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연재글] 우리는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가 (6)

더밋은 1976년 하버드 대학에서 열린 윌리엄 제임스 강의에서 언어 철학과 형이상학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의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힐러리 퍼트넘이 옥스퍼드 대학에서 열린 존 로크 강연을 한 해였다. 퍼트넘의 강연은 곧 책으로 출간되었는데 그 저서에서 제시되는 소위 ‘형이상학적 실재론’이라 불리는 것에 대한 꽤나 유감스러운 논증은 더밋의 영향을 받은 티가 났다.(역주-퍼트넘의 강연 제목은 ‘Meaning and Knowledge’이고 출간된 책의 제목은 『Meaning and Moral Science』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퍼트넘의 저작에서 옥스퍼드의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사람은 반실재론자 더밋에서 실재론자(형이상학적 실재론자는 아니지만) J.L. 오스틴으로 바뀌었다. 더밋의 강의는 『형이상학의 논리적 기초』(The Logical Basis of Metaphysics; 1991)이라는 저작으로 출간되기까지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거물급 철학자의 핵심 저작치고는 상대적으로 파급력은 약했다. 그의 저작이 가진 한 가지 문제점은 이것이었다. 의미론의 기초로서의 증명론에 대한 논의가 비형식적이고, 함축적으로 제시되거나 지엽적이거나 모호한 부분들이 많았다. 그리고 철학적인 내용과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가 한 데 뒤섞이면서 논리학자들이 내용을 추려 내는 데에도,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기에도 지나치고 불필요하게 어려운 논의가 전개되었다. 게다가 의미론을 수학적이지 않은 언어로 일반화하는 작업은 여전히 잠정적인 기획 단계에 머물러 있었을 뿐 언어학에 적용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밋의 저작에 관한 좀 더 일반적인 문제는, 1991년 즈음 철학적 시대정신은 더밋의 기획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덜 수용적이었다. 그는 데이빗 루이스의 저작과 같은 형이상학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겨루지 않았다. 새로운 형이상학적 이론들은 그림처럼 위장된 의미 이론에 대한 관점이라고 해석될만한 뚜렷한 여지가 없었다. 또한 신세대 형이상학자들이 그러길 바라지도 않았다. 형이상학은 자신만만하게 자라났고 이제 다른 어떤 것으로서 자신을 드러내야 할 필요도 없다고 느꼈다. 사족으로, 나의 책인 『형이상학으로서의 양상 논리』(Modal Logic as Metaphysics)는 제목이 좀 그렇긴 하지만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관계에 대한 더밋식의 이해로 돌아가려는 것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더밋의 저서 제목에서의 ‘논리학’은 ‘논리 상항들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반성’(philosphical reflection on the meaning of the logical constants) 같은 것을 의미한 반면 나의 제목에서 ‘논리학’은 ‘논리 상항들을 통해 전개된 세계에 대한 일반화’(generalizing about the world in terms just of the logical constants)를 의미한다. 더밋에게 논리학은 메타언어적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1990년대에 들어 더밋의 난해한 논증 때문에 자신의 입장이 도전받는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더밋의 논증을 이해하고 있는 경우에도 말이다. 몇 가지 이유들 중에 하나는 더밋이 마음에 관해 논의하면서 여전히 심리철학에서의 행동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동주의 심리학이 무너지고 그 자리를 인지과학이 꿰찬 1960년대 이후 행동주의 심리철학은 젊은 세대 철학자들에 의해 대체로 거부되었다. 더밋이 이러한 접근을 취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를 아는 것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무엇이 알려져 있는지 말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즉 그러한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어떻게 발현(manifest)되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말이다.”여기서 발현은 관찰가능한 행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더밋은 콰인과 견주어질 수 있다. 콰인은 그의 하버드 동료인 스키너의 행동주의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었다. 혹자는 스키너의 『언어 행동』(Linguistic Behavior; 1959)에 대한 촘스키의 파괴적인 서평이 출간된 이래로 언어에 대한 행동주의적 기획은 이미 철지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새로운 생각이 소화되는 과정은 느릴 수 있다. 1970년대 후반 옥스퍼드에 있었던 젊고 지적인 언어철학자들이 여전히 어린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받는 ‘훈련’(drill)을 통해 모국어를 배운다고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더밋의 경우 그의 행동주의적 경향은 스키너보다는 비트겐슈타인을 읽으면서 얻게 된 것이었고 그에 걸맞게 다소 복잡 미묘하고 콰인보다는 덜 제거주의적이었다. 어쨌건 그 차이가 과장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더밋의 말년에 있었던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옥스퍼드의 젊은 철학자들이 더밋이 의미한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었고 더밋은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러 가지 제안이 나왔지만 다 거부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 제안들이 더밋을 ‘조야하고 구식인 행동주의자’(crude old-fashioned behaviorism)로 만드는 셈이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어떤 사람이 더밋에게 “그래서 선생님 입장은 뭡니까?”라고 물었다. 더밋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가 자네들이 방금 말한 ‘조야하고 구식인 행동주의자’라고 생각하네.”
더밋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비트겐슈타인이 심리철학에 기여한 것 중 핵심적인 것은 사적 언어 논증이라고 여겼다. 사적 언어 논증의 해석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지만 그 논증이 마음 상태를 타인에게 귀속시키기 위해서는 마음 상태가 (어떤 의미에서든) 관찰 가능한 기준을 포함하고 있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과 관련해 무언가 아주 깊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널리 받아들여졌다. 이런 추정적인 통찰은 언어철학 전반에 파급효과를 일으켰다. 마음 상태를 귀속시키는 진술의 의미론과 관련해서 뿐만 아니라 화행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작용하는 화자와 청자의 마음 상태의 본성과 관련해서도 말이다. 더밋이 의미 이론에서 진리조건보다 주장가능성 조건을 더 선호하는 것은 주장가능성 조건과 관찰 가능한 언어의 사용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에 기인한다. 실재론적 진리조건은 이러한 밀접한 관련을 갖지 않는데, 그 이유는 언어의 사용자들이 자신이 표현하는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전혀 알 수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밋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영향을 받은 사용(use)의 측면과 프레게에서 영향을 받은 체계적이고 조합적인 의미 이론을 결합시켰다. 분석철학에서의 두 전통, 즉 일상 언어철학과 이상 언어철학이 가지고 있던 요소들을 통일시킨다는 점에서 더밋은 새로운 흐름의 젊은 언어철학자들과 닮아있었다. 그가 합치고자 했던 요소들이 그들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 지점에서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시기에 비트겐슈타인이 영국 철학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좀 더 일반적으로 이야기해둘 필요가 있겠다. 종종 언급되는 얘기지만, 북미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의 영향력은 유럽에서의 영향력보다 결코 크지 않았다. 그렇게 된 한 가지 이유는 콰인을 비롯한 철학자들이 이끌었던 자연주의 혹은 과학주의가 북미를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더밋의 경우, 그가 1950년에 옥스퍼드의 학생이었을 때 비트겐슈타인 역시 옥스퍼드에 있었으며 엘리자벳 앤스컴(Elizabeth Anscombe)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훗날 역사가들은 더밋이 비트겐슈타인에게 면대면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을지 궁금해 했다. 그러니 여기서 더밋이 스스로 얘기하기를 좋아했던 비트겐슈타인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게 꽤 괜찮을 것 같다. 더밋은 앤스컴의 집으로 일대일 수업을 받으러 가고 있었다. 앤스컴은 문을 잠그지 않은 채 두었고 늘상 그렇듯이 더밋은 집으로 들어가 앉아서 앤스컴이 그를 부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어떤 나이든 남자가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치고 계단을 내려오더니 “우유 어딨냐?”라고 물었다. 더밋은 “나한테 묻지 마쇼”라고 답했다. 그게 비트겐슈타인과 더밋이 나눈 대화의 전부였다. 사실 중요했던 건 그보다 앤스컴의 중재자 역할이었다. 앤스컴은 1970년에 케임브리지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옥스퍼드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영향력을 가장 강력하게 전파하던 사람이었다. 물론 그녀 자신도 언제나 자립심 강한 철학자였지만 말이다. 라일, 오스틴, 그라이스 같은 다른 옥스퍼드의 일상 언어철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옥스퍼드 안에서 비트겐슈타인 열혈 추종자들의 수가 결코 많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향력은 1970년대에 내가 학생이던 시절까지도 광범위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대학원생들 중에는 불씨의 수호자들이었던 고든 베이커(Gordon Baker)와 피터 해커(Peter Hacker)를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나중에 그들은 프레게의 철학이 갖는 가치와 관련해서 더밋과 지저분한 논쟁에 휘말렸다. 그들이 프레게를 폄하하는 저서를 출간하자 더밋은 즉시 그 저서를 맹렬히 비난하는 대학원 강의를 개설했다. 그 시절에 크든 작든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작업을 했던 옥스퍼드 철학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아주 쉽다. 이들을 단순히 비트겐슈타인주의자로 분류하는 것은 무신경한 것일 테지만 말이다. 더밋, 스트로슨, 필리파 풋(Philippa Foot), 아이리스 머독(Iris Murdoch), 데이빗 피어스(David Pears), 앤서니 캐니(Anthony Kenny), 젊은 세대에서는 존 맥도웰(John McDowell)과 크리스핀 라이트(Crispin Wright) 등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덜 분명한 것은 비트겐슈타인을 거의 언급하지 않았던 사람들조차도 그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조심스러웠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거의 자동적으로 그건 비트겐슈타인을 얕게 읽어서 생긴 오해라는 비판을 초래할 것임을 알았다. 잠자는 개가 누워 있게끔 그냥 조용히 지나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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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이거 너무 웃프네요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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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들끼리 더밋 본인 옆에서 토론하면서 "에이 설마 더밋 선생님이 그런 허접하고 낡아빠진 생각을 했겠어?" 하는 식으로 말했을 걸 생각하니 아찔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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