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주의적 사르트르 해석에 대한 단상

McNulty, J. (2024). Bad faith as true contradiction: On the dialetheist interpretation of Sartre.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pp. 1-22.

맥널티는 '나쁜 신념'(bad faith)에 대한 사르트르의 역설적 정식화를 무모순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을 비판하고, 나쁜 믿음이 참된 모순 혹은 양진문장(dialetheia)의 구조를 띤다는 브라운(N. Brown)의 해석을 수정하여 옹호한다. 맥널티에 의하면, 나쁜 신념은 자기기만의 특수한 한 종류로서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와 같은 형식을 띠는 믿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 속에서 드러난다. 나쁜 신념을 지닌 의식은 자신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연언지 중 한 쪽을 부정하고 다른 한 쪽만을 받아들이고자 시도하는데, 의식은 이러한 시도 가운데 다시 양진적인 믿음을 승인해야 한다는 모순에 빠진다. 이처럼 모순을 피함으로써 또 다른 모순에 맞닥뜨리는 나쁜 신념의 순환은 내가 나이면서 내가 아니라는 모순을 받아들임으로써 해결된다. 나쁜 믿음은 대자존재인 의식이 사실성(facticity)와 초월성(transcendence)이라는 모순적인 상황에 동시에 처해 있다는 의식의 근본적인 상태를 드러내주는 현상이다. 나쁜 신념에 빠지든 나쁜 신념을 극복하든, 우리는 인간적 실재가 지닌 구조로 인해 모순에 빠지게 된다. 모순을 피하려다 모순에 맞닥뜨리거나, 모순을 끌어안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만이 있는 셈이다.

나쁜 신념에 대한 사르트르의 역설적인 정식화를 보다 무모순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해석들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러한 해석은 인간 실존의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상황을 강조하고 극대화하는 효과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를 양진주의자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여러 문제에 맞닥뜨린다.

첫째, 사르트르가 모순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이론을 붕괴시켰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양진주의자들이 폭발 논증(ex contradictione sequitur quodlibet)을 피하기 위해 고전 논리 체계에 가하는 선언지 제거 규칙 부정 등의 여러 조작들까지도 사르트르에 귀속시켜야 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수정된 비고전 논리 체계들까지 사르트르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해석적으로 과도하며 정당화되기 어려워 보인다.

둘째, 양진문장은 그러한 문장의 양진성을 주장하는 논리 체계 자체에도 증식하는 문제를 지닌다. 예컨대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가 참이면서 거짓이라면,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는 참이다" 역시 양진문장이고,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는 거짓이다" 역시 양진문장이다. 그렇다면 양자의 연언적 결합인 "'나는 나이면서 내가 아니다'는 참이면서 거짓이다" 역시 양진문장이다. 결국 사르트르가 양진주의자라면, 그가 대상으로 삼는 의식 현상의 층위뿐만이 아니라 그의 이론 자체의 층위에서도 양진문장이 발생하게 된다.

과연 이러한 철학적 부담을 부당하게 사르트르에게 지우지 않으면서도 나쁜 신념에 대한 사르트르의 역설적 정식화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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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맥널티 자신의 주장인가요? 사르트르가 ‘부조리‘라는 개념을 아주 전면에서 강조하는지 조금 의문스러워서요. 오히려 카뮈가 부조리를 중심으로 자기 철학을 제시하는데, 이때 부조리는 굳이 양진주의로 해석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인간이 원하는 것과 세계가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 사이에 균열이 있다는 것이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거든요. 가령,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다.“와 “그러나 세계는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사이의 간극이 부조리이다 보니, 이 두 가지 사이의 관계가 엄밀한 의미에서 형식논리적 모순 관계라고 보기는 어렵지 않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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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부조리"라는 용어는 제가 임의로 집어넣은 용어입니다. 더구나 카뮈가 주장하는 부조리가 단순히 인간이 원하는 바와 실재 세계 사이의 간극이라면 제 용어 선택이 좀 문제가 있었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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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사르트르도 '부조리'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하긴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카뮈만큼 자기 철학에서 그 개념을 강조하지는 않는 것으로 알아요. 이번 기회에 찾아 보니, 사르트르와 카뮈의 부조리 개념을 비교한 논문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 논문도 주로 카뮈의 『이방인』에 나타난 부조리 개념에 대한 사르트르의 반응을 다루면서, 사르트르와 카뮈가 그 개념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더라고요. 사르트르에게 부조리는 세계에 대한 참여 '실패'를 의미하는 반면, 카뮈에게 부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좀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현실이 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철학적 '성공'을 의미한다면서요.

For Sartre, the absurd is a breakdown of one’s engagement with the world, a kind of theoretical and practical failure. For Camus, the absurd is a way of being clear-eyed about reality and is thus a kind of philosophical success. (Hannah, 202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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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도 부조리를 강조하지 않나요? 특히나 '거짓 믿음(bad faith)' 개념이 등장하는 맥락을 알기 위해서는 부조리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물론 저는 <존재와 무>를 비롯한 대표저작을 실제로 읽어본 것은 아니라 정확하지 않아요.

제가 이해하는 바는 맥널티의 이해와 유사한 것 같은데 대강 이래요.

사르트르에게 나의 자유와 자유로운 선택은 가치의 유일한 토대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나의 선택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의 선택이 토대 없는 것임을, 근거가 없고 무상적임을 깨닫는다. 결과적으로 내가 내리는 어떤 선택은 중요하고 다른 어떤 선택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맥락에서 부조리 개념이 등장하는데, 정당화가 불가능한 느낌, 내가 어떤 선택을 헀거나 할 수 있었던 간에 그 선택이 다른 대안 선택보다 더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된 인간은 부조리를 느낀다. 나아가 이 부조리를 느낀 인간은 자신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가 자유롭다는 믿음이 거짓이라고 자기 기만한다. 즉, 우리는 스스로가 사람(대자존재)이 아닌 사물(즉자존재)라는 거짓 믿음(bad faith)를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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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존재와 무』는 부분적으로만 읽어 보았고,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같은 짤막한 글들만 찾아보았기 때문에 사르트르의 철학의 '전모'를 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 내용은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부조리'보다는 '불안'이라는 개념으로 더 자주 표현되는 것이 아닌가 해요. 우리의 의식이란 아무런 내용으로도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무'이고, 그 의식은 세계의 존재 구조를 끊임없이 '무화'시켜나가는 활동을 수행하고, 그래서 이 사실을 자각한 우리는 어떤 것도 우리 삶을 지탱하는 토대가 될 수 없다는 점에 대해 '불안'을 느낀다고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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