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영향력은 왜 쇠락하였는가?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아주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였습니다. 이탈리아 토리노대학교에서 철학사를 가르치는 파올로 트리포디(Paolo Tripodi)가 쓴 Analytic Philosophy and the Later Wittgensteinian Tradition이라는 책입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지닌 영향력이 1970년 이후로 분석철학계에서 점점 쇠퇴하게 되는 과정을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네요. "From the Golden Age to the Decline"이라는 제목을 지닌 제1장을 읽어보았는데, 굉장히 흥미진진합니다. 역사가의 관점에서 쓰인 책이다 보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연구자들의 시대별 증언은 물론이고, 비트겐슈타인 인용 지수나 비트겐슈타인 관련 출판물의 양 같은 통계 자료를 가지고서도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부흥과 쇠퇴를 아주 상세하게 묘사하더라고요.

저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분석철학계에서 더 이상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항상 아주 의아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일종의 '후기 비트겐슈타인주의적' 관점의 철학을 선호하기 때문에 편향적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로서는 70년대 이후의 철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명확하게 '극복'되었다고 할 만한 이유나 사건을 알고 있지 못해서요.

물론, 콰인의 "On What There Is"을 통해 존재론적 개입 기준에 근거하여 형이상학을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났고, 루이스와 크립키를 통해 양상논리의 의미론과 가능세계 형이상학이 제시되자,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이 분석철학 내부에서 다시 크게 일어났기는 했죠. 소위 '분석적 형이상학'이라는 명칭이 생겨났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저로서는 과연 이런 사조들이 정말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정당하게 비판하고 극복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무시한 것인지에 대해 잘 확신이 서지 않아요. 분석적 형이상학의 지지자들과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 사이의 뚜렷한 '논쟁'이나 '대결'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아서요.

트리포디는 후기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쇠퇴가 철학 내적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회학적 이유 때문이라고 보네요. 물론, 트리포디 스스로 자신의 책을 철저한 '철학사 책'으로 규정하고 있다 보니, 개별 철학의 이론이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평가보다는 그 철학들이 생겨난 역사적 맥락과 사회학적 환경에 더 주목할 수밖에 없는 방법론상의 제약이 있는 것 같기는 해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트리포디는 그런 사회학적 환경이 결코 손쉽게 무시되기 어렵다는 점과, 철학의 논의를 추동하는 힘이 실제로는 논증보다는 다른 외적 요인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네요.

"이 책은 철두철미하게 철학사 책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논의되고, 바라건대, 부분적으로 설명되는 역사적-철학적 현상은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측면을 지니고 있어서, 넓은 의미에서, 관념사, 지성사, 지식사회학으로부터 빌려온 여러 가지 관점들의 뒷받침을 필요로한다. 요점은 철학적 논증들이 그 논증들의 결론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논증도 결론도 철학적 성공이나 실패를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참된 관념들의 내재적 힘'은, 관심, 편견, 열정의 형태로, 모든 영역으로부터 끊임없이 저항에 직면하기 때문이다."(Bourdieu 1999: 220). 사회적 메커니즘과 광범위하게 문화적인 조건들은, 비록 종종 세부사항을 이해하기는 어렵더라도, 간과하기 어려운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이 책은 방법론적으로 매우 포괄적이며, 종종 (개념 분석, 합리적 재구성, 역사적 맥락에 대한 조사 같은) 철학사의 전통적 방법을 다양한 종류 (질적이고 양적인) 사회학적 도구와 개념과, 경제사로부터 빌려온 (특별히 아날 학파에 속하는) 범주들과, 프랑코 모레티에 의해 수십 년 전에 문학사로 도입된, 소위 '멀리서 읽기 방법(distant reading method)'과 결합시킨다(Bloor 1976; Braudel 1980/1997; Bourdieu 1984a; Kusch 1995, 2000; Wallerstein 2000; Moretti 2005, 2013)."(Tripodi, 2020: 3)

"[…] 이 책은 [철학사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이 아니며, 철학사 속 추동적 힘이 가장 우선적으로 철학적 논증이라는, 분석철학자들에게 종종 수용되고 심지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관점에 대해 비판적이다. 이 책은 추동적 힘이 논증의 표면 아래에서, 포괄적으로 문화적이고 심지어 사회적인 층위에서 작동한다는 관점에 공감한다(예를 들어, Bourdieu 1984a, 1999; Bloor 1976; Kusch 1995). 이 책은 개별 사례 연구를 통해, [다시 말해] 분석철학의 역사 속 비트겐슈타인의 쇠락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러한 관점의 타당성을 보여주거나 아마도 단순히 제시하기 위한 시도로서 여겨질 수 있다."(Tripodi, 2020: 21)

아직 제1장밖에 읽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트리포디가 어떤 문화적 혹은 사회학적 요인이 후기 비트겐슈타인 전통의 쇠락을 불러일으켰다고 주장하는지는 명확하게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제1장 내용 중 한 가지 흥미로웠던 것은, 비트겐슈타인과 그 제자들이 후속 세대를 키워내는 데 그다지 성공하지 못하였다는 내용이었어요.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앤스콤, A. C. 잭슨, 개스킹, 굿스타인이라는 네 명의 직계 제자가 있었고, 그로부터 나온 115명의 '제자의 제자'가 있긴 하였지만, 실제로 그들 중 상당수는 '비비트겐슈타인적 분석철학자(non-Wittgensteinian analytic philosophers)'라는 사실입니다.

가령, 노먼 말콤을 비트겐슈타인의 직계 제자 목록에 추가로 포함시킨다고 하더라도, 말콤이 지도한 70명의 학생들 중 47명은 시드니 슈메이커를 자신들의 '선조(forefather)'로 여긴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과 단절되어 있다네요. 또한, 폰 라이트의 가장 유명한 제자인 야코 힌티카도 비트겐슈타인 정통과는 거리가 있고요. 앤스콤의 세 제자인 앤서니 케니, 필리파 풋, 마이클 더밋 중에서, 마지막 두 사람이 키워낸 37명의 학생들도 상당수가 '비트겐슈타인주의적'이라고 하기는 어렵다고 하네요.

콰인에게 247명의 제자가 있었고 그 중에 도널드 데이비슨, 데이비드 루이스, 길버트 하만 같은 후속 세대를 선도하는 인물들이 나왔던 것에 비교해 보면, 비트겐슈타인과 그 직계 자제들로부터 '정통 비트겐슈타인주의자'라고 할 만한 인물들은 100명도 채 나오지 못했다고 하네요. 이와 관련해서 예전에 이승종 교수님이 하신 이야기가 생각나더라고요. 이승종 교수님께도 "비트겐슈타인의 영향력은 왜 쇠락하였는가?"라는 일련의 질문을 드린 적이 있거든요.

윤유석: 오늘날의 철학자들 중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계승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주목할 만한 철학자로는 누가 있나요?

이승종: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없습니다. 탁월한 후계자를 만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여전히 고독한 철학자인 것 같습니다.

(이승종 & 윤유석, 『철학의 길: 대화의 해석학을 향하여』, 세창출판사, 2024, 143쪽.)

오늘 대학원 논리철학 수업을 청강하러 갔다가 주변의 다른 대학원생들에게도 "왜 오늘날 분석철학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나?"라는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한 분은 논리철학과 존재론을 전공하시는 박사과정생이신데, 이렇게 대답해 주시더라고요.

H: 비트겐슈타인이 잊혀졌다고 할 수 있나요? 다른 사조들에 포섭되는 방식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닌가요?

: 가령, [메타존재론에서의] 카르납주의 같은 사조에 비트겐슈타인이 들어갔다는 거죠?

H: 반드시 카르납주의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비트겐슈타인은 항상 "비트겐슈타인과 XXX"이라는 방식으로 언급되잖아요. "비트겐슈타인과 논리실증주의" 같은 방식으로 말이에요. 그렇게 비교되다 보니, 좀 더 일반적인 사조 속에서 함께 이해되는 게 아닌가 해요.

: 말씀하신 논리실증주의와 비트겐슈타인의 경우에는 사실 차이가 상당히 큰데, 철학사에서는 종종 그렇게 묶이곤 하죠.

H: 그렇지만 그렇게 안 묶으면 비트겐슈타인만 단독으로 인용하기는 어렵잖아요. 워낙 글을 특이하게 쓰니까요.

: 하긴, 예전에 서강대 김영건 교수님도 그러셨죠. 비트겐슈타인의 글들은 너무 파편적이라, 비트겐슈타인으로는 수업을 진행하기가 어렵다고요.

석사에서 맥도웰을 전공한 또 다른 분은 트리포디와 비슷한 견해를 이야기해 주시더라고요.

J: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왜 쇠퇴하였는지에 대해 사실 별로 관심이 없어요. 특별히 철학적인 이유가 있어서 비트겐슈타인이 쇠퇴했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일종의 정치적인 변화 때문에 무시당한 거겠죠. 예일대학교에서 한때 대륙철학 전공자들을 교수로 전혀 뽑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대륙철학 같은 것은 철학도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비트겐슈타인의 쇠퇴도 비슷한 이유겠죠.

여하튼, 후기 비트겐슈타인주의적 철학을 옹호하는 저에게는 "비트겐슈타인의 영향력은 왜 쇠락하였는가?"라는 물음이 참 관심이 많이 가는 물음이라 앞으로 이 책을 좀 집중적으로 읽어보게 될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트리포디가 '역사학적' 관점에서 쇠퇴의 원인을 추적하였다면, 저는 좀 더 '철학적'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싶긴 하지만요. 과연 후기 비트겐슈타인주의적인 철학으로부터 오늘날 존재론이나 인식론이나 윤리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가능성은 정말로 막혀 있는 것인지, 저로서는 제 자신의 대답을 구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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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학부 때부터 지금까지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만, 제가 들어온 비트겐슈타인의 영향력에 대한 설명이 대체로 선생님 글에 다 들어있네요.

(1) 비트겐슈타인의 주목할만한 아이디어는 상당 부분 반영되어 계승되었다.
(2) 비트겐슈타인주의적 어프로치를 체계적이고 확장적으로 발전시킨 후대의 논의가 주목 받지 못했거나 주목할 만한 것이 없었다.
(3) 비트겐슈타인의 논의가 철학적으로 논박되었다기 보다는 사회적인 영향력으로 무대에서 사라진 것에 가깝다.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철학이 무언가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는 실질적 지식(substantial knowledge) 혹은 다른 여타의 학문들처럼 모종의 이해를 재고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라면, 새로운 발견이나 체계적인 이해를 제시하지 못하는 방법론은 쇠퇴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방법론이 논박되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흥미로운 결과를 내지 못하기 때문이어서 말이죠. (결정적으로 논박되는 철학적 이론이 없다는 건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데이빗 루이스도 철학적 이론은 넉다운 논증으로 논박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게티어와 괴델의 경우를 예외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 점에서 만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유산이 실질적 지식을 생산하지 못했고, 그 유산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는 후대 연구자가 없었다면 역사의 무대에서 잠시 묻혀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 자체가 철학이 여타의 학문들처럼 실질적 지식이나 현상에 대한 이해를 제공해야 한다는 특정한 메타철학적인 관점을 전제하는 평가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한물 갔지'라는 말은 불공평한 평가이겠지요. 평가 대상에게 원초적으로 불리한 평가기준으로 평가를 하고 있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글쎄요. 저는 '철학은 뭐가 그렇게 다른데?'라는 질문에 여전히 '글쎄, 본질적으로 다를까?'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래서 『철학의 길』 1강에서 철학에 대한 관점에 대한 간략한 대담은 저에게는 신선한 편에 가까웠습니다.) 철학적 지식(philosophical knowledge)의 본성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도 떠오르네요.

과연 후기 비트겐슈타인주의적인 철학으로부터 오늘날 존재론이나 인식론이나 윤리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가능성은 정말로 막혀 있는 것인지, 저로서는 제 자신의 대답을 구해보고 싶네요.

소견으로는 비트겐슈타인주의적인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에 다시 조명되는 근대철학자의 가능성이 열려 있듯이 말이죠. 다만 그것을 통해 하고자 하는 작업이 설명인지, 아니면 뭔가 그것과는 다른 독특한 철학적인 지향점인지에 따라 평가가 어느정도 갈리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적인 영향력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거기에 더해, '철학에 지식의 확장은 얼마나 중요한가?', '철학적 지식이란 것은 무엇인가?'와 같은 메타철학적 질문과 함께 '이 작업은 우리에게 그런 종류의 지식의 확장을 가져오는가?'라는 평가적인 질문이 함께 개입할 때 메타철학적인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다르게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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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가는 부분이 많네요. 특히 @Raccoon 님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첨언하자면 비트겐슈타인이 고독해진 것은 1차적으로는 그의 성격때문이지 않았나 싶네요.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하더라도, 비트겐슈타인이 인간관계에서 '강단철학자'들을 선호하지 않았고, 또 얼마 없는 철학자 친구들에게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려 하지도 않았으니 말이에요. (애초에 '가르친다' 내지는 '체계적 교수법'에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도 했고요)

그의 철학하는 스타일도 비슷한 경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탐구』를 결과적으로 미완성작으로 남기는 등 체계적인 저작을 남기지 못한 건 카를 크라우스/오토 바이닝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의 신념과 성격 때문일 개연성이 크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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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의 고견이 궁금해 학부생의 졸견을 남겨봅니다.

저 역시 비트겐슈타인이 이토록 주목받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해 언어철학 선생님께 의견을 여쭤봤고, 비트겐슈타인 및 그의 학문적 후예들은 현재로서는 최선의 의미론이라 할 수 있는 형식 의미론/가능세계 의미론에 크게 기여한 바가 없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특히나 선생님께서는 합성성 원리와 양상 표현의 의미에 대해 추론주의 의미론 등 대안적 의미론들의 설명력이 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표상의 언어에서 추론의 언어로 』를 읽은 것을 제외한다면 추론주의 의미론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이에 대해 명확한 의견이 있지는 않습니다만... 개인적으로 러셀과 프레게부터 제기되어온 언어철학의 문제들에 대해 비트겐슈타인과 그 후예들이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대다수의 학자들은 절대적 정답이 있기를 바라며 학문을 하는데, 가능세계/표상/지시 등의 개념을 활용하는 방법론이 상대적으로 그런 바람에 더 잘 부합한다는 게 제 뇌피셜입니다.

한편으로는 서강올빼미에서도 여러 번 다뤄졌던 해소 대 해결의 구도 역시 유의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꼭 학자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은 절대적 진리와 가치 등이 있다는 직관을 가지는 것 같은데, 해소하기는 그런 직관에 잘 부합하지 않는 듯 합니다.

아는 게 없으니 글이 전체적으로 불분명한데, 많은 지적과 의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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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합니다.

(1) 비트겐슈타인적 의미론의 설명력이 떨어지는가?

합성성의 원리에 근거한 비판은 포도어와 르포어가 "Brandom’s Burdens: Compositionality and Inferentialism"(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Vol. 63, No. 2, 2001.)라는 논문에서 브랜덤에게 제기하는 것이에요. 양상 표현의 의미론의 관점에서 제시되는 비판은 주로 크립키 계열의 철학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고요. 그런데 과연 이러한 비판들이 추론주의를 비롯한 일종의 '비트겐슈타인주의적' 의미론을 성공적으로 논박한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가 어려워요. SEP의 '합성성(Compositionality)' 항목에도 나오듯이, 애초에 합성성의 원리 자체를 거부하는 철학자들도 많을 뿐더러, 몇 달 전 서강올빼미에 양상 성향주의 하계 워크샵 공고에도 올라온 것처럼 가능세계를 통해 양상 표현의 의미론을 제시하려는 시도들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는 하거든요.

또한, 추론주의적 관점에서 이 문제들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고, 더 나아가 추론주의적 관점에서 기존 의미론의 한계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을 제시하는 입장들도 많아요. 표상주의적 의미론에서 추론주의적 의미론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론주의적 의미론에서도 자신에게 제기되는 비판에 대한 적극적 대응과 함께, 표상주의 의미론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는 거죠. 대표적으로, 작년에 서산신진철학자상을 받으신 성균관대학교 박성수 선생님의 논문이 이렇듯 추론주의적 관점에서 기존 의미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다루어요.

본 논문의 목표는 브랜덤, 셀라스, 페레그린, 이병덕에 의해 제시되고 발전되어 온 추론주의 의미론(inferential semantics)을 옹호하는 것이다. 한 이론을 옹호하는 작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옹호하려는 이론에 문제가 되는 부분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거나, 제기되는 비판들에 답하는 종류의 작업이다. 즉, 우리는 어떤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해당 이론의 내적 타당성을 보이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옹호하려는 이론이 다른 이론들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보이는 종류의 작업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해당 이론이 지니는 이론적 우위성들을 보이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논문을 통해 필자가 성취하려고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두 번째 종류의 작업과 관련된다. 이는 필자의 작업을 기존의 작업들과 구분 짓는다. 추론주의 의미론과 관련된 이전의 작업들은 주로 의미에 대한 추론주의적 접근 방식이 의미를 규명하는 하나의 이론으로 확립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식시키는 데 집중해왔다. 브랜덤, 셀라스, 이병덕, 페레그린이 의미 불안정성, 게리멘더링, 의미의 조합성, 퇴행의 문제 등에 답하려고 해왔던 시도들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들이다.

본 논문은 추론주의 의미론에 대한 기존 작업들의 성과에 기대어 추론주의 의미론이 내적으로 타당한 의미론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뒤 이러한 의미론이 여타 다른 의미론들에 비해 갖는 이론적 우위를 보임으로써 추론주의 의미론을 옹호할 것이다. 물론, 단 한 번의 작업으로 추론주의 의미론을 전적인 대안 이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해 단지 추론주의 의미론이 다른 의미론들에 비해 몇몇 유망한 측면들을 갖는다는 것을 보이는 데서 만족할 것이다.

(박성수, 「의미에 대한 추론주의적 접근 방식 옹호」, 성균관대학교: 박사논문, 2022, 1쪽.)

https://dcollection.skku.edu/public_resource/pdf/000000170638_20240914152652.pdf

그래서 저로서는 추론주의 의미론이 "설명력이 떨어진다"와 같은 주장에 연구자 각각의 철학적 관점이 깊게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표상주의 의미론이 결정적으로 승리를 거둘만한 '낙다운 논증(knock-down argument)'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힘든 거죠. 물론, 둘 중 더 널리 받아들여지는 쪽은 표상주의 의미론이겠지만, 이런 세분화되고 전문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단순히 '다수결'로 특정 이론의 우위성을 말하기는 힘들 거예요. 철학적 논쟁의 결론이 투표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2) 비트겐슈타인이 의미론을 제시해야 하는가?

더욱 쟁점이 되는 부분은, 애초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의미론을 거부한다는 점이에요. 문장이 참이 되는 조건를 일반화하여 제시해야 한다는 철학적 관점 자체야말로 비트겐슈타인이 논박하고자 하는 대상이라는 거죠. 이런 식의 의미론은 마치 '사용'과 '사용의 조건'을 서로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나누어 놓는 나머지, "나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내 언어 사용의 조건을 모를 수도 있다." 혹은 "나는 언어 사용의 조건은 알지만 언어를 사용하지는 못한다." 같은 주장이 유의미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정한 채 시작한다는 거죠. 그렇지만, 바로 이런 식의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요점이에요. 언어와 언어 사용의 조건을 분리시키는 사람은, 마치 "나는 덧셈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만(덧셈의 조건은 이해하지만) 덧셈 문제는 전혀 풀지 못한다(덧셈을 사용하지는 못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사실 일종의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다는 거예요. 덧셈을 이해한다는 것과 덧셈 문제를 푼다는 것은 서로 별개의 상황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애초에 비트겐슈타인에게 '의미론'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논점을 일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론'이라는 기획이 사용과 사용의 조건을 분리시키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모든 종류의 의미론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니까요. 표상주의적 의미론이든지 추론주의적 의미론이든지, 의미론의 기획 자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요지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비트겐슈타인에게 "너의 새로운 의미론을 제시하라."라고 요구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죠. 이 점이 제가 몇 년 전에 「사용 이론과 회의주의를 넘어서: 비트겐슈타인의 정적주의」(『철학논집』, 제69권, 2022, 143-178쪽.)라는 논문에서 제시한 비트겐슈타인 해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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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덤의) 추론주의가 비트겐슈타인의 사용이론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적"이다 라는 것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지만, 이 "비트겐슈타인적"이라는 타이틀이 추론주의자들에게만 배타적으로 계승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긴 합니다. 가령 흔히 진리조건 의미론이 사용이론의 경쟁자로 여겨지는 배경에 대해 데이빗슨은 이것이 혼동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Meaning, it is frequently said, has to do rather with the conditions under which it is justified or proper to use a sentence to make an assertion; in general, meaning has to do with how sentences are used rather than with their truth conditions. Here I sense two confusions. The first is that truth-conditional and use accounts of meaning are somehow in competition. [...] What is clear is that someone who knows under what conditions a sentence would be true understands that sentence, and if the sentence has a truth value (true, false or perhaps neither), then someone who does not know under what conditions it would be true doesn’t understand it. This simple claim doesn’t rule out an account of meaning which holds that sentences mean what they do because of how they are used; it may be that they are used as they are because of their truth conditions, and they have the truth conditions they do because of how they are used.
The second confusion is the thought that there is a simple, direct, non-question-begging way to employ ‘‘uses’’ to provide a theory of meaning. There is not. It is empty to say meaning is use unless we specify what use we have in mind, and when we do specify, in a way that helps with meaning, we find ourselves going in a circle. Nevertheless, it is only by registering how a language is used that we can make it our own. [...] What is clear is that we can say the child thinks something is red, or a ball, only if it appreciates the distinction between the judgment and the truth for itself: the child thinks something is red or a ball only if it is in some sense aware that a mistake is possible. The child is classifying things, and it knows it may have put something in the wrong slot. <Truth Rehabilitated, 1997>

데이빗슨의 핵심은, 진리조건 의미론이 비트겐슈타인의 사용이론과 배치되기는커녕 오히려 언어사용에 대한 비순환적 설명을 제시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은 또한 @YOUN 님의 서술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의 영향력은 왜 쇠락하였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해보자면, 사실 비트겐슈타인의 영향력 자체가 시들해졌다기 보다는, 여러가지 경쟁하는 이론들이 모두 스스로 비트겐슈타인의 통찰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제가 보기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가령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의미는 언어사용에 있다"라는 테제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이론은 거의 없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모든 이론들이 스스로 비트겐슈타인과 배치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태에서라면, 어떤 이론이 더 "비트겐슈타인적"인가를 따지기 보다는, 어떤 이론이 더 설명력이 있는가를 따지게 되는 것이죠.

YOUN 님도 잘 아시는 맥도웰의 예시를 들 수도 있겠습니다. 비트겐슈타인과 셀라스를 (브랜덤만큼이나) 사랑하는 맥도웰은, 진리조건 의미론과 추론주의의 대립에 있어서 적어도 이 전장에서는 타르스키, 데이빗슨이 맞고 셀라스, 로티, 브랜덤이 틀렸으며, 전자가 오히려 더 비트겐슈타인적이고 후자는 비트겐슈타인을 오독하고 있다고 말하죠. 이렇게 본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어디에나 있고" 바로 이 편재성 때문에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무게가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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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Herb 님의 이 답은, 어쩌면

모두가 올바른 이해임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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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표현 L의 의미는 L과 관련된 추론 규칙들 그 자체이다"라는 주장은 '의미론적' 추론주의이며, "L의 의미는 추론 규칙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은 '메타의미론적' 추론주의라고 하더군요. (Incurvati&Schloder, [reasoning with attitude] p.41 참고) 지칭주의 이론은 의미론적 추론주의와는 양립이 어렵지만 메타의미적 추론주의와는 충분히 양립가능하다고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비트겐슈타인이 글을 명료하게 쓰지 못해서 학자들이 덜 읽게 돼, 직접적인 영향력을 많이 잃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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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걸 보고 이 짤이 바로 떠오르네요! 아마 레이몽크 트위터에서 주운걸로 기억해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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