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성) 들뢰즈와 짧은 동영상(Shorts) '넘김'의 무기력 (1)

마음 가는 대로 들뢰즈에 관한 글 한편을 절반 정도 써봤는데, 조언을 받을 다른 곳이 없어서 여기에라도 올려봅니다. 참고문헌 목록이나 주석도 아직 더하지 못했고 글도 초고일 뿐이지만 조언 부탁드립니다.


들뢰즈와 Shorts '넘김'의 무기력 - 현대 사회의 무기력증에서 기쁨으로 해방하기 (1)

  1. 들어가며
    현대 사회는 짧음의 사회다. 긴 호흡보다는 짧은 편리함이 선호되는 것은 사회 기술발전의 당연한 수순일 지도 모르겠거니와, 그것이 현대인에게 가져오는 파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기술발전 덕에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 여기서 긴 호흡으로의 낡은 회귀는 불필요해 보인다. 실로 우리는 SNS의 시대에 살아가면서, 더 이상 긴 호흡과 많은 양과 깊은 질의 정보 소화를 필요로 하는 미디어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음을 체감할 수 있다. 틱톡의 세로 동영상에서 시작해 각종 SNS에 전파된 이른바 '짧은 동영상'은 현대인 무기력의 징표다. 더 이상 사유의 시간은 도외시되고, '떠먹어주는' 얕은 정보들이나 시간 때우기용 영상들이 '힐링(healing)'이라는 이름 하에 현대인의 기력을 조금씩 죽여 가고(killing)있는 상황이다. 이런 곳에서 우리에게는 재생산만이 남아 있는 듯 보이며, 창조는 언제나 무기력과 동일성에 오염되어 있는 듯하다. 질 들뢰즈에 따르면,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새로움(차이)를 창조해야만 한다. "다양, 우리는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MP 1) 어쩌면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이 우리를 무기력에서 구출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글에서 들뢰즈 철학에 기반해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이 '짧은 동영상'을 중심으로 "진단"하고, 그것에 대한 대안 및 해결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그것의 진행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필자는 질 들뢰즈의 철학을 그의 차이 개념을 중심으로 짧게 개괄하고(2), 짧은 동영상에 관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넘김"개념과 함께 제시할 것이다(3). 그리고 들뢰즈의 관점에서 그 문제를 처방하고(4),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들에 관해 시사하며 글을 마칠 것이다(5).

  2. 들뢰즈, 차이의 철학자
    우리는 실로 계속해서 같은 것을 재생산한다. 예컨대 상품은 언제나 정확히 동일한 그것으로 재생산되며, SNS에서는 하나의 동일한 테마 및 유행이 모습을 달리하여 다시 눈 앞에 나타난다. 특히 오늘날 정보 사회에서 다양한 정보들의 맥 없는 재생산은 주목할 만하다. 이런 동일성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본질적인 차이성, 즉 각각의 것들을 정말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주는 참된 차이를 찾아낼 수 있는가? 물론 여기에도 차이는 존재한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이 차이는 그것이 정형화된 새롭지 않은 틀에서 머무는 한, 결코 그것들의 계열을 기쁨으로 고양시켜주지 못한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가 스피노자로부터 잉태한 것은 바로 그러한 기쁨과 슬픔의 변용이었다. "한 신체가 다른 신체를 '만날' 때, 한 관념이 다른 관념을 만날 때, 이 두 관계는 결합되어 보다 큰 능력을 갖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든가, 아니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해체하여 그 부분들의 결합을 파괴하게 되든가 하는 일이 일어난다. (...) 우리의 신체가 한 신체를 만라서 그것과 결합될 때, 우리는 '기쁨'을 느끼고, 반대로 한 신체 혹은 한 관념이 우리의 고유한 결합성을 위협할 때, 우리는 '슬픔'을 느낀다."(SPP 34) "따라서 객관적으로 우리의 행위 능력을 증가시키거나 돕는 것은 좋은 것이며, 그것을 감소시키거나 방해하는 것은 나쁜 것이다."(SPP 84) 결국 들뢰즈-스피노자의 문제는 어떻게 더 기쁜 결합을 만들어 내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배치(agencement)를 만들어 내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때 더 이상 생성의 힘을 잃고 움직이지 않는 더 이상 새롭다고 할 수 없는 것들은 뒤로 밀려나고, 새로운 것, 우리에게 좋은 연결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것이 나타나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는가?
    먼저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는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A와 B는 다르다"와 같은 의미에서의 '개념적' 차이가 아니다. 들뢰즈의 차이는 오히려 그것을 발생시키는, '비개념적 차이'이다. 들뢰즈는 전개체적 세계에 관해 논한다. 통일적 주체 아래에 균열된 자아, 애벌레-주체가 있으며, 동일성의 세계 아래에 잠재성의, 차이의 세계가 있다. 이것에서 발생이 다루어진다. 이러한 잠재성의 세계는 곧 '강도'의 세계이다. 경험은 어떤 강도적 기호의 '폭력'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어떤 내용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감각적 폭력이다. "재현된 폭력 대신에 감각의 폭력을 내세운다"(LS 52) 이렇게 들뢰즈에 의해 철학은 지성의 철학에서 감각의 철학, 즉 "초월론적 감성의 학"으로 넘어간다.
    이때 재현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하는 물음이 차이의 철학을 더욱 명료하게 밝혀줄 것이다. 들뢰즈는 재현의 구성(constitution)을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수동적 종합을 가져온다. 그것은 분명히 칸트의 능동적 종합에 반발해서 착안한 것이다. 칸트에서 세 가지 종합은 "포착", "상상력", "통각"의 종합이다. 이에 반해, 들뢰즈는 "습관", "기억", "경첩 빠진 시간"의 세 종합을 제시한다. 첫 번째 종합에서 주체는 "구성된다". 두 번째 종합에서 기억은 일직선의 이산적 시간배열이 아니라 상이한 강도적 크기로 나타나고, 현재는 하나의 수축점으로 나타난다. 세 번째 종합은 텅 빈 시간을 제시하고, 거기서 통각의 종합(재인)은 실패하는 종합이 된다.
    이런 들뢰즈의 철학에서 우리는 매우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것들이 이접적이라는 것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서수적인 관계가 아니라 유목적인(nomadic) 관계이다. 노마드적인 들뢰즈의 사유는 우리를 차이의 진정한 다양체에까지 이끌어 간다.

  3. 차이, 새로움을 만들어내기
    이런 들뢰즈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의 단순한 재생산은 스피노자적 무기력 자체다. 따라서 그는 언제나 새로운 것의 생성, 언제나 계속되는 차이의 긍정을 요구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동일성을 추구하고 언제나 지금 안에 머물고 싶어하는 무기력이 만연해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매일 똑같은 일상에 지쳐 살아가는 한편, 달라지는 매일매일의 일들에 힘겨워하면서 살아간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 매일 똑같은 일상이 기다리고 있고, 같은 하루가, 같은 일이, 같은 업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루를 마치고 다시 침대에 누울 때 우리는 그 반복에 지쳐 있으면서도 새로운 것에도 지쳐 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차이를 만들어내는 파도 같은 아침을 꿋꿋하게 받아낼 기력은 충분치 않은 것 같다. 동일한 것이 가상현실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스마트폰을 켜고 sns에 접속한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이른바 짧은 동영상들을 시청한다. 그 시간만큼은 어떤 힘드는 노력도 없이 그저 손가락을 위로 올리기만 하면 다른 영상들이 나타난다. 그렇게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벌써 밤이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짧은 동영상을 "넘길"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나는 지금 이 점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숏츠 또는 릴스를 시청할 때, 우리는 손가락으로 영상을 위로 "넘긴다". 이 넘김이 함축하는 것은 베이컨론에서 말해지는 상승과 추락이다. 강도적 층위로의 추락(하강)으로부터 강도의 차이는 체험된다. "모든 긴장은 추락 속에서 느껴진다. 칸트가 강도를 순간에 인식되는 크기로 정의했을 때, 그는 강도의 원칙을 도출했다. 그로부터 그는 결론 내리길, 이런 여러 크기들은 부정성=0에 그 크기가 얼마나 접근하였느냐로만 나타날 수 있다고 하였다. 따라서 비록 감각이 상위의 혹은 더 높은 층리를 향해도 감각은 이러한 사실을 이 상위 층리의 0으로의 접근에 의해서만, 다시 말해 추락에 의해서만 느끼게 할 수 있다."(LS 96) "이런 이유로 강도상의 추락은 공간적 하강뿐 아니라 상승과도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추락은 정확하게 말해서 능동적 리듬이다"(LS 96). 그러나 이른바 짧은 동영상들은 하강으로서 그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강도적 층위로 추락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상승해 벗어나 강도적 차이로부터 유리된다. ("이것들은 감각적으로 작용하지도 형상을 도출해 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구상적ㆍ추상적] 회화들은 단 하나의 동일한 층에 머물기 때문이다. 이들은 형태의 변형은 할 수 있지만 신체의 변형을 이루지는 못한다.[Ls 49]) 그것은 베이컨의 그림에서 말하는 부차적 상승 운동이 아니라, '상승이 운동에 본질적인 것이 된다'. 영상 재생의 손가락-상승운동이 의미하는 것은 강도적 차이의 부정이다. 그것은 차이의 철학을 전복시킨다. "차이를 긍정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한 고갈된 힘, 더 이상 움직이진 않지만 자신을 지배하는 힘에 대해 반응은 하는 힘, 그와 같은 힘만이 처음으로 다른 힘과의 관계 속에 부정적 요소를 지나가도록 하고, 자신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 부정을 자신의 고유한 본질과 자신의 현존의 원리로 만든다." (NP 32) 또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짧은 동영상은 원형의 회귀 형태가 아니라 무한한 컨베이어 벨트 같은 무한 곡선적인 끊임없는 형태라는 것이다. 여기서는 진정한 되돌아옴(차이 나는 것의 되돌아옴)은 있을 수 없다. 오로지 동일한 것의 되돌아옴 그리고 그것들이 조금씩 겉모습만을 갈아치우고 나타날 뿐이다. 이것은 강도적 차이의 되돌아옴이 아니라 재현적 차이의 되돌아옴에 불과하다. 반면 진정한 의미에서 "되돌아오기는 생성되는 것의 존재이다. 되돌아오기는 생성 그 자체의 존재이고 생성 속에서 긍정되는 존재이다. 생성의 법칙, 정의, 그리고 존재로서의 영원회귀인 것이다. 그로부터 현존은 책임질 것도 유죄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한다."(NP 59-60) 따라서 필연적으로 생성의 유죄가 뒤따른다. 더 이상 진정 가벼운 생성은 없고, 무거운, 가벼워 보이기만 하지만 실제로는 무겁고 둔한 생성만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때 재현적인 작품들로서의 짧은 영상들의 '모임'에서는 그 어떤 스피노자적 정동의 기쁨도 불가능하게 되고, 자본주의적 생산구조에 종속되고 도달될 수 없는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한 궁극적 영상으로서 팔루스(대상 a)가 상정되며 보는 주체는 언제나 그것을 찾기 위해 영상 타래들을 헤집으며 무기력하게 쫒는다. "반응적 힘들은 그들 자신을 힘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차이를 수용하기보다 오히려 자기로부터 등을 돌리길 원한다. (...) 그것들은 적극적 힘을 그것이 할 수 있는 것에서 분리시키고 분해한다." (NP 113~4) 물론 의식은 본질적으로 반응적이기에, 그 어떤 이상적인 영상 형태도 반응적 의식의 촉발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론에서 말해지듯이, "두 가지의 수동을 구분해야 한다. 어쨌든 수동의 고유함은 우리를 우리의 행위 능력으로부터 분리시키면서, 우리를 그 능력으로부터 분리시킨 채로 존속시키면서 우리의 변용 능력을 실행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신체와 적합하지 않는 외부 신체를 만날 때, (...) 이에 상응하는 정념들은 슬픔에 속한다고 일컬어진다. 반대로, 우리의 본성에 적합한 신체를 만날 때, (...) 우리의 능력에 그 신체의 능력이 첨가되는 방식으로 우리를 변용시키는 정념은 기쁨에 속하며, 우리의 행위 능력은 증가되고 도움을 받는다. 이 기쁨은 외부 원인을 갖기 때문에 여전히 정념이다. (...) 즉 여전히 우리의 행위 능력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행위 능력은 점진적으로 증가되어, 우리는 전화와 변환의 지점에 '접근하게' 되는데, 이 전화는 우리를 우리 능력의 주인으로 만드므로, 능동 즉 능동적 기쁨이라는 이름을 마땅히 갖게 된다."(SPP 46) 또한, "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능력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 우리가 적합한 관념들에 이르자마자 우리는 결과들을 그것들의 진정한 원인들에 다시 연결시키게 되며, 적합한 관념의 반성이 된 의식은 명석하고 판명한 개념들에 대해서 자신이 가졌던 변용들과 감정들을 형성하면서 자신의 환상들을 극복할 수 있게 된다(5부, 명제 4)." 정확히 말하면 "의식은 수동적 감정들을 능동적 감정들을 통해서 이겨낸다"(SPP 94) 그러므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떻게 무기력한 의식을 능동적 의식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가 하는 데 있다. 그런데 짧은 동영상이 아무리 기쁜 영상을 가져오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수동적 의식에 머문다. 여기서는 의식에 전화를 야기할 어떤 "기호의 폭력"도 나타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는 이런 동영상들이 재현의 층위에서만, 더구나 "나쁜 재현"의 층위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에 주시해야 한다. 짧은 동영상들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실제로 유튜브의 Shorts의 대부분은 원본 영상의 재생산이거나 일종의 "퍼오기"이다. 더 심각한 점은 이것이 멈출 줄 모르고 끝없이 반복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2018년 틱톡, 2021년 Shorts와 릴스가 전세계에 확산된 이후, 오늘날 어떤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는가? ("틱톡"의 경우에도 이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것 또한 따라하기의 재생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운 것이 나타나야만 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우리 현대 사회는 큰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즉 '무기력의 위기'에 빠진 현대인과 그 사회가 문제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해결될 수 있기는 한 걸까?

4.어떻게 좋은 영상 생산을 만들어 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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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의 철학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여기서 체제비판적 함의를 추출해내는 게 가능한 것인가하는 생각은 들어요. 들뢰즈의 기획은 차이의 철학을 바탕으로 기존의 재현적 사유가 지배해온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을 일신에 대체하는 것인데요. 그 방식이 "너희들, 재현적 사유가들이 아무리 재현적으로 뭔가를 하려해도 너희들이 마주하는 대상엔 너희들이 가정하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라는 식으로 진행돼서 대상 자체는 전혀 바뀌지 않고 담론적 차원에서만 비판이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들뢰즈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을 더 잘 기술하려는 목적일 뿐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학자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들뢰즈적인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더라도 듣는 사람은 "우리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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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 주장에 동의하다 보니, 과연 들뢰즈의 철학을 바탕으로 "어떻게 좋은 영상을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에요. 다만, 들뢰즈를 좀 더 변호해 주자면,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을 더 잘 기술하려는" 시도가 분명 어느 정도는 실천적 함의를 지닐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실재를 완벽하게 개념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제도와 법칙들에 대해 "세상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처럼 파악되지 않는다. 너희의 입장이 다른 입장들에 비해 인식론적 특권을 지닌다는 착각을 버려라!"라고 이야기해 줄 수는 있으니까요. 이런 논의가 기성의 종교, 법률, 과학, 문화 등을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고는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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