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현상학과 현대철학』 제100권에 아주 재미 있는 논문이 올라왔네요. 주재형 교수님의 「인간적 지식 너머의 지식?: 메이야수의 사변적 유물론 비판」이라는 글입니다. 2010년 이후로 철학계와 비평계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메이야수의 사변적 유물론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소위 '상관주의'로 분류되는 철학자들에 대한 메이야수의 평가가 정당하지 않을 뿐더러, 메이야수가 제기하는 상관주의의 수행적 모순에 대한 비판은 도리어 메이야수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 논문의 핵심이네요.
특별히, '사변적 연금술로부터 지적 노동으로'라는 논문 마지막 장의 내용은 정말 신랄합니다. 한 마디로, 사변적 유물론이 철학의 지적 책임을 방기하는 '사변적 연금술'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상식과 과학을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철학적 논증의 부담을 너무나 손쉽게 없애버려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죠. 주재형 교수님은 논문 마지막 문단을 이렇게 마무리하시네요.
현대의 실재론들은 극단적인 주관적 구성주의를 비판한다는 명목으로 또 과학을 옹호한다는 명목으로 실재론을 주장하면서, 철학적 논증의 부담을 자명한 상식에 떠넘기는 것은 아닌지 비판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비판적 반성 이후에 우리는 보다 명철하게 커다란 바깥을 향한 맹목적인 열망으로부터 벗어나 무지의 한계 속에서 이 한계를 탐색하며 차츰 넓혀가는 구체적인 경험적 철학의 작업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때 상관주의적 무지는 우리를 실재로부터 가로막는 장벽이 아니라,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앞으로 알려질 수 있는 존재들의 영역, 가능한 지식의 미래 영역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절대자 또는 실재에 대한 사변적 인식의 통로는 없으며, 인간이 당면한 실천적 문제들에 대한 사변적 해결도 없다. 철학자는 지식과 실천이 오직 고통스럽고 불확실한 지적 노동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금 조각들임을 유념해야 한다. (주재형, 「인간적 지식 너머의 지식?: 메이야수의 사변적 유물론 비판」, 『현상학과 현대철학』, 제100권, 2024, 33.)
논문 내용에 아주 많이 동의가 되네요. 저는 이전부터 메이야수, 하먼, 브라이언트의 입장들이 유행을 타고 너무 무비판적으로 '권위'를 얻고 있는 것이 다소 못마땅하였거든요. 물론, 그 입장들에도 몇몇 흥미로운 부분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현상학-해석학 전통에 대해 제기하는 비판은 정말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습니다. 예전에 올빼미에도 이와 관련해서 글을 꽤 많이 썼죠.
국내 연구들 중에서 사변적 실재론이나 신유물론을 본격적으로 비판한 글은 이 논문이 거의 최초가 아닐까 합니다. 그동안 그 입장들을 소개하는 논문은 많았지만, 철학적으로 진지하게 비판하는 국내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었거든요. 38쪽이나 되는 많은 분량이 보여주듯이, 논문에서 주재형 교수님이 작정을 하시고 메이야수와 그 친구들(?)을 비판하시는데, 이 주제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