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철학이 '실재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은 도대체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 것인가? 메이야수, 하먼, 바스카, 가브리엘 같은 철학자들의 등장에 대해 종종 '실재론적 전회'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마다 생겨나는 의문이다. 오히려 나로서는 20세기 이후의 주류 철학에서 실재론이 아닌 입장을 찾기가 훨씬 더 힘들다.
가령, 현상학-해석학 전통은 기본적으로 일상 세계와의 소박한 실재론적 접촉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조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계자들 역시 "아무것도 숨겨지지 않았다."라는 표어 아래에서 우리가 이미 실재와 만나고 있다고 강조한다.
콰인은 도그마 없는 경험주의를 제시했고, 그 제자인 데이비슨은 자신의 정합론이 결국 '실재와의 직접적 접촉'으로 귀결된다고 지적했으며, 그 둘을 종합한 맥도웰은 우리의 개념이 실재와 무관하게 '진공 속에서 공회전'한다는 생각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퍼트남은 초기, 중기, 후기에 따라 철학적 견해의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언제나 실재론을 주장한 학자였다. 자연주의적 형이상학을 당연하게 전제하는 주류 영미권 분석철학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데리다와 함께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을 지휘한 인물이라고 알려진 로티 역시 개념 상대주의를 비판하며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옹호했다. 심지어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한 데리다조차 사실 텍스트 바깥쪽(실재)과 텍스트 안쪽(현상)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고 강조하여 자신의 철학이 반실재론으로 해석될 여지를 없앴다. 더밋을 제외하면 20세기 이후의 대가들 중에서 반실재론을 내세운 인물은 전무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현대철학이 실재론으로 되돌아가야 할 필요는 전혀 없어 보인다. 애초에 모든 사람이 이미 실재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미디어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낸 부정확한 이미지가 현대철학을 반실재론, 상대주의, 허무주의로 규정했을 뿐이다.
진정한 논쟁은 '어떤 실재론을 주장하는지'에 달려 있어야 한다. 단순히 '실재론인지 아닌지'는 전혀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실재론은 눈앞에 놓여 있는 사물에 대해 어떠한 의심도 제기하지 않는 '소박한 실재론'인가, 눈앞에 놓여 있는 사물 너머에 진정한 세계를 따로 상정하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인가, 자연과학에 대한 신뢰 위에 세워져 있는 '자연주의적 실재론'인가, 초월철학의 도식을 바탕으로 실재를 이야기하려 하는 '비판적 실재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