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으로 형이상학을 대체하려는 시도: 들뢰즈-바디우-메이야수의 철학에 대한 단상

(1) 나는 들뢰즈-바디우-메이야수의 철학이 결국 일종의 '형이상학'이라고 생각한다. 각각은 '차이의 형이상학', '다수의 형이상학', '카오스의 형이상학'이라고 이름 붙여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철학은 기존 형이상학을 새로운 형이상학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일 뿐, 형이상학 자체를 벗어나려는 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2) 그러나 형이상학으로 형이상학을 대체하려는 시도는 자신의 철학 역시 결국 '형이상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기존 형이상학보다도 훨씬 완고한 형이상학으로 만든다. 성서에서 비유를 찾자면, '기존 형이상학'이라는 더러운 귀신이 나가자 '새로운 형이상학'이라는 더 악한 일곱 귀신이 들어온 꼴이다. 적어도 기존 형이상학은 자신이 경쟁하는 수많은 형이상학 중 하나라는 자각만큼은 분명하게 지니고 있었다.

(3) 사실, 형이상학 자체가 잘못인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형이상학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모든 종류의 고정된 실재를 남김 없이 부정하고자 하였던 헤겔조차 형이상학 없는 민족은 "가장 거룩한 것이 없는 속 비어 있는 사원"이자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은 사원"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들뢰즈-바디우-메이야수의 철학이 애초부터 자신을 '형이상학'이라고 선언하였다면, 나는 이쪽 진영의 입장을 훨씬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4) 문제는 자신이 수행하는 작업이 형이상학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기존 형이상학'과 '새로운 형이상학' 사이의 경쟁을 마치 '이데올로기'와 '실재' 사이의 경쟁인 것처럼 서술하는 태도가 오류의 근원이다. 모든 형이상학은 결국 특정한 언어를 사용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표현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부정한 채 특정한 형이상학만큼은 진리에 직접적으로 가닿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독단을 만들어낸다.

(5) '차이의 형이상학', '다수의 형이상학', '카오스의 형이상학'은 분명 재미있는 주장들을 제시한다. 기존 형이상학을 지배하던 '동일성', '하나', '필연성' 따위의 개념을 벗어던질 경우 세계가 어떻게 보이게 될 지를 기술하려는 시도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도 결국 자신이 미리 상정한 존재자의 목록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언어적 기술일 뿐이다. 근본에 이르러서는 기존 형이상학에 대한 새로운 형이상학의 비판이 일종의 '취향'과 '신앙'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6) 새로운 형이상학은 자신의 주장이 '취향'과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들뢰즈-바디우-메이야수의 철학을 움직이는 핵심 모티브 중 하나가 20세기 이후의 철학을 지배하는 '신앙주의(fideism)'의 경향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철학이 신앙을 넘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형이상학을 형이상학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만든다.

(7) 그러나 왜 철학이 신앙을 넘어서야 하는가? 나는 항상 이 문제에 대해 키에르케고어가 제시한 입장을 견지한다. 철학은 신앙을 넘어서고자 해서는 안 된다. 철학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다. 철학이 신앙을 넘어설 수 있다는 주장은 철학의 분수를 모르는 사람이나 하는 말이다. 키에르케고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나는 믿음[신앙]이란 하찮은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믿음은 최고의 것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철학이 믿음 대신에 그 자리에 다른 것을 앉히고 믿음을 깔본다는 것은 철학의 성실하지 못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믿음을 주지도 못하고, 또 주어서도 안 된다. 철학은 자기의 분수를 깨달아야만 하고,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고, 인간으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아서는 안 된다. 특히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인 듯이 속여서 인간으로부터 그 무엇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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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활세계에 대한 모든 설명은 궁극적으로 형이상학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형이상학을 넒게 보면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까지도 형이상학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물리학은 개념의 정합성 뿐만 아니라 현상을 설명하는 수리적 정합성을 증명 할 수 있는 수준까지 다룬다면, 철학은 경험적 검증이 가능한 영역을 넘어서는 부분까지 확대해서 논리적인 소설을 쓰고 우리는 그걸 형이상학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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