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이 끝났습니다. 중간에 약간 글이 매끄럽게 전개되지 않는 부분도 좀 있는 것 같네요. 비유적인 표현은 최대한 풀어서 써보려고 했는데 저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은 그냥 직역으로 남겨뒀습니다.
루이스의 관점이 일상적 사고의 변하지 않는 중심부와 충돌한다는 스트로슨의 말이 맞는다고 해보면 어떨까? 그렇다면 루이스의 관점은 루이스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의견들의 총체는 일상적 사고의 변하지 않는 중심부를 또한 포함하고 있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이론적 성찰 하에서 안정적인 의견의 총체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구체적인 주제에 대한 철학적 논쟁에서 누가 맞고 누가 틀렸느냐에 대한 질문과 일반적인 방법론적 입장에 대한 질문을 임상적으로 구분해서 물을 수는 없다.
우리는 스트로슨과 루이스를 크립키와 함께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지적인 선택지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감각을 조금 더 세심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970년대 크립키와 루이스는 종종 “가능세계 혁명”의 기수들로 묶이곤 했다. 크립키의 본질주의와 양화 양상 논리에 대한 방어는 콰인적 전통에 비추어보았을 때 급진적인 것이었다. 크립키의 생각이 꽤나 일상적인 사고방식을 세련되게 만든 것이고 따라서 상식에 비추어보았을 때 그다지 급진적이진 않다는 것이 이해받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물론 콰인에 의해 알려진 본질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연결이 실마리이긴 했다. 그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제나 상식적 철학의 정초자라고 불릴만한 강한 권리(claim)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트로슨은 위대한 기술적 형이상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를 거론한다. 『명명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 에서 크립키는 자신의 주장을 상식적인 예들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경향을 보이고 명시적으로 루이스의 양상 실재론을 거부한다. 그는 가능세계를 가능한 사태(possible state of affairs)로 보는 조금 더 축소적인 관점을 선호한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형이상학이 스트로슨이 쓰는 의미에서 교정적 형이상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이 가진 이러한 측면은 “가능세계 의미론”이라는 수학적 장치에 근거한 양화 양상 논리에서의 기술적인 성과에 의해 잘 드러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세계 의미론이라는 게 그 자체로는 다른 수학적 장치들보다 더 형이상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크립키의 형이상학이 처음에는 실제보다 더 교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의 방법론은 실제로 그런 것보다 더 언어적인 것으로 보인다.(역자-약간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스트로슨이 언어적 방법론과 기술적 형이상학을 같이 가져갔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이러한 대조가 약간 덜 어색하게 들릴 것이다) 그는 『명명과 필연』과 『지시와 존재』(Reference and Existence; 1973년 존 로크 강연을 기반으로 저술됨)라는 두 책의 제목에서 의미론적 용어와 형이상학적 용어를 얽어맸다. 물론 형이상학적인 용어를 인식적, 의미론적 용어와 구별하는 데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크립키였다. 그는 잘 알려진 선험적이고 우연적으로 참인 명제와 후험적이고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의 예를 통해 그 당시에 유명했던 “모든 필연성은 언어적 필연성이다”(All necessity is verbal necessity)라는 흄의 슬로건을 위기에 빠뜨렸다. 그렇긴 해도 크립키가 양상 언어에 대한 그의 의미론적 분석, 특히 이름과 고정 지시어(이들의 지시는 다른 가능세계를 고려하는 중에도 고정된다)에 대한 그의 통찰로부터 개체나 종(kind)의 구체적인 본질적 속성에 대한 명백한 형이상학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1970년대에 널리 그리고 매우 영향력 있는 인상을 주었다. 네이선 새먼(Nathan Salmon)은 이런 인상을 깨기 위해 『지시와 본질』(Reference and Essence; 전북대 박준호 교수님이 번역한 국역본이 있음)이라는 상세한 저술을 출간했다. 이 제목에서의 “와”는 의미론적 용어와 형이상학적 용어를 이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리시키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다. 표지에는 토끼 한 마리가 모자에서 빠져나와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새먼은 크립키가 자신의 형이상학적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형이상학적 전제에 의존하고 있다는 논변을 제시했다(크립키의 반박은 없었다). 이것이 크립키의 주장을 단순히 문제를 구걸하는(question-begging) 것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여전히 전제들의 그럴듯함이 결론의 그럴듯함보다 즉각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새먼의 논점은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의 저작은 언어 철학과 분리된 것으로서 형이상학을 이해하는 관점이 널리 퍼지게 되는 데에 기여했다.
크립키의 형이상학이 그의 의미론으로부터 도출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실수이듯, 형이상학과 의미론이 단순히 서로 직교한다(orthogonal to each other)고 여기는 것도 잘못일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된 형이상학적 논증을 타당한 것으로 간주하게끔 만들고 그로 인해 정합적인 형이상학적 관점이 비일관적이거나 혼란스러운 것으로서 잘못 간주되어 무시되는 식으로 의미론에서의 잘못된 이해(misconception)가 종종 형이상학에서의 잘못된 이해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양화 양상 논리에 대한 콰인의 초기 비판이 그 예다. 본질주의라는 형이상학적 논제를 방어하는 방식을 알기 위해서는 양상 언어의 의미론에 직접 다가가는 것이 가장 핵심적이다. 그래서 고정 지시어에 대한 크립키의 의미론적 이론은 어쨌든 그의 본질주의 형이상학과 관련이 있긴 하지만 그 역할은 본질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제시된 적극적인 역할이 아니라 본질주의에 반대하는 논증을 막아내기 위한 소극적 역할이었다.
소위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에 대해서는 조금 더 일반적인 교훈이 있다. 이 문구는 최근 몇십 년 간의 분석철학의 주류에 대한 기술로서는 갈수록 적절치 않아지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분석철학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언어적인 문제로, 혹은 다른 학문 영역에서 물어지는 질문들과 다른 것으로 만들어주는 개념적인 문제로 여기는 것을 관두고 있긴 하지만, 언어적 전회의 흔적이 쉽게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언어적 전회는 방법론적 세련화 작업에 있어서 풍부한 유산을 남겼기 때문이다. 언어적이지 않은 문제에 대한 논증의 건전성을 검사할 때 분석철학자들은 보통 의미론과 화용론의 작업 모두에 의존한다. 양화 양상 논리에 대한 크립키의 작업은 의미론과 관련된 좋은 예이다.
화용론에 관해서 보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스트로슨의 스승이었던 폴 그라이스의 대화 함축(conversational implicature)에 대한 작업이다. 만일 당신이 나의 강의가 끝난 뒤에 “윌리엄슨은 오늘 오후에 말짱한 정신(sober)이었어”라고 평한다면 당신은 내가 종종 오후에 술을 마셨다는 것을 함축(imply; 논리적 의미가 아님)하는 셈이다. 내가 술을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당신의 말이 참이긴 하다는 점에서, 그 함축된 바가 당신이 말한 것이 참이기 위해 만족시켜야 할 선제 조건이 아님에도 말이다. 그라이스는 이러한 효과들을 분석하기 위해 강력한 이론적 장치들을 발전시켰다. 그라이스의 이러한 작업은 옥스퍼드 일상 언어 철학 학파 안에서 자라난 것이긴 했지만 일상 언어 철학의 방법론을 약화시키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상 언어 철학은 다양한 대화 맥락에서 “우리가 무엇이라 말하는가”(what we would say)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데 어떤 발화를 대화적으로 부적절하게(conversationally inappropriate) 만드는 다양한 이유들을 분석함으로써 그라이스는 일상 언어에 관한 우리의 자료들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들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대화에 대한 그의 이론은 단지 일상 언어 철학의 내파(implosion)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라이스의 작업은 언어학자들에 의해 널리 인용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작업이 현대 화용론의 많은 부분의 시작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현대 분석철학에서 여전히 소극적인 역할로써 그 영향력을 이어가고 있다.
분석철학에서의 인식론은 언어 철학 밖에서 그라이스의 화용론이 어떻게 철학적으로 적용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요즘 인식론을 연구하는 분석철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 주제를 지식(혹은 정당화된 믿음) 자체로 보지 그에 대응되는 단어나 개념으로 보지 않는다. 지식 혹은 정당화된 믿음에 대해 성찰할 때, 그들은 인식론적으로 도발적인 상황들(suggestive situations)을 다루는데 이 예시들은 종종 일상적인 상황들이기도 하다.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기술할지 결정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제시된 기술이 거짓이거나 혹은 참이지만 거짓인 대화 함축을 갖고 있어서 대화적으로 오도되진(conversationally misleading)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되물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그들은 오염된 데이터를 걸러내기 위해 그라이스의 대화 이론을 사용한다. 그들은 화용론뿐만 아니라 의미론을 활용하기도 한다. 선도적인 논쟁적인 이론들 중에는 맥락주의(contextualism)가 있는데, 이들은 인식적 용어들이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인식적 용어의 지시체가 바뀐다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인식론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의 연구 주제는 지식 그 자체이지, “안다”와 같은 동사(the verb “to know”)나 지식에 대한 개념(concept of knowing)이 아니다. 이 철학자들은 일상 언어가 더 이상 그들의 인식론적 목적을 추구하는 데에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상 언어 철학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또 한편으로 느슨한 의미에서 일상 언어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일상 언어는 그 자신의 근원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일상 언어 철학의 고전적인, 적어도 옥스퍼드식의 선언문은 오스틴(J.L. Austin)의 논문 “변명에 대한 변호”(A Plea for Excuses)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타났던 철학적 방법론에 대한 오스틴의 논의는 존 쿡 윌슨(John Cook Wilson)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었다. 존 쿡 윌슨은 1889년부터 사망하던 1915년까지 옥스퍼드 대학의 위컴 논리학 교수(Wykeham Professor of Logic)였고 옥스퍼드의 실재론적 형이상학 전통과 지식-중심 인식론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었으며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의미에서의 언어적 철학자(linguistic philosopher)는 전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쿡 윌슨이 “현재 우리가 가진 언어가 구분하고 있는 것들은 결코 무시되어도 무방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 충분히 강건하게 살아남은 구분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강조한 오스틴의 말에서 반복된다. 쿡 윌슨의 아이디어와 글은 오스틴이 학생이던 시절의 옥스퍼드 철학계에서는 어렴풋하게 보이는 정도였고 단지 그의 유명한 제자인 프리쳐드(H.A. Prichard)의 영향력을 통해서만 알려진 정도였다. 프리쳐드는 1927년부터 1937년까지 화이트 도덕철학 교수(White's Professor of Moral Philosophy)를 지냈고 오스틴은 학부시절 그의 수업을 들었는데 오스틴이 질문을 너무 많이 하자 프리쳐드는 그를 쫓아내려고도 했었다. 요컨대 많은 현대 분석철학자들은 그들의 주된 연구 주제를 언어적으로 다루지는 않았음에도 미묘한 언어적 측면들에 아주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제 앞으로의 글은 특별한 교훈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 있다면, 어떤 것에 대한 역사를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그것이 주는 교훈을 찾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옥스퍼드에서의 내 경험을 되돌아봄으로써 이 그림에 색을 입히고 또 전환기에 대한 또 하나의 관점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