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체지향 존재론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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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먼 본인은 하이데거 전공자이고, 하먼의 논의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주로 대륙철학 전공자들이지만, 정작 하먼이 고민하는 문제나 글을 쓰는 방식은 '분석적 형이상학'에 훨씬 가깝다고 생각된다. 내가 보기에,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OOO)'이라는 사조는 사실 분석적 형이상학자들이 '기체 이론/다발 이론' 혹은 '이동 지속 이론/확장 지속 이론'이라는 주제로 이미 지난 한 세기동안 논쟁한 내용을 이름만 바꾸어 다시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흥미롭게도, 분석적 형이상학자들이 너무 자주 '철학사 망각'에 빠져 마치 자신들이 해당 논의를 처음부터 전부 새롭게 주장한 것처럼 착각하듯이, 하먼과 하먼의 추종자들도 자신들의 입장이 이미 그 이전 철학자들에 의해 제시되어 수없이 많은 비판을 받은 낡은 이론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2) 하먼은 자신이 비판하는 입장들이 지닌 특징을 '아래로 환원하기(undermining)', '위로 환원하기(overmining)', '이중환원하기(duomining)'라는 용어로 규정한다.

  • 객체를 그보다 더 근본적인 층위에 있는 가장 단순한 요소로 환원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은 ' 아래로 환원하기 '라는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물리학이 상정하는 요소만으로 세계를 설명하고자 하는 물리주의적 형이상학이 아래로 환원하기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은 결합된 조립체에서 그 이전의 구성요소에는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속성이 '창발(emergence)'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비판받는다.

  • 객체를 '관계', '행위', '효과', '지식' 등 그 대상이 발생시킨 결과물로 환원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은 ' 위로 환원하기 '라는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존재가 행위의 관계망에서 성립한다고 주장하는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이나 사물이 우발적 행위들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결합이라고 주장하는 브라이언트의 '새로운 유물론(New Materialism, NM)이 위로 환원하기를 받아들이고 있는 입장이라고 지목된다. 이러한 입장은 '중요한 변화'와 '중요하지 않은 변화' 사이의 차이 사이를 간과한 나머지 객체가 몇몇 속성의 변화에도 장기간동안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고 비판받는다.

  • 두 환원하기는 대개 하나의 입장에서 결합되어 ' 이중환원하기 '라는 형태로 등장한다. 즉, 객체가 (a) 자신보다 더 근본적인 실재로 환원될 수 있거나 (b) 우리에게 나타나는 허구적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이중환원하기'라는 방법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가령, 객체란 실제로는 불변하는 단일한 존재 자체인데도 우리 눈에는 변화하는 외양으로 주어진다고 주장하는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이 이중환원하기를 대표하는 입장으로 거론된다. 이러한 입장은 '객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은 채 실재와 현상 중 어느 하나의 영역에 억지로 귀속시키고자 하는 것으로 비판받는다.

(3) 따라서 객체지향 존재론은 세 가지 환원하기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객체(object)'를 그보다 더 근본적인 실재나 그보다 더 표면적인 현상 중 어느 한쪽으로 귀속시키길 거부한다. 오히려 객체는 그 자체로 독립적 '실체(substance)'이자 '실재(reality)'라고 강조된다. 가령,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nie, VOC)'라는 객체는 자신의 고유한 삶을 지닌 존재자로 여겨져야 한다. VOC가 수많은 사람, 선박, 규범, 영토로 이루어진 인공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인공물이 (a) 더 근본적 층위에서 자연적 요소와 모나드적 실체로 완벽하게 분석될 수 있다거나 (b) 아무런 실체가 없는 일종의 효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VOC는 그 자체로 탄생, 성숙, 퇴락, 죽음을 거치는 단일한 객체이다. 다만, 객체로서 VOC의 삶은 다른 객체와의 '공생(symbiosis)'을 통해 몇몇 국면에서 결정적으로 변화한다. 객체들 사이의 공생 관계는 객체가 어떻게 영원한 본질 따위를 지니지 않으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동성으로 용해되지도 않는지를 해명한다. 객체는 자기 삶의 대부분을 안정된 상태로 유지하지만 다른 객체와의 유대가 팽창하거나 정형화되는 몇몇 국면에서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는 것이다.

(4) 이러한 입장은 칸트의 '물 자체(thing-in-itsefl)' 개념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재전유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하먼은 『비유물론』 제4장에서 라투르의 ANT에 반대하여 칸트의 물 자체 개념을 옹호하고자 한다. 즉, 객체는 인간의 현상적 영역으로 환원되지 않는 '물 자체'이다. 나의 지식으로 파악된 객체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체는 근본적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여기서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체란 인간 권역을 비롯한 모든 인과적 상호작용을 넘어서는 곳에 놓여 있다. 따라서 객체를 인간의 마음으로 환원하려는 '위로 환원하기'의 입장만큼이나 객체를 근본적 본질로 환원하려는 '아래로 환원하기'의 입장 역시 거부되어야 한다. 하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예전의 본질주의는 사물의 본질을 ​인식한 ​ 다음에 이 지식을 억압적인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동양인은 본질적으로 자치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비유물론적 본질주의는 본질은 직접 인식할 수 없기에 뜻밖의 일을 빈번하게 일으킨다고 주의를 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박한 실재로은 실재는 마음 바깥에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객체지향 실재론은 실재는 마음 바깥에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접적 방식이나 암식적 방식이나 대리적 방식으로만 실재에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실재는, 인간만이 외부가 있는 존재자인 것처럼, 오로지 '마음 바깥'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실재는 먼지와 빗방울의 인과적 상호작용도 넘어서는 잉여물로서 존재하는데, 그리하여 실재는 인간 권역에서 완전히 표현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명 없는 관계들의 세계에서도 결코 완전히 표현되지 않는다.1

(5) 나로서는 사람들이 객체지향 존재론을 마치 우리 시대에 막 등장한 새로운 이론처럼 받아들이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하먼이 제시하는 입장은 이미 수많은 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고 비판받은 일종의 '실체 형이상학(substance metaphysics)'이다. 하먼 본인은 객체가 수많은 외부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안정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지를 설명하는 '안정성 이론(stability theory)'이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하지만2 형이상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주장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개체', '사태', '동일성', '자연종', '지속'과 같은 주제를 탐구하는 형이상학자들은 객체지향 존재론이 고민하는 내용을 적게는 수십 년에서 많게는 수천 년 앞서 이미 주장했다. 그 유명한 그리스 신화의 '테세우스의 배' 예화에서 시작하여 버나드 윌리엄스의 '두 사람의 뇌 교환 문제'나 데렉 파핏의 '전송기 사고 실험' 같은 종류의 논의가 모두 존재자의 동일성, 지속, 변화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실체 형이상학의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답하고자 하는 입장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다. 당연하게도, 이렇게 긴 역사만큼이나 실체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은 엄청나게 누적되어 있다.

(6) 가령, 객체를 규정될 수 없는 존재자로 상정한 상태에서 지속과 변화를 해명하고자 하는 시도는 사실 '기체 이론(substratum theory)'이라고 일컬어지는 매우 고전적 형이상학 담론의 한 형태이다. 이러한 이론은 사물을 속성이나 관계의 집합으로 해명하고자 하는 '다발 이론(bundle theory)'에 반대하여 제시된다. 따라서 하먼(OOO)과 라투르-브라이언트(ANT-NM) 사이의 대립은 사실 '기체 이론'과 '다발 이론' 사이의 대립이라는 고전적 논쟁 구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양상을 보인다. 실제로, 하먼은 종종 자신이 비판하는 ANT와 NM을 '활동(energeia)'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고대 메가라학파에 대응시키고 OOO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응시킨다. 이때, 아리스토텔레스가 메가라학파에 반대하여 (더 직접적으로는, 파르메니데스에 반대하여) 내세우는 이론이 바로 '기체 이론'이다. 즉, 변화란 개별화의 원리이자 순수 질료인 '기체(substratum)' 위에서 이루어지는 보편자의 실현 과정이다. 모든 언어적 규정을 넘어서 존재하는 개개의 '어떤 것'이야 말로 변화의 밑바탕에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

(7) 따라서 객체지향 존재론은 기체 이론에 대해 제기된 고전적인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가령, 관계, 행위, 효과, 지식 아래에 '기체'의 역할을 하는 사물을 상정하려는 시도는 경험적 지각의 범위를 벗어난 존재자를 무리하게 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속성을 담지하는 기체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속성도 담지하고 있지 않다는 주장은 자기 모순적이지 않은가? 기체 역시 자신에게 본질적인 속성들(속성들의 주제임, 수적 다양성의 원리임, 숫자 7과는 다름, 만일 초록색이라면 색을 가지고 있음, 빨갛거나 빨갛지 않음)을 통해 특징지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결국 속성의 다발을 최종적으로 떠받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하먼은 자신의 입장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이러한 고전적인 비판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입장이 형의상학의 기존 논의에서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크게 신경쓰지 않다 보니, 자신과 유사한 입장이 이전 철학자들에게 어떻게 비판받았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8) 특별히, 하먼이 철학사에서 '물 자체'에 대해 제기된 수많은 비판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무책임해 보인다. '아래로 환원하기'와 '위로 환원하기'의 이중적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물 자체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칸트 철학의 근본 기획 중 하나였다. 칸트가 '교조주의'와 '회의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이성의 한계를 긋고 물 자체의 영역을 남겨둔 이후로 철학자들은 240년 동안 '물 자체'라는 개념이 과연 이론적으로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지에 대해 수없이 많은 논의를 쌓아왔다. 단순히 이중적 딜레마를 극복해야 한다는 명목만으로는 물 자체가 곧바로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헤겔, 후설,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데이비슨, 로티, 맥도웰 등이 모두 하먼처럼 '주체/객체', '현상/실재', '언어/사태', '기표/기의', '마음/세계'의 이분법을 비판하였는데도 그들 모두가 '물 자체'라는 대상을 거부한 데에는 그만큼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즉, 물 자체를 받아들이는 순간 실재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진술은 '객관적 의미(objective purport)'를 상실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실재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재에 대해 사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실재란 애초에 결코 말해질 수 없는 영역으로 상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칸트의 철학이 교조주의와 회의주의를 넘어서겠다는 야심찬 기획에도 불구하고 결국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관적 관념론', '개념 상대주의', '외부세계 회의주의'라는 비판을 듣게된 이유도 물 자체에 있다. 객체지향 존재론이 현대철학의 기존 논의들을 넘어서는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물 자체가 발생시키는 아포리아를 '해결' 혹은 '해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하먼의 텍스트에서 이러한 아포리아에 대한 언급을 전혀 찾을 수가 없다.

(9) 오히려 물 자체를 끌어들여 객체의 지속을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은 너무나 순진하다. 하먼은 '동일하다/다르다'라는 술어가 특정한 기준을 전제한 상태에서만 유의미하게 말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나머지 객체의 지속을 보장하기 위해 물 자체를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객체가 수많은 외부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안정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가?"는 애초에 무의미한 물음이다. t1 시점의 객체와 t2 시점의 객체에 대해 '동일하다/다르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비교의 기준이 무엇인지가 제시되어야 한다. 가령, 10살의 철수와 20살의 철수는 '철수'라는 이름으로 명명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각각의 신장이 '135cm'와 '175cm'라는 점에서는 다르다. 어떠한 기준을 전제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동일하다/다르다'라는 술어를 적용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아무런 기준 없이 두 대상을 단순히 '동일하다/다르다'라고 하는 것은 문법적 오류이다. 따라서 시간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동일성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이유가 따로 해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객체의 지속을 보장하는 것은 '물 자체'가 아니라, 그 객체를 기술하기 위해 전제된 '언어적 맥락'이다. 객체가 동일성을 유지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론을 성립시키려는 시도는 '동일하다/다르다'의 문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1. 그레이엄 하먼, 『비유물론: 객체와 사회 이론』,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63-64쪽.
  2.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안정성 이론으로 불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분과학문이다. 사물은 왜 매 순간에 자신을 둘러싼 수백 만 개의 영향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가?"(Ibid., 17쪽.)
  3. 다만, 마이클 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기체 이론과 구별되는 '실체 이론(substance theory)'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체에 대한 논의를 체계적을 전개한 최초의 철학자인 것은 맞지만, 그는 결국 한 개체의 '종(species)'이야 말로 속성들을 담지하는 '실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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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최신 주제를 비판적으로 다뤄주셔서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글 읽기가 (그것도 시간을 내서) 너무 힘들어서 얹혀갑니다..ㅎㅎ
특히,

단순히 이중적 딜레마를 극복해야 한다는 명목만으로는 물 자체가 곧바로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헤겔, 후설, 비트겐슈타인, 데리다, 데이비슨, 로티, 맥도웰 등이 모두 하먼처럼 '주체/객체', '현상/실재', '언어/사태', '기표/기의', '마음/세계'의 이분법을 비판하였는데도 그들 모두가 '물 자체'라는 대상을 거부한 데에는 그만큼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즉, 물 자체를 받아들이는 순간 실재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진술은 '객관적 의미(objective purport)'를 상실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실재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재에 대해 사실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고 인정해야 하는 모순에 빠지고 만다.

이 부분은 아주 많이 공감합니다.

다만 두 가지 든 생각이 있는데요, 먼저 분석철학자들의 "철학사 망각"에 대해서는 저와 이해하는 바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좀 의아했거든요. 분석철학자들 중에서 과거에 있었던 견해를 자기가 처음 한 것인냥 제시한 글이 있었던가? 글쎄요. 20세기에 들어서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 게 있다면 아마도 외재론이 아닐까 싶은데 그 외에 그런 식으로 명시적으로 주장한 학자가 있나 여쭙고 싶습니다.
그보다는 아마도 구태여 자신의 주장을 철학사적 맥락에 위치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철학사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유명론을 주장하려고 반드시 철학사적 전거를 끌어올 필요는 없는 것처럼요. 이건 일반화하기 좀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과거 철학자들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철학사적 맥락을 탈탈 털어야 할 이유도 딱히 없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여하튼, 분석철학의 철학사 망각에 대한 제 견해는 1) 어떤 주장을 위해 (인용 외에) 철학사적 전거를 굳이 끌어오지는 않는다는 것, 2)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왔던 큰 문제들이 아닌 지엽적이고 테크니컬한 문제에 지나치게 치중하는 경향으로 보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9)에서,

어떠한 기준을 전제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동일하다/다르다'라는 술어를 적용하는 방식은 달라진다. 아무런 기준 없이 두 대상을 단순히 '동일하다/다르다'라고 하는 것은 문법적 오류이다. 따라서 시간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동일성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이유가 따로 해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객체의 지속을 보장하는 것은 '물 자체'가 아니라, 그 객체를 기술하기 위해 전제된 언어적 맥락이다.

이건 일견 맞는 말씀 같긴 한데(파핏의 견해와 유사한 것 같네요), 동일성 문제의 포인트에는 좀 엇나가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아무런 기준 없이 두 대상을 단순히 '동일하다/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은 문법적 오류이다."로부터 "따라서 시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동일성이 안정적으로 지속되는 이유가 따로 해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가 어떻게 주장될 수 있는지가 좀 의문스럽습니다. (하만의 주장은 일단 아오안입니다)
파핏이 동일성 문제는 언어적 규범의 문제라고 주장한 것에도 비슷하게 적용되는 물음인데, 사람의 동일성이라는 게 진짜로 언어적 문제에 지나지 않을 뿐인가 하는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사람의 동일성은 곧 그 사람의 도덕적 책임 귀속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어떤 인간에게 도덕적 책임을 지울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를 판단하는 선결문제가 단순히 언어적 규범에 의해 달라진다고 본다는 게, 또 그렇기 때문에 동일성이 지속되는 이유가 굳이 따로 해명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게 제 직관에는 좀 불충분한 해명으로 보입니다.

늦은 시간에도 공부하신 걸 올리시니 반성이 되네요. 저는 그냥 뻘글 쓰러 왔는데.. 자극 받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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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석적 형이상학자들이 '철학사 망각'에 빠져 있다는 건, 제 개인적인 편견과 불만이 가득 담긴 평가일지도 모르겠네요. 가령, 저는 헤겔의 철학이 지닌 의의가 오늘날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재발견되고 있는데도 왜 주류 분석철학은 여전히 헤겔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제가 보기에는 헤겔이 이미 다 극복한) 낡은 문제로 고민하는지 의문이었어요. 또 비트겐슈타인이 20세기 초반 분석철학의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인데도 주류 분석철학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비판이나 토의는 커녕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너무 쉽게 망각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불만이 있었고요. 이런 점들 때문에 분석적 형이상학이 '철학사 망각'에 빠졌다고 비난은 했지만, 사실 Raccoon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제 비난이 그다지 엄밀한 비판은 아니죠.

(2) 파핏이 그런 주장을 했나 보네요. 사실 저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더 구체적으로는, 코라 다이아몬드가 크립키를 비판할 때 제시한 논증을 응용한 거였어요. 비트겐슈타인이나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은 철학적 문제에 내재된 문법적 혼동을 밝혀내어 그 문제 자체를 '해소(dissolving)'해야 한다고 지적하잖아요. 저는 이런 입장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형이상학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무시할 순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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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철학사 인식에 관해서는 불만점이 조금 다른 게 느껴집니다. 물론 이것도 제 경험에 한해서 밖에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저는 오히려 (소위) 대륙철학(제가 이 구분을 싫어해서 "소위"를 붙였다는 것을 알아주시길!) 하시는 분들이 철학사를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분석철학 계열의 역사를 후기 비트겐슈타인 언저리에서 끊어버리는 경향을 강하게 느낍니다. 논리실증주의와 초기 비트겐슈타인 - 일상언어철학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사실상 분석철학 역사의 끝인 것처럼 말이죠.
저는 그런데 그게 아직까지는 아주 큰 문제인 것 같진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철학은 분화되었고,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또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당면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지 못할 때 종종 역사를 톺아볼 것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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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공부하시는 것을 보면서 큰 자극 얻어갑니다. 건승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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