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을 위한 실재론?: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 제1장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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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화석 앞에서, ​모든 관념론은 수렴되고 한결같이 터무니 없게 된다 ​."1

(1) 메이야수는 '선조적 진술(énoncés ancestraux)'의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칸트 이후의 철학이 지닌 관념론적 경향을 비판한다. 즉, 인간 종이 출현하기 전에도 세계는 존재하였다. 우주는 135억년 전에 탄생하였고, 지구는 44억 5천만 년 전에 형성되었으며, 생명체는 35억 년 전에 나타났다. 소위 '원화석(archifossile)' 혹은 '물질-화석(matière-fossile)'이라는 종류의 존재물은 인간 종의 출현에 선행하는 실재를 가리켜 보이고 있다. 따라서 사유가 존재와 맺고 있는 상관관계를 통해 세계를 해석하고자 하는 칸트 이후의 모든 '상관주의(corrélationisme)'는 인간을 중심으로 실재에 접근하고자 하는 관념론으로 비판받아야 한다.

(2)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칸트 이후의 철학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왜곡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로, 메이야수는 칸트 이후의 철학이 이미 갈릴레이의 탈인간중심적 우주관을 고려한 상태에서 성립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간과하고 있다. 둘째로, 메이야수는 칸트 이후의 철학이 자연과학적 진술의 객관성을 부정한다는 잘못된 해석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셋째로, 메이야수는 선조적 진술의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와 사유를 분리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자기 모순에 빠진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3) 칸트는 탈인간중심적 우주관이 널리 퍼져 있던 18세기의 인물이다. 이미 서구 근대사회는 16-17세기에 케플러와 갈릴레이를 통해 자연에 대한 목적론적 믿음에서 벗어났고,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물체의 운동이 수학적으로 측정될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에 도달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 종이 출현하기 전에도 세계는 존재하였다."와 같은 주장은 칸트와 그 후계자들에게 전혀 충격을 주지 못한다.2 오히려 상관주의를 옹호하는 철학자들이 마치 우주의 '선조성(ancestralit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하는 입장은 허수아비를 비난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실험과학은 의식과 생명의 도래에 선행하는 사건들과 관련된 진술들을 산출할 수 있다."3 혹은 "[……] 오늘날의 과학은 [……] 최초의 영장류의 출현에 선행하는 생명체 화석의 형성 시기, ​지구 ​의 형성 시기, 혹은 천체의 형성 시기, 더 나아가 ​우주 ​자체의 '나이(ancienneté)'를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다."4 따위의 해설은 상관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아무런 의의도 지니지 못한다. '오늘날의 과학'이 아니라 '18세기의 과학'조차 인간을 중심으로 우주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4) 칸트 이후의 철학이 자연과학적 진술의 객관성을 부정한다는 해석도 심각하게 잘못되었다. 칸트를 비롯하여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에 속한다고 알려져 있는 철학자 중 그 어느 누구도 자연과학을 비판하지 않는다. 상관주의는 자연과학으로부터 형이상학을 도출하고자 하는 시도를 거부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주의(naturalism)'에 대한 비판과 '자연과학(natural science)'에 대한 비판을 엄격하게 구분해야 한다. 즉, 20세기에 등장한 관념론적 성향의 사조들(현상학, 해석학, 실존주의, 해체주의, 실용주의 등)은 자연과학을 절대화하여 모든 종류의 진리를 수리물리학적 진술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입장에 반대한다. 그러나 자연주의에 대한 비판이 자연과학에 대한 비판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자연과학이 제시하는 진술들은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인정된다. 다만, 자연과학의 담론이 다른 모든 종류의 담론보다 인식론적 우위를 지닌다는 주장, 자연과학의 담론으로 다른 모든 종류의 담론을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 자연과학의 담론을 통해 다른 모든 종류의 담론을 극복하여 세계를 완벽하게 표상해야 한다는 주장은 철저하게 거부된다. 자연과학이 다른 모든 종류의 담론보다 더 뛰어나다는 주장은 '신의 관점(God's eye-view)'과 같은 정당화될 수 없는 수많은 형이상학적 가정을 전제한 상태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5) 선조성을 바탕으로 존재와 사유를 구분하여 상관주의를 비판하고자 하는 입장은 내적 모순에 빠져 있다. 이러한 입장은 결국 상관주의를 비판하는 자신의 논리를 통해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즉, 메이야수는 실재에 대한 상관주의의 입장이 '넌센스'라고 주장한다. 상관주의는 과학적 진술이 객관적이라고 강조하는 동시에, 과학적 진술이 기술하는 참조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대체 45억 6천만 년 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지구의 직접은 일어났습니까, 아닙니까? ​그[상관주의자]는 대답할 것이다. 한편으로 일어났다고. 왜냐하면 그 사건을 설명하는 과학적 진술들이 객관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상호주관적 방식으로 검증되기 때문에. 그러나 다른 한편, 다시 말해 그는 덧붙일 것이다. 일어나지 않았다고. 왜냐하면 그러한 진술들의 참조물이 소박하게──다시 말해서 의식에 상관적이지 않은 것처럼──기술되는 방식으로라면 그 참조물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때 우리는 상당히 기이한 어떤 진술에 도달한다: 객관적인 한에서 ​선조적 진술은 참된 진술이지만 그것의 참조물이 그러한 진리가 기술하는바 실제로 존재했을 리 없다. ​ 그것은 불가능한 사건을 실재처럼 기술함에도 불구하고 참된 진술이고, 사유가능한 대상이 부재하는 '객관적' 진술이다. 더욱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넌센스다 ​."5

그러나 '넌센스'를 피하려는 명목으로 존재를 사유 바깥에 상정하고자 하는 입장이야 말로 '넌센스'이다. 애초에 상관주의는 선조적 진술이 '참'이라고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다. 다만, 선조적 진술이 사유를 벗어난 존재를 요구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길 거부할 뿐이다. 여기서 핵심은 자연과학을 옹호하기 위해 형이상학을 도입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즉, 인간 종이 출현하기 전에도 세계는 존재하였다고 말하기 위해 사유가 접근할 수 없는 실재를 전제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오히려 사유가 접근할 수 없는 실재를 바탕으로 자연과학을 옹호하고자 하는 기획은 '사물 자체의 아포리아'라는 유명한 넌센스를 낳는다. 한편으로, 이러한 입장은 인간 종에 앞선 실재가 인간의 '사유 밖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입장은 인간 종에 앞선 실재가 인간의 '사유 속에서' 수학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형이상학은 인간 이전의 '선조성'을 말하는 과정에서 사유가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실재를 상정한 채 그 실재에 다시 수학을 통해 접근하고자 하는 모순에 빠진다.

(6) 상관주의는 '사물 자체의 아포리아' 같은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45억 6천만 년 전에도 세계는 존재했다. 이러한 진술은 우리가 '사유 속에서'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즉, 인간 종에 앞선 실재란 사유할 수 없는 '사물 자체(thing-in-itself)' 따위가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자연과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에 따라 인간 종에 앞선 실재를 해명한다. 객관적 우주는 사유 속에서 얼마든지 가정되고, 추론되고, 판단될 수 있다. 애초에 수학조차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되는 사유의 한 방식이다. 오히려 사유를 벗어난 존재야말로 '넌센스'이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실재에 접근할 수 없다고 상정한 상태에서 "여하튼 실재는 사유 밖에 존재하긴 존재해!"라고 말하는 입장이란 도저히 무엇을 의미하고자 하는지조차 불분명한 형이상학적 독단이기 때문이다.

(7) 솔직히 나로서는 20세기 이후 프랑스 철학에서 메이야수 같은 철학자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는 사실이 대단히 당혹스럽다. 상관주의에 대해 메이야수가 제시하는 비판은 너무나 소박해서 진지하게 다루어질 만한 가치가 있는 주장인지조차 의문스럽다. K 선배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메이야수는 칸트 이후 철학사의 가장 중요한 300년을 통째로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후배 K의 표현을 빌리자면, 메이야수는 관념론을 피상적으로 배운 상태에서 칸트를 비판하는 철학 비전공자 같다. 또 다른 후배 K의 표현을 빌리자면, 메이야수의 주장은 서강대에서 했으면 욕 먹고 끝났을 내용인데 단순히 '프랑스 철학'이라는 브랜드 네임 때문에 칭송받는 것 같다. 다른 학교 K의 표현을 빌리자면, 메이야수는 짱돌로 한 번 맞아봐야 정신을 차릴(?) 사람인 것 같다. 또 다른 학교 K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시대에는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가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조차 드물다 보니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라는 지랄(?)이 생겨나는 것 같다.

  1. 퀑탱 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우연성의 필연성에 관한 시론』, 정지은 옮김, 도서출판 b, 2010, 39쪽 원저자 강조.
  2. 심지어 칸트는 항성과 행성이 우주의 먼지 구름으로부터 형성되었다는 '성운설'을 천문학 역사에서 최초로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외계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주장하기도 하였을 만큼 우주의 진화에 관심이 많았다.
  3. Ibid., 25쪽.
  4. Ibid., 26쪽 원저자 강조.
  5. Ibid., 37-38쪽 원저자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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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적 전회가 뭔지 이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존재론적 전회라는 지랄(?)이 생겨나는 거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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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관념론 수업시간에 졸면 안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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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야수 지도 교수가 헤겔 전공인데, 지도 교수 수업 때 졸았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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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 1967 - present)의 연구업적 목록과 경력사항을 찾아보고, 또 프랑스 외부에서 그의 사상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에 관한 동향을 확인해보기 위해 간략히 조사해보았습니다. 영미권의 경우 적어도 ProQuest에서 검색되는 Dissertation의 숫자, 영문으로 번역된 메이야수의 저서목록, 그리고 그의 사상에 관한 review와 research articles를 놓고 생각해보면, 많은 이목을 끌고 있는 듯합니다.

대륙철학 A&HCI 티어 저널 Continental Philosophy Review, British society for Phenomenology의 경우, 적어도 2017년부터 연 2-3편씩 메이야수의 사상을 다룬 저널들이 꾸준히 출판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적어도 장-뤽 낭시(Jean-Luc Nancy)와 폴 리쾨르 (Paul Ricouer)보다는 더 많이 그리고 꾸준히 다뤄지는듯 합니다.

Après la finitude에 관한 관련 리뷰 abstract를 읽어보니, 들뢰즈의 비인격적사유/분열증적 사유가 표방하는 기획의 목표를 다른 방법론으로 달성하고자 하는 듯 합니다. 의식 상관적 대상과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관계를 바탕으로 필연성을 확보해 지식의 가능성을 정초하는 철학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우연성이라는 확률론에 기대고자 하니 말입니다. 관련 연구들이 니체를 많이 언급하고 있는데, 들뢰즈가 분열증적 사유의 논리를 확보하기 위해 칸트 비판을 거쳐 니체의 주사위 던지기 모티브를 활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메이야수도 이를 활용하는듯 합니다.

들뢰즈가 사유의 이미지 비판(Critique des images de la pensée)라는 기획 아래 철학사를 밀도 높게 비판 및 해체한 뒤에 자신의 논리를 수립하는 것과 다르게 메이야수의 핵심주장의 수립근거는ㅡ적어도 유한성 이후라는 저작에만 한정한다면ㅡ다소간 실망스럽습니다. 사실 메이야수의 사상이 왜 세간의 이목을 끄는가?'라는 의혹을 떨치기가 어렵네요. 개인적 소감으로는 이미 들뢰즈가 달성한 작업의 변주곡의 열화된 버젼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렵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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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기엔 메이야수가 비판하는 인간중심적 '무언가'는 "인간은 '무언가'를 통해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라는 자신감을 의미하는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역시 학문을 억울하게 그러한 오만한 방식으로 환원하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하지만 메이야수가 말하는 절대자에 대한 사고는 어느정도 이해하는 편입니다. 비록 러브크래프티언은 아니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이미 칸트의 물자체 개념에서도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예전부터 여러 철학적인 논의에서 나왔던 내용인 것 같기도 합니다...(하지만 가방끈이 짧다보니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예전에 '형이상학과 과학 밖 소설'이라는 짧은 책을 읽었을 땐, 꽤 재밌는 이야기도 보았습니다. 칸트가 흄을 비판하면서 만약 감각세계가 흄의 방식대로 카오스적이라면, 인간은 어떠한 사고행위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말에 대해, 메이야수는 카오스적인 상태가 곧바로 인간 행위의 불가능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만약 메이야수가 이를 통해 인간의 감각체계가 반드시 오성과 감성으로 나누어지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개념화되어 작동할 수 있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라면, 저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근 하먼 저작이 빠르게 번역되어 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 이미 몇년 전부터 한국에서도 객체지향철학과 관련된 예술전시도 등장하고, 예술분야에서 꽤 컬트적인 인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먼 메이야수 데란다 이렇게 신유물론의 아이돌로 떠오르는 것 같은데... 정작 하먼은 메이야수의 상관주의에 대해 불만족스러운 입장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ㅋㅋ 아무튼 하먼의 번역된 책들은 꽤 재밌게 읽었는데, 메이야수의 논의가 여기서 끝이라면 조금 흥미가 떨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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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 달성한 작업의 변주곡"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네요. 저는 메이야수와 함께 바디우도 이 표현 아래에 귀속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셋 중에서 그래도 제일 나은 쪽을 뽑자면, 말씀하신 것처럼, 철학사를 밀도 높게 탐구하는 들뢰즈는 어느 정도 유의미하고 생산적인 논의를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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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기에, 메이야수는 '우연성'이 인간의 사유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일종의 '실재'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카오스적인 상태'에 대한 옹호도 우연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제시된 것으로 보입니다. 특정한 질서 안으로 포섭되지 않는 우연성이야 말로 이 세계의 본래 모습이라는 거죠. 저는 이러한 주장이 일종의 '형이상학'의 형태로 제시되는 게 불만스럽습니다. 메이야수는 자신이 형이상학의 절대적 필연성 개념을 극복했다고 주장하지만, 저는 메이야수가 칸트 이전의 낡은 사유로 되돌아가 '우연성의 형이상학'을 옹호하고자 하는 시대착오적 철학을 전개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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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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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말들, 각각의 인물들이 모두 직접 한 말들입니다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