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 브라이언트의 『존재의 지도』 서문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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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레비 브라이언트가 『존재의 지도』 서론에서 제시하는 주장에 하나도 동의가 되지 않는다. 브라이언트는 담론주의에 대한 비판의 논점을 완전히 잘못 잡고 있다. 진정한 '유물론'을 주장하기 위해 역사적 유물론을 담론주의로부터 구해내고자 하는 시도는 담론주의가 주장하는 내용을 왜곡하고 있다. 오히려 나에게는 브라이언트가 비판하는 역사적 유물론자, 비판 이론가, 구조주의자, 포스트구조주의자이야 말로 진정한 '유물론'의 길을 걷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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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보다도, 그리고 말하기가 당혹스럽게도, 2006년 11월에 채점의 고역을 잠깐 쉬기 위해 실행한 컴퓨터 게임 프로그램, <심시티 4>에 의해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 이 게임은 나의 신념을 철저히 흔들었다. [……] <심시티>가 내게 가르쳐준 것은 기표와 의미, 믿음 등이 사회적 관계를 구축하는 유일한 행위주체들이 아니라는 점이다."1

개인적 고백이 독특해서 마음에 들긴 하는데, <심시티>가 담론주의에 대한 비판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가 사실 썩 분명하지 않다. 브라이언트는 <심시티>의 도시 성장 과정이 사용자의 설계에 지배받지 않는 자율성을 지닌다고 강조하지만, 나로서는 도대체 어떤 담론주의자가 그 주장에 반대할지 모르겠다. 브라이언트 자신이 언급하는 지젝, 라캉, 데리다, 아도르노 중에 누가 그런 주장을 거부하겠는가? 언제 이 사람들이 주체의 설계를 통해 물질을 지배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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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이라는 용어가 매우 공허해져서 지젝은 이렇게 쓸 수 있었다. '유물론은 내가 보는 실재가 결코 '전체'가 아님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실재의 대부분이 내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실재가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어떤 얼룩, 맹점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것은 특이한 주장이다. 물질이 누군가에게 목격당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맹점과 물질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 주장에는 왜 '질료', '물리성', 혹은 물질적 행위주체에 관한 언급이 없는가? 그 옹호자들 사이에서는 유물론이 물질적인 것과는 전혀 관련 없는 예술 용어가 되어 버린 것처럼 보이곤 한다."2

오히려 브라이언트가 지젝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하고 있는 『시차적 관점』의 한 구절은, 지젝이 완벽한 설계를 통해 물질을 지배하려고 하는 시도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유물론은 내가 보는 실재가 결코 '전체'가 아님을 뜻한다."라는 지젝의 주장이 무슨 말이겠는가? 실재의 자율성을 내가 마음대로 규정한 체계 속에 완벽하게 가둘 수가 없다는 주장이다. "실재가 [……] 어떤 얼룩, 맹점을 함유한다."라는 지젝의 주장이 무슨 말이겠는가? 실재를 특정한 언어 속에 깨끗하게 표상하려는 시도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브라이언트는 "맹점과 물질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지젝에게 반문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 반문이야 말로 브라이언트가 자신이 '담론주의'라고 명명한 입장의 논점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이다.

(4) 물질에 대한 관점을 굳이 '유물론/관념론'으로 나누어야 한다면, 나는 형이상학적으로 유물론자이고, 자연주의자이고, 경험주의자이고, 실재론자이다. 그런데 형이상학적으로 유물론자가 되기 위해 담론주의를 부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둘은 애초에 논의의 층위가 완전히 다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담론주의의 핵심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세계 뒤편에 어떠한 초자연적 '사물 자체'도 놓여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 아무것도 숨겨져 있지 않다 ​(Nothing is hidden)."라는 비트겐슈타인적 표어를 인정하는 순간 누구나 담론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이 표어는 물질성이 기표, 언어, 의미, 담론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함의를 전혀 담고 있지 않다. 다만, '사물 자체의 아포리아' 같은 자기 모순적 전제를 상정하고서 철학을 하지 말라는 경고 규정일 뿐이다.

(5) 담론주의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주체의 수동성, 물질의 자율성, 타자의 이질성, 실재의 객관성을 '사물 자체'라는 이상한 형이상학적 대상 없이도 우리가 얼마든지 강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감추어진 세계가 존재한다는 가정 없이도 실재가 우리에게 가하는 '제약(constraint)'이나 '마찰(friction)'을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가령, 맥도웰이 '개념적인 것의 무속박성(unboundedness of the conceptual)'이라는 헤겔적 용어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바로 실재와의 마찰이다. (a) 우리가 ' 실재와의 마찰 '을 경험할 수 있다는 주장과 (b) 우리가 ' 사물 자체 '를 파악할 수 있다는 주장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맥도웰의 논증에서 핵심이다. 따라서 개념, 언어, 기표, 담론을 강조하는 철학자일수록 존재론적으로는 유물론적이고 자연주의적 입장을 지지하기 마련이다. 셀라스도, 로티도, 맥도웰도 존재론적으로는 모두 자연주의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6) 브라이언트는 물질적 환경에 대한 고찰에서부터 출발하여 우리가 갇혀 있는 '억압적 회집체'를 벗어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나는 이런 방안이 철학이 아니라 정말 개별 과학에서 탐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실 브라이언트가 이런 작업을 강조하기 전에도 이미 개별 과학은 알아서 이런 작업을 잘만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내가 보기에, 브라이언트가 "벵골보리수, 세쿼이아, 두족류 동물, 카피바라, 너구리, 완보동물, 미생물, 바이러스, 아마존 우림, 산호초, 그리고 지금까지 상상되지 않은 기술을 위하여" 『존재의 지도』라는 책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본인의 주장과 달리 얼마나 관념적이고 학술적이고 철학적인 사람인지를 잘 드러낸다. 정말 그런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억압적 회집체로부터의 탈출을 지향하고 있는 사람들은 애초에 이런 논의를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그 사람들은 그냥 자신의 작업을 묵묵히 수행하면서 해방적 실천을 수행할 뿐이다. 세상이 이미 그렇게 돌아가고 있고, 과학이 언제나 그런 실천을 수행해 왔는데, 새삼스럽게 그 실천이 이제서야 부각되고 있는 것처럼 외치는 것 자체가 사실 세상 돌아가는 속도에 발 맞추지 못하고 언제나 한 발 늦게 자기 위치를 깨닫는 철학자의 전형적인 모습일 뿐이다.

(7) 다만, 『존재의 지도』라는 책이 생각보다는 재미있다. 적어도 퀑탱 메이야수의 『유한성 이후』나 그레이엄 하먼의 『비유물론』보다는 흥미롭다. 브라이언트는 두 사람에 비해 자신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훨씬 더 정직하고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을 '기계'라는 은유로 바라본다면 세상이 어떻게 기술되겠는가? 브라이언트가 대답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이 질문이다. 자율성을 지닌 채 서로 결합되고, 분리되고, 확장되고, 수정되는 기계들의 회집체로 세상을 파악해 보자는 것이 '기계와 매체의 존재론'이다. 인간이 세상을 설계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비인간 행위자들이 상호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위상적 질서를 그려내 보자는 것이 '존재 지도학'이다. 나는 이런 형이상학적 기획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a) 이런 형이상학을 옹호하는 작업은 담론주의에 대한 비판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사실, (b) 이런 형이상학을 실제로 수행하는 작업은 철학보다는 개별 과학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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