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7)

@Racoon 님께서 연재하시던 티모시 윌리엄슨의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시리즈의 다음 부분을 짧게 번역해봤습니다 (전편 링크). @Racoon 님께서 내키지 않아하신다면 언제든 삭제하겠으니 편히 말씀해주세요~!


그 당시 비트겐슈타인의 영향력은 주로 후기 저작을 통해 발휘됐다.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그 저작에서 나타난 철학 양식을 따라한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대개는 하여튼 체계적인 방식으로 이론을 세우는데 몰두했다. 그 금자탑은 바로 사적 언어 논증이었다. 그 덕분에 비트겐슈타인이 심리철학과 언어철학에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 지배력에 맞서는 인지심리학의 위협은 점점 커져갔지만, 그에 대해 1970년대 영국 철학계는 놀라울만큼 무심했다. 그렇지만 내홍도 없지 않았다. 대체 그 사적 언어 논증이란 것은 정확히 어떻게 돌아간다는 말인가? 비트겐슈타인의 설명은 불가해하기로 악명높았다. 가장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재구성에 따르면, 사적 언어 논증은 검증주의 전제에 의존했다. 바로 그런 까닭에, 특정한 심적 상태를 띤다고 다른 누군가가 독립적으로 확인해주는게 가능하지 않고서는 결코 심적 상태를 띨 수 없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치만 사적 언어 논증이 정말로 검증주의 전제에 의존하다면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많은 이들의 생각이었다. 논증도 없이 검증주의를 그냥 가정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적 언어 논증 편인 사람들은 그런 전제 없이도 논증이 잘 돌아간다고 주장했지만, 그게 어떻게 되는지는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했다 (상기한 데이빗슨의 초월적 논증과도 비슷한 부분이다). 비트겐슈타인의 금자탑은 이처럼 내부의 위협에 처했고, 결과적으로 그 지배력 또한 저물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점에, 예상치도 못했던 예비 구원자가 도래했다. 솔 크립키 말이다. 1976년부터의 강연, 그리고 사적 언어 논증 및 규칙 따르기와 관련된 여러 고려를 다룬 저작을 통해 크립키는 사적 언어 논증에 대한 추측적인 해석을 제안했다. 확실히 검증주의는 아니고, 또한 꼭 설득력이 있을진 몰라도 최소한 강력한 형태로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곧 비트겐슈타인이 뜻했던 바냐는 것이었다.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 사이의 중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역사적 연구의 관점에서 그 얘긴 충분히 그럴 법 하다. 그치만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이 깨닫지 못했던 것 같은 점은 그런 부정적 태도를 취한 시점에서, 자신들이 철학적 주류에서 소외되는 것을 막아줄 마지막 기회 또한 스스로 거부해버렸다는 점이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이 갖는 힘은 다시금 줄어들기 시작했다. 크립키의 논증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쩌다보니 새로운 형이상학이 영향을 뻗칠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크립키의 논증은 회의적 역설의 형태를 띠었고, 크립키 자신의 해법은 상당히 불명료하면서도 과격한 회의적 해법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데이빗 루이스는 객관적으로 자연적인 속성과 비자연적인 속성 간의 고도로 형이상학적인 구분에 의거한 보다 명료하고 보다 우아한 비-회의적 해법을 제안했다. 널리 받아들여진 방안은 크립키보다는 루이스의 해법에 가까웠다.

비트겐슈타인 위상이 저물던 것을 보여준 두 장면을 소개해보겠다. 그 첫 장면은 1994년 한 '화요일 모임'에서 있었다. 이 모임은 1959년에 에이어가 옥스포드로 돌아온 뒤, 오스틴의 토요일 모임에 맞서 조직함으로써 시작된 모임이었다. 그 모임에서 수잔 헐리는 옥스포드의 명망있는 여러 철학자를 포함한 청중들 앞에서 사적 언어 논증에 맞서는 매우 세심한 논증을 제시한 논문을 발표했다. 청중의 반응은 나이에 따라 갈렸다. 대략 50세 이상 되는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논증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을 거라는 가능성을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인들도 딱히 그 논증이 어떻게 돌아가고 뭘 말하려는지 설명은 잘 못했지만 말이다. 50세 이하는 헐리의 반론에 더욱 호의적이었다. 둘째 장면은 내가 2000년에 옥스포드로 복귀한 다음 열었던 철학적 논리학 대학원 수업에서 있었다. 한 학생이 자꾸만 모순은 거짓이 아니라 무의미라는 비트겐슈타인적인 노선을 제안했다. 나는 재차 표준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모순의 부정은 참인 반면에 무의미한 것의 부정은 마찬가지로 무의미하지 참이 아니라는 대답, 조합성 의미론은 모순의 의미 또한 잘 설명하다는 대답 등등 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 학생은 내 대답에 제대로 응답하지 않는, 똑같은 생각을 그냥 살짝쿵 다른 말로 바꾼 반론을 연거푸 제시할 뿐이었다. 결국 난 자포자기해서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비트겐슈타인이 그냥 틀린 걸 수도 있겠지. 그리고 이게 그 첫 사례도 아닐걸세." 모두가 헉하며 숨이 막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후엔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이 가볍게 다뤄졌다고 그런 반응이 나오는걸 난 다시는 접하지 못했다.

물론 옛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 불꽃을 여전히 살려 이어나가고 있다. 1970년대 이후로도 철학의 진보가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몇몇은 여전히 비트겐슈타인의 저작에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40년 동안 그의 영향력은 현격히 줄어들었다. 학술지 인용 비율을 통해 어림짐작할 수 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치만 내가 더 인상적으로 보는 것은 그 '공포 요인(fear factor)'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는 비-비트겐슈타인주의자조차도 비트겐슈타인에 공공연히 맞서는 것을 두려워하고는 했다.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마찬가지로 공포 요인이 사라진 철학자로는 콰인이 있다. 한때는 형식 논리의 무기를 잘 휘두르는 것으로 철학 논쟁에서는 적수가 없었고 실로 두려움을 자아내던게 콰인이었다. 1970년대에는 이미 사정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철학자들은 '동의성' 같은 일상적인 의미론 개념에 호소하는데 주저하고는 했다.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 논변에 걸려들까봐 염려한 탓이었다. 결국 콰인의 행동주의 전제가 추락해감에 따라 그런 두려움 또한 점차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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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원치않을리가요! 제가 교환학생 준비 등으로 한동안 정신이 없었어서 저도 마음의 짐으로 좀 남아 있었는데 덜어 주신 것 같아 좋습니다 ㅎㅎ 이어서 제가 다시 쓴다면 wildbunny님이 번역하신 다음 부분부터 올리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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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번역을 절실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ㅠㅠ 너무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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