성을 강조하는 윌리엄슨의 시각에서 이처럼 그 적용 범위가 협소했던 주장조건적 전통에 대해 평가가 박한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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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네요? 저걸 왜 "증명조건적 의미론"으로 번역을 했지 ㅋㅋㅋ 아마 앞에서 "assertability condition"에 대해 "주장가능성 조건"으로 할 것이냐 "주장조건"으로 할 것이냐 고민하다가 관성적으로 옮긴 것 같습니다. 증명론적 의미론 / 모형론적 의미론이 공식적인 번역어죠!

  2. "betray"라는 말의 뉘앙스를 잘 몰랐는데 주요의미가 아니라 "무심코 노출하다"같은 의미가 있었네요. 그렇게 읽으니 아주 분명하게 읽힙니다! 덕분에 뉘앙스를 잘 캐치해가네요 ㅎㅎ

  3. "non-trivial fragment"에 붙은 역자주도 제 생각엔 저 문장 전체를 번역하다가 꼬인 것 같네요. 처음에는 저게 모호성을 언급하는 건 줄 알았는데 전부 옮겨보니 오히려 자연 언어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내놓는 단계로 넘어가지 못했다는 말로 이해를 해놓고 이전에 역주를 고치지 않았네요 ㅠㅠ 제가 따로 저장해두고 있는 파일에는 지적해주신 부분들 수정해놔야겠습니다 ㅎㅎ 읽어주시고 번역 피드백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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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너무 재밌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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