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10)(완)

@YOUN

각론에 충실하지 않은 철학사를 두고 불평했던 입장에서 민망합니다만, 아마 윌리엄슨의 변호자는 다음과 같은 내러티브를 제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로, 윌리엄슨은 주류 분석철학이 칸트-헤겔-듀이-비트겐슈타인- ... 등의 흐름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이를 직면하여 극복해냈다고 말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러셀과 무어는 헤겔을 계승한 영국 관념론을 극복해냈고, 어떤 의미에선 신칸트주의를 계승했다는 점이 점점 분명해지는 논리 실증주의는 이미 극복되었고, 듀이를 위시한 20세기 전반 '미국 실용주의'는 그 자체로 콰인을 위시한 현대 미국철학으로 승화되었다고요.

둘째로, 아마 넓은 의미에서의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경쟁자들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연주의'적 관점의 한 가지 양상은 "불평"만 내놓는 입장보다는 어찌되었건 현상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제공하는 입장을 선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수십년째 "구상 단계(programmatic stage)에만 머물러있는" 브랜덤 입장에 대한 본 글에서의 비판이 그렇고, "만트라를 조용하고 느릿한 목소리로 말하는" 데이빗슨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이 또 그렇습니다. 이에 반해 어쨌든 설명적인 이론을 제시해주는 것처럼 보이는게 가능세계 의미론 이래 '주류 분석철학'이 좋아하는 입장이구요. 이는 더밋이 윌리엄슨한테 말했다듯

너는 최선의 설명으로서의 추론이 철학에서 적합한 논증 방식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우리 사이의 차이인 것 같다

라는 점에서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사실 전혀 검증되지 않은 인상비평일 수도 있는데 ... 윌리엄슨이 말하는 '미래지향성'은 과거 철학사를 참조하는 것과는 배치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실재론적 형이상학의 부활"부터가 단적으로 그렇죠. 아마 이견은 철학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받은 인상을 아주 거칠게 표현하자면,

현대철학의 문제는 옛 대가가 남겨두었던 통찰을 참고함으로써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라는 식의 접근은 윌리엄슨의 '미래지향성'과 충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례). 다만

현대철학의 문제는 지금껏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옛 대가의 진의를 해독하면 해소될 수 있다.

라는 접근을 접할 경우, 많은 현대 분석철학자들은

아이고, 뭐 어떻게 될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저러는거 보면 지금 영 처지가 궁색해졌구만

이라는 인상을 받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본 글에서 호명된 몇몇 인물들에 대한 윌리엄슨의 뜨듯미지근한 시선은 아마 이런 경향성과 깊이 연관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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