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야수, '유한성 이후' 2장

오늘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 2장을 읽어봤는데, 재미있는 부분이 많네요.


저는 메이야수를 YOUN님의 글과 고 김영건 교수님의 글을 통해서 접했어서, 메이야수가 '왜'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것을 전개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를 통해서 뭘 하고 싶은것인가에 대해서 늘 의문인 상태였습니다.

근데 2장에서 이게 꽤 명료하게 해결되었어요!

상관관계의 이 급진화는 우리가 사유와 존재의 '가능한 전체적 타자화(possible whole alteration)'라고 부를 만한 것을 낳았다. 사유 불가능한 것은 우리를 다르게 사유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으로 되돌려 보낼 뿐, 사물이 전적으로 다르게 존재하는 것의 절대적 불가능성으로 되돌려 보내지는 않는다.

어떤 절대자도 사유하려는 자부의 소멸로 귀결되지만, 절대자들의 소멸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사유가 치료 불가능한 한계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상관주의적 이성은 그로써 절대자에 접근한다고 주장하는 모든 담론들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절대자의 가치를 폐기하기는커녕, 오늘날 '절대자들의 종언'이라 계속해서 불리는 과정은 후자에게 전례 없는 허가증을 부여한다.

다시 말해: 이성이 절대자에 대해 어떤 주장도 하지 못하게 금지함으로써, 형이상학의 종언은 종교적인 것의 격렬한 귀환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혹은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의 종언은 종교성(religiosity)의 무조건적인 승리라는 형태를 취했다.

메이야수는 그가 '강한 상관주의'라고 부르는 철학적 입장이 오히려 이 시대에서 '종교적 광신'의 화려하고도 절대적인 부활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비합리적인 것이 절대자를 자처할 때 그것을 비판할 권리를 포기했다는 사실은, 이 현상의 범위를 고려할 때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이 '종교적인 것의 귀환'은 강력한 역사적 굴광성(tropism) 때문에 오해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단번에 빠져나와야 한다. 이 굴광성, 이 개념적 맹목은 다음과 같이 기술될 수 있다. 형이상학에 대한 모든 비판은 '자연스럽게' 종교 비판과 함께 간다고 계속해서 믿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사실, 이 '비판들의 동반자 관계'는 형이상학과 종교 사이의 연결에 대한 매우 특정한 배치(configuration)의 함수로 남아 있다. 누군가 '형이상학적-종교적' 절대자를 비판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존재-신학(onto-theology) 비판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이는 유대-기독교 신학이 유일신에 대한 믿음이 소위 합리적 진리들에 기초해 있다는 주장—이 모든 진리들은 만물의 부동의 원동자인 최고 존재라는 관념에 닻을 내리고 있다—과 일치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자명하지 않거나 더 이상 자명하지 않게 된 어떤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절대자를 사유하려는 형이상학의 자부를 비판함으로써, 우리는—실제로 입증되었듯이—다른 종교들의 믿음보다 자신의 특정 믿음이 우월함을 선언하기 위해 '자연적 이성'에 호소했던 특정 종교를 약화시키는 데 성공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최고 존재의 존재에 대한 모든 형태의 증명을 파괴함으로써, 특정 유일신 종교가 모든 형태의 다신교 종교에 대항하여 호소했던 합리적 지지대를 제거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형이상학을 파괴함으로써, 우리는 특정 종교가 다른 모든 종교에 대해 사이비-합리적 논증을 사용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인 지점인데—우리는 의도치 않게 믿음만이 절대자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해주고 말았다. 일단 절대자가 사유 불가능해지면, 신의 부존재를 절대자의 방식으로 겨냥하는 무신론조차 단순한 믿음으로, 따라서 비록 허무주의적 종류일지라도 하나의 종교로 환원된다. 신앙은 신앙과 맞서게 되는데, 우리의 근본적인 선택을 결정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증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유의 탈-절대화는 신앙주의적(fideist) 논증의 동원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역사적'인 성격이 아니라 '근본적(fundamental)'인 성격의 신앙주의이다. 즉, (16세기 가톨릭 신앙주의나 그렇게 자처했던 것의 경우처럼) 특정 종교의 편이 아니라, 종교성 일반에 대한 사유의 방어가 된 신앙주의이다.

이 부분이 저는 되게 매력적인 설명으로 느껴졌는데요, 독단적 형이상학에 대한 철학적 비판이 기독교가 합리주의와 연결되어있던 특정 전통 아래에서는 종교의 해체 역할을 수행했지만, 독단적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과 종교에 대한 해체는 항상 연결된 것이 아니라, 매우 '특정한 배치'일 뿐이라고 말하는 부분, 그러면서 '존재-신학 비판'이라는 것이 철학사적으로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이었음을 말하는 부분이 매우 설득력있게 느껴졌네요.


메이야수는 이러한 비판을 이제 그가 '강한 상관주의 전통' 아래에 있다고, 혹은 그러한 철학적 경향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을 향해 확장하는데요, 그 대상은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레비나스입니다.

우리에게 형이상학의 현대적 종결은, 우리가 '전적 타자'의 사유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의해 지배되는, 형이상학의 '회의-신앙주의적' 종결에 다름 아닌 것처럼 보인다.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는 이 사유의 상징적인 대표자들이다. 이 문제에 있어 과거와의 급진적인 단절을 시작하기는커녕, 두 사람 모두 유서 깊고 잘 문헌화된 신앙주의 전통(몽테뉴에 의해 시작되어 가상디와 베일을 통해 발전된)의 유산을 상속받고 있다. 이 전통의 반-형이상학적 성격은 언제나 합리성의 침입으로부터 신앙심을 보호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으며, 이 두 사상가에게서 정점에 도달한다.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에서 환기되는 '신비적인 것'이나, 하이데거가 오랫동안 집필을 고려했다고 시인한 신학—단, 철학적인 것은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고, 심지어 '존재'라는 단어조차 포함하지 않는 조건하에서의 신학[^28]—은 모두, 더 이상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도 유지하지 않는 절대성을 향한 열망의 표현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통 이것을 다른 이름으로 지칭하려고 주의를 기울인다. 이것은 내용이 텅 비워진 신앙심이며, 이제 스스로를 실체화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사유에 의해, 그 자체로 찬양받고 있는 신앙심이다.

그는 칸트적 전통 아래에서 만들어진 '사유가능한 것에 대한 한계짓기'라는 상관주의적 전통 아래에서 나타나는 '신비주의의 도입'을 신앙주의라고 공격하기도 하고,

그것의 동시대적 지배력은 현재 종교적 믿음이 누리는 것으로 보이는 개념적 합리성의 제약으로부터의 면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오늘날 어떤 철학자가 기독교 삼위일체의 가능성을 그 안에 모순이 발견된다는 근거로 반박했다고 주장하겠는가? 레비나스의 '전적 타자' 사상을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불합리하다고 일축하는 철학자는, 레비나스 담론의 높이로 올라갈 능력이 없는 케케묵은 자유사상가로 조롱받지 않겠는가? 이러한 태도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적 믿음이 많은 현대 철학자들에 의해 합리적 반박의 범위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단지 그러한 믿음이 정의상 이런 종류의 비판에 무관심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러한 반박을 수행하는 것이 개념적으로 비합법적인 것으로 이 철학자들에게 보이기 때문이다.

레비나스의 비합리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이성초월적 개념인 '초월적 전적 타자'와 같은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비판받아야 하는데, 신비롭고 깊다는 말로 지지받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럼 메이야수가 말하는 강한 상관주의자들은 누구냐? 이건 1장의 이 부분, 메이야수가 말하는 주장에 대해 '비판-이전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 그래서 메이야수가 '감히 독단적인, 이미 폐기되어 말할 수 없는 말을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객체의 수학화 가능한 속성들은 그러한 관계의 제약으로부터 면제되며, 내가 이 객체와 관계를 맺든 안 맺든 상관없이, 내가 그것들을 사유하는 방식 그대로 객체 안에 효과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테제를 정당화하기 전에, 이 테제가 현대 철학자에게 어떤 점에서 불합리해(absurd) 보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겉보기의 불합리함의 정확한 원천을 뿌리 뽑을 필요가 있다.
이 테제가 현대 철학자에게 지지 불가능해 보일 것이 거의 확실한 이유는, 이것이 단호하게 *비판-이전적(pre-critical)*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독단적 형이상학의 '순진한' 태도로 퇴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가 방금 주장한 것은, 사유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의 함수인 세계의 속성들과, 우리의 관계와 무관하게 존속하는 '그 자체로서의' 세계의 속성들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테제가 칸트 이후뿐만 아니라 버클리 이후로도 방어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모두 알고 있다.


2장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다음의 역설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사유가 독단론에 맞서 스스로를 무장하면 할수록, 광신주의 앞에서는 더욱 무방비 상태가 된다. 형이상학적 독단론을 후퇴시키면, 회의-신앙주의는 종교적 몽매주의를 강화한다. 물론 모든 상관주의자를 종교적 광신도라고 비난하는 것은 불합리할 것이다. 마치 모든 형이상학자를 이데올로기적 독단론자라고 비난하는 것이 불합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의 기저에 깔린 근본적 결단들이 이데올로기(존재하는 것은 존재해야만 한다) 안에서, 비록 희화화된 형태일지라도 변함없이 재출현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마찬가지로, 강한 상관주의의 근본적 결단들이 몽매주의적 믿음의 기저에 깔린 근본적 결단들(전적 타자는 존재할 수도 있다)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지지를 보낼 수 있는지도 분명하다. 현대의 광신주의는 서구 비판적 이성의 성취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고대주의의 부활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오히려 정반대이다. 광신주의는 비판적 합리성의 결과이다. 그리고 강조하건대, 정확히 이 합리성이 효과적으로 해방적이었으며, 효과적으로(그리고 고맙게도) 독단론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그러하다. 독단론이 철학 안에서 효과적으로 격파된 것은 상관주의의 비판적 힘 덕분이다. 그러나 철학이 광신주의와 스스로를 근본적으로 구별할 수 없게 된 것 또한 상관주의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승리 어린 비판은, 맹목적 신앙에 대한 갱신된 논변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이 마무리에서 드러나듯이, 모든 형이상학자가 이데올로기적 독단론자는 아니고, 모든 상관주의자가 종교적 광신도도 아니라는 것을 메이야수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칸트-후설-하이데거-데리다-들뢰즈로 이어지는 (물론 정말 그게 들뢰즈에게까지 이어지는지, 그리고 신유물론으로 이어지는지는 깊게 따로 다뤄야 할 문제이지만) 그 상관주의의 계보 아래에 현대 서구 광신주의의 씨앗이 있다 - 고 메이야수는 생각하는 듯 하고, 이러한 문제의식과 비판이 시대적으로 잘 맞아떨어지면서 메이야수가 훌륭한 철학자로 여겨지게 된 것이 아닌가...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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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강올빼미에 처음 글을 써보네요. 처음 써봐서 아직은 좀 어색합니다. 종종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2. 메이야수의 상관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게는 어느 정도는 공허하게 들리기는 합니다. 영미 주류 분석철학은 이미 메이야수의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형태로 형이상학을 아주 잘 하고 있는 것 같고, 메이야수가 말하는 로크의 제1속성에 대한 논의 따위 전혀 문제적이지 않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상관주의적이라고 볼 수 있는 셀라스나 브랜덤, 혹은 하버마스의 경우에도 형이상학과 지식과 믿음을 단순히 선험적으로 도출되거나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병렬적으로 동등하고 취사선택될 수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것들 사이의 정당화 수준의 질적 차이가 있고 그 질적 차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충실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역시나 메이야수의 비판이 통하지 않게 되는 것 같구요.

  3. 다만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이에 기반한 사회 운동가들에게 있어서는 메이야수는 꽤나 충격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저는 사회 운동을 열심히 하는 지인과 대화를 종종 하는데, 그 지인은 메이야수가 지적하는 그러한 인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놀랐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성, 참, 사실 등을 말하는 것은 존재-신학이고, 그것의 최종 정당화를 위해서는 신이라는 절대자에 대한 요청이 필요하고, 세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는 현상이고, 주체와 상관적이지 않은 실재는 존재하지 않고....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기는 한 것 같고, 메이야수의 표적은 이런 사람들이지 않나 싶습니다.

  4. 2장이 흥미로웠던 것과 별개로, 1,3,4 장은 마음에 안 듭니다. 특히 3, 4장의 논증, 절대적 우연성에 대한 논증과, 절대적 우연성이 주어졌을 때 세계가 왜 안정적인지에 대한 수학 공리계를 사용한 확률 성립 불가 논증은....논증이라기보다는 '비유적'이라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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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메이야수가 '사회적 현상'과 '철학적 현상'을 다소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스러워요.

(1) 사회적 현상으로서 '종교적인 것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들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미국이나 한국에서 발생하는 극우 기독교 근본주의 현상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러한 현상은 메이야수가 비판하고자 하는 '상관주의'라는 철학적 맥락과는 전혀 상관이 없죠. 오히려 복잡한 정치적, 역사적 갈등의 맥락을 생략하고서, 단순히 상관주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사회적 현상으로서 '종교적인 것의 귀환'을 잠재우려 한다면, 그런 시도는 지나치게 공허한 것 같아요.

(2) 철학적 현상으로도 '종교적인 것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들이 있죠. 구약성서의 예언서나 신약성서의 바울 서신 등이 정치철학자들에게 주목을 받기도 하고, 현상학이나 해석학 같은 분야들이 종교적 사유를 전개하는 데 새로운 통찰을 주기도 하고, 영미권에서도 분석적 종교철학이 지난 세기에 힘을 얻기도 하였으니까요. 하지만 과연 이러한 현상이 '상관주의'라는 이름으로 다 묶일 수 있는지도 의문스러울 뿐더러, 그 현상들이 '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인지도 저로서는 분명하지 않아요. '종교'나 '신앙'이 그 자체로 혐오의 대상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저는 철학적 현상으로서의 '종교적인 것의 귀환'이 굳이 비판의 타겟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어요. 적어도, 메이야수의 저 책 속에서 저는 그 이유를 찾지는 못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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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반대로 메이야수의 비판이 잔니 바티모나 제임스 스미스같은 학자들이 취하는 전략을 곧장 타겟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을 교회로 가져오려는 시도를 하는 학자들은 형이상학적 독단론을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져오면서, 종교에 대한 '근대적' 비판을 회피하려는 전략을 취하니까요. 그러니까 의견 사이에 어떠한 위계를 설정해줄 진리가 없다면, 이른바 계몽주의 이성이 사적인 영역으로 몰아내버린 종교적 의견도 다시 공적 영역에서 함께 다뤄질 수 있는 의견으로 제시될 수 있다는 거잖아요. 더 나아가서는 다시 특정한 종류의 전통과 배경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것에서 주장의 정당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하기도 하니까요. 메이야수의 입장으로보면 이런 것은 일종의 종교적 전통주의로 회귀라고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요. 물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광신주의라고 불린다면 그것은 꽤나 억울하긴 하죠. 오히려 광신적으로 그것이 유일한 진리기에 믿자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인식론적 태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교 전통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시도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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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BuenCamino 님이 말씀하신 내용에 거의 동의하긴 하는데, 약간 강조점은 달라요. 말씀하신 것처럼, 메이야수의 논의가 바티모나 스미스 같은 인물들에 대한 반대 의견으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a) 정작 메이야수 본인의 텍스트에서는 그 인물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메이야수 본인이 그들을 염두에 두는 것 같지는 않아요. 또 (b) 이미 지적하신 것처럼, 바티모나 스미스 같은 사람들이 종교적 전통을 옹호한다고 해서 그들을 무슨 ‘광신자‘ 취급한다면, 그건 그 자체로 종교 혐오주의일 뿐이지, 정당한 비판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봐요. 게다가, (c) 종교 전통에 대한 논의를 제처두고라도, 애초에 메이야수의 논증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부터가 매우 의문스럽다는 점에서도, 그의 논증으로 종교 전통을 비판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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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야기 오픈채팅방에서 부방장 하시는 분 맞으시죠?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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