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는 분석철학자 아니었나요?

이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난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데리다가 애드리언 무어와의 논쟁에서 자기 자신을 '분석철학자'라고 규정하였던 부분이에요.

[W]hen you [A. Moore] were defining conceptual phIlosophy, or analytic philosophy as conceptual philos­ophy, I thought: well, that's what I am doing, that's exactly what I am trying to do. So: I am an analytic philosopher—a conceptual philosopher. I say this very seriously.

당신 [애드리언 무어]이 개념적 철학을 정의하였을 때, 혹은 분석철학을 개념적 철학으로 정의하였을 때, 나는 생각했죠. '글쎄, 그건 바로 내가 하고 있는 것이고, 정확히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인데?' 그래서 나는 분석철학자—개념적 철학자—입니다. 나는 이것을 매우 진지하게 말하고 있어요.

J. Derrida, "Response to Moore", Arguing with Derrida, S. Glendinning (ed.), Blackwell Publishers, 2001, p. 83, my emphasis.

저는 이런 데리다의 주장이 (데리다 본인이 강조한 것처럼) 결코 농담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분석철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애드리언 무어가 이 글의 초반에 이야기한 것처럼 '분석철학'이 '개념적 철학'이고, '개념적 철학'이 진리를 발견하기보다는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개념들에 주목하는 철학이라면, 데리다는 정말로 바로 그 정확한 의미에서 '분석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의/기표', '순수/비순수', '현상/실재' 같은 개념들이 어떻게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지, 그리고 그 곤혹스러움을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가 데리다의 주된 논의니까요. 실제로,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사무엘 휠러 3세는 『분석철학으로서의 해체(Deconstruction as Analytic Philosophy)』라는 책을 쓰기도 했죠.

5개의 좋아요

저는 반농반진으로 ‘데리다는 정말 명료하고, 분석철학의 일원이라고 봐도 되는 진짜 철학자’라고 말하곤 합니다. 데리다의 기대와 반대되는 평가이리라고 생각하긴 합니다(?) — 데리다는 농담으로 저렇게 말한 것 같아서요.

3개의 좋아요

1992 년 초, 케임브리지대 선거(Grace) 위원회가 자크 데리다에게 명예 Doctor of Letters를 수여하자는 안건을 상정했습니다. 전통에 따라 학내 구성원이 찬·반을 표로 밝히는 투표가 5 월 16 일 열렸고, 결과는 찬성 336 : 반대 204로 가결되었습니다.

투표 직전인 5 월 9 일, 18 명의 저명한 분석철학자들이 《타임스》에 공개서한 〈Derrida degree: A Question of Honour〉를 발표하며 수여 철회를 요구했습니다. 편지가 문제 삼은 핵심은 “명료성과 엄밀성 부족, “다다이즘적 ‘tricks and gimmicks’” 등이었습니다.

서명에는 나서지 않았지만, 이미 1970 년대 후반부터 데리다와 격렬한 언어행위론*논쟁을 벌였던 존 설은, 캠브리지 내부·외부 토론에서 반대표 논리를 대표했습니다.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데리다의 글을 “철학이 아니다… 무의미한 수사”라고 직설적으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성사에서 데리다의 위치가 될 것 같아보입니다만,

여기서 제 생각을 덧붙이자면, 이 캠브릿지 논쟁은은 J.L 오스틴을 두고 존 설과의 논쟁에서 데리다의 <Limited Inc a b c…> 가 존 설을 너무 긁었지 않나 싶습니다.

기존에 학문하는 사람의 태도의 想이 있을텐데, 이 想에서 데리다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데리다 입장에서는 필요하다고 생각한 언어유희가, 존 설에게는 말장난으로 논제와 어긋나는 학문적 ADHD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데리다 또한 존 설류의 분석 철학을 Limited InK = 잉크가 정해져있듯 한정된 말을 반복하는 철학이라는 늬앙스로 비꼬았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그런 Limited InK 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저는 데리다가 왜 이런 글을 썼을까에 대해서 고민해봤는데, 데리다가 보기에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만들어놓은 세계를 편집하고 조작하며 그 체계를 자기지시적으로 답습하는 집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답습은, 타자의 발언은 이미 죽은 것이고 자신의 철학에 꿰어 맞추는 역할만 한다고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데리다 중심을 이탈하려는 작업은, 타자의 응답 가능성을 열어두라는 학문적인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자 니들이 뭔데 중요한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중심과 주변을 나누어? "

존 설이 데리다에게, "가상/연극/농담" 과 같은 것들은 오스틴의 분석 범주 밖이야 라고 하는 주장은 데리다가 보기에, 그런식으로 다 짜깁기 하다보면 도대체 무얼 다룰 수 있냐는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었겠죠.

궁극적으로, 데리다는, 데리다 표현을 빌리자면, Limited InKer 가 아닌, 개념의 분석을 통해서 타자의 응답 가능성대화의 조건의 책임을 선언하는, 윤리학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업을 이런 노선으로 이해하다보면, 뒤에 레비나스와 만나게 되는 후기 철학이 이해가 되더라구요.

6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