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은 지적 사기인가?: 로저 스크루턴의 『우리를 속인 세기의 철학가들』에 대한 단상

예전에 개인 블로그에 썼던 글을 여기도 공유해 봅니다. 평소에 저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PC주의'나 '현대철학'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일상의 담론들이 대부분 미묘하게 핵심을 벗어나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스크루턴의 책에 대한 단상을 쓰면서 이 점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원글: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1) 소위 '포스트모더니즘'1이라고 불리는 담론이 '지적 사기'에 불과하다는 의혹은 20세기 초부터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가령, 카르납은 「언어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통한 형이상학의 제거(The Elimination of Metaphysics through Logical Analysis of Language)」라는 논문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이 존재 양화사의 부정을 표현하는 '무(Nothing)'를 마치 명사처럼 사용한 나머지 논리적 통사론에 어긋나는 수많은 사이비 진술을 낳았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콰인은 1992년에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데리다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하고자 하였을 당시 그 결정에 반대하는 서명에 동참하였는데, 그 서명은 데리다의 글이 '논리적 팔루스(logical phallusies)' 따위의 무의미한 농담과 말장난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소칼은 포스트모던 사상을 다루는 학술지인 『사회적 텍스트(Social Text)』를 상대로 '지적 사기' 사건을 벌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이 사건에 대한 일화를 책으로 출판하여 라캉, 크리스테바, 이리가레, 들뢰즈, 가타리, 보드리야르 등이 자연과학의 이론을 함부로 왜곡하는 사기꾼이라고 공격하였다.

(2) 스크루턴의 『우리를 속인 세기의 철학가들』은 카르납, 콰인, 소칼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제기한 비판의 계보 위에 서 있다. 다소 완화된 번역본의 제목과 달리, 이 책은 원래 "멍청이, 사기꾼, 선동가: 뉴레프트의 사상가들(Fools, Frauds and Firebrands: Thinkers of the New Left)"이라는 매우 노골적인 제목으로 쓰였다. 꽤나 잘 알려진 정통파 분석철학자인데다 기사 작위까지 있는 스크루턴이 특정 진영을 이렇게나 과격한 용어로 공격하였다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놀라웠다. 이 책에 나타난 스크루턴의 어조는, 시공로고스 총서의 『칸트』와 『스피노자』, 바다출판사의 『현대 철학 강의』 등, 그동안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다른 저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3) 스크루턴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동조하는 유럽과 미국 철학자 집단을 '뉴레프트(신좌파, New Left)'라는 명칭으로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뉴레프트는 (a) 개인을 모든 전통적 위계질서와 제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하겠다고 하면서도 정작 인권침해와 차별금지 등 '사회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온갖 검열과 감시를 허용하는 법률을 만들어내고, (b) 허구적인 '유토피아'를 상정한 채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에 맞지 않는 집단에 폭력을 동원하는 것을 유토피아를 향한 '투쟁'이라고 정당화하고, (c) 자신들과 대립하는 집단과 전혀 대화하려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이 창조해낸 무의미한 '신어'를 앵무새처럼 반복하여 논점을 회피해버리려 하고, (d) 상호협력과 유대에 근거하여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타인에 대한 '분노'만을 강조하는 성향이 있다. 즉, 뉴레프트는 단지 기성의 가치를 거부하고, 비난하고, 무너뜨리고자 할 뿐, 그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전통적 유산에 대한 뉴레프트의 반감은 아무런 대안 없이 반대세력을 처단하는 데만 급급한 '전체주의'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스크루턴은 이러한 뉴레프트의 특징을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 비유한다. 뉴레프트는 '언제나 부정하는 정신'인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악마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심각한 사회 혼돈의 핵심이 된다. 우리 문명은 이런 혼돈을 한 두 번 겪은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 이후 수차례 겪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사상가들을 살펴볼 때, 이 혼돈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전개될 것으로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 혼돈을 단순히 왜곡된 종교 혹은 그노시스주의의 한 형태로 보지만 사실은 그 이상이다. 그것은 서구 문명을 물려받은 우리의 역사적 유산에 대한 거절이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메피스토펠레스가 자기 자신을 설명할 때 한 말을 떠올려 본다. '나는 언제나 부정하는 정신이다. 유를 무로 만들며, 따라서 창조의 일을 무효로 만들어 버리는 정신이다.'2

(4) 그런데 스크루턴이 '뉴레프트'라고 비난하는 인물들이 과연 하나의 동질적 집단으로 묶일 수 있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지는 매우 의문스럽다. 특히, 그가 '뉴레프트'를 명시적으로나 암시적으로나 '마르크스주의', '네오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와 동일시한다는 점은 상당히 부적절해 보인다. 그의 책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 중에는 홉스봄, 톰슨, 루카치, 알튀세르, 그람시, 윌리엄스, 앤더슨처럼 실제로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속한 인물들도 있고, 바디우와 지젝처럼 마르크스주의 혁명관에 대해 호의적인 발언을 많이 한 인물들도 있지만, 동시에 갤브레이스, 사르트르, 푸코처럼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다소 비판적 입장을 취했던 인물들, 라캉, 들뢰즈, 사이드처럼 마르크스주의와 큰 상관이 없는 인물들, 심지어 드워킨, 하버마스, 로티처럼 자유주의 진영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인물들도 있다.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에 퍼져 있는 이렇게나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상가들을 '뉴레프트'라는 커다란 이름으로 묶어버리는 것이 나에게는 정당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외연이 넓은 단어일수록 내포는 적어서 사실상 아무런 구체적인 것도 의미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금만 세부적으로 살펴보더라도, 알튀세르와 라캉, 사르트르와 푸코, 라캉과 들뢰즈, 바디우와 들뢰즈, 드워킨과 로티, 하버마스와 로티는 서로 논쟁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스크루턴은 각 학자의 고유성이나 그들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기보다도 단지 그가 처음 상정해 놓은 '뉴레프트' 혹은 '마르크스주의'라는 틀에 몰두할 뿐이다.

(5) 애초에 마르크스주의가 현대철학 전반에 끼친 영향력이 과연 어떠한 종류의 것이었는지를 제대로 해명하는 작업 역시 필요해 보인다. 마르크스주의가 분명 20세기 중반까지 현대철학을 지배한 사조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의 철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이념과 제도라기보다도, 마르크스주의가 상정하고 있는 '유물론', '변증법', '혁명관' 같은 이론적 요소였다. 또한 이러한 이론적 요소 역시 일종의 '이데올로기'로서 수용된 것이 아니라, 현상학, 실존주의, 정신분석, 비판 이론, 해체주의 등 동시대의 다른 철학적 관심에 따라 변형되거나 비판되는 형태로 확장되었다. 따라서 단순히 특정 철학자가 마르크스주의에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마르크스주의자로 규정하거나 마르크스주의를 지지하였다고 해설하는 것은 비약이다. 가령, 스크루턴의 책에서 갤브레이스, 사르트르, 푸코, 바디우, 지젝의 입장은 지나치게 '마르크스주의'라는 틀 속에서 해설되고 있다. 이 인물들이 마르크스주의의 경제 이론을 적극적으로 문제 삼지 않았다거나, 스탈린 체제 아래의 소련에 대해 별다른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거나, 마오쩌둥을 호의적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이 이들의 입장을 마르크스주의와 결탁시키는 주된 논증이다. 정작 이 인물들의 관심은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문제보다도, 오히려 기성의 제도, 합리성, 진리가 지닌 한계를 강조하는 데 있었는데도 말이다.


로저 스크루턴

(6) 내가 보기에, 스크루턴은 자신의 정치적 관심 속에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제시되는 이론적 논의를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현실정치의 구체적 이슈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데 곧장 사용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가령, 스크루턴은 시장경제와 대의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보수주의자로서 스탈린, 레닌,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정권을 극렬하게 비판한다. 또한 전통에 대한 무조건적 반감을 표출하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 68혁명 당시의 대학생들 역시 혐오한다. 더 나아가, 오늘날의 진보 진영이 소위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명목으로 옹호하고 있는 차별금지법, 시민불복종, 낙태권 옹호, 동성애 옹호의 논리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뉴레프트' 혹은 '마르크스주의'로 규정하려는 시도는 사실 이러한 정치적 관심 속에서 이루어진다. 20세기 공산정권의 성립에서부터 오늘날의 정치적 올바름 운동에 이르는 수많은 이슈가 포스트모더니즘에 근거하여 뒷받침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7)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스크루턴의 독해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현실정치의 구체적 이슈에 대해 특정한 진영의 입장에서 대답을 주고자 하지 않는다.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쟁점이 되는 대부분의 사안은 매우 이론적이다. 가령, 현상학 전통은 자연과학을 통해 세계를 완벽하게 표상할 수 있다는 생각을 비판한다(후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가다머). 비판 이론은 근대적 '합리성'에 대한 맹신을 경계한다(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하버마스). 권력 이론과 지식 이론은 우리가 언제나 특정한 시대와 문화의 틀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푸코, 알튀세르, 리오타르). 정신분석과 해체주의에 근거한 담론은 모든 체계가 내적 균열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라캉, 데리다, 바디우, 지젝). 긍정성의 철학은 기존 형이상학이 상정해 온 불변의 진리 대신 약동하는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다(베르크손, 들뢰즈) 즉, 이러한 논의는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옹호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독단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모든 종류의 고착화된 지식, 체계, 제도, 권위, 이념을 비판한다. 의심할 수 없는 토대 위에 완결된 지식의 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근대적 형이상학'의 기획에 대한 비판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이 수행하고자 하는 작업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은 비판으로부터 면제되어 있지 않다. 그 입장들 역시 당연히 형이상학적 이데올로기로 돌변할 경우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하는 대상으로서 밝혀질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들 중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인물은 찾기 힘들다. 스크루턴이 우려하는 것과 달리, 그 누구도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을 맹목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8) 이러한 사실은 최근에 벌어진 지젝과 피터슨 사이의 논쟁에서 매우 잘 드러난다. '포스트모던적 네오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려는 피터슨을 향해 지젝은 "누가 마르크스주의자에요? 그들 중 정치적 올바름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라고 질문한다. '포스트모더니즘',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유럽철학' 등의 이름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철학자들 중 어느 누구도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을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당신이 말한 게 있는데, 그런 데이터는 어디서 찾았어요? 전 도저히 못 찾겠는데 말이에요. 그래요,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죠. 당신은 인용부호를 사용해서 [당신의 적이나 상대를] 가리키잖아요. 당신은 당신의 적이나 상대를 묘사할 때──저는 그들을 그런 식으로 규정하지 않는데요──그들을 '포스트모던적 네오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르는데,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이해는 가요. '정치적 올바름'이나 '질투심의 과잉' 같은 거요. [하지만] 당신은 정말로 그들이……. 그러니까 그런 걸 어디서 찾았죠? 나는 그들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제가 물어볼게요. 저한테 이름을 알려주세요.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자가 어디 있나요? 전 도저히 모르겠거든요. 누가 마르크스주의자에요? 그들 중 정치적 올바름으로 유명한 사람이 있으면 좀 알려주세요. 저는 그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제대로 된 뱀파이어가 마늘을 무서워하는 것만큼이나 무서워한다고 생각해요.3

(9)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스크루턴의 비판은 계속 논점을 엇나간다. 스크루턴은 '뉴레프트' 혹은 '마르크스주의'라는 허수아비와 치열하게 싸울 뿐이다. 정작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각각의 인물들이 어떠한 핵심적 주장을 제시하고 있는지는 놓쳐버리고 만다. 그의 비판은 단지 특정한 인물이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 혹은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다소 긍정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발언을 하였다는 사실을 트집 잡는 수준에서 머무른다. 가령, 갤브레이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이 거대한 권력을 획득하여 괴물처럼 성장하는 현상을 문제 삼으면서도 사회주의의 억압적 체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비판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드워킨은 낙태권 같은 진보 진영의 개념을 옹호하면서도 보수 진영의 가치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사르트르는 단지 마르크스주의의 '제도화'에 반대하였을 뿐 마르크스주의 경제학과 이념의 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푸코 역시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한 인물이지만 사회 해방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와 유사해 보이는 가치를 지향하였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로티와 사이드는 페미니스트 급진파, 동성애 운동가, 반권위주의자 등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진영에 유리하게 사용될 수 있는 상대주의적 사상을 제시하였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바디우와 지젝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혁명에서조차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비판받는다. 그 이외의 홉스봄, 톰슨, 루카치, 알튀세르, 그람시, 윌리엄스, 앤더슨 같은 실제 마르크스주의 진영에 속한 인물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10)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스크루턴의 독해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스크루턴이 나름대로의 성실성을 발휘하여 각 저자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 애쓴 흔적은 책 이곳저곳에 잘 드러나 있다. 그가 자신의 명성답게 각 저자에 대해 상당히 날카로운 비판을 제시하는 부분들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가령, 영국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언어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홉스봄과 톰슨의 시도가 자의적이라는 비판은 매우 적절하다. 드워킨의 법철학이 '절차적 자연주의'라는 보수적 법이론의 관점에서 더욱 설득력 있게 재구성될 수 있다는 지적 역시 동의가 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대한 해설도 타당하다. 푸코의 권력 이론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다소 왜곡하여 요약하기는 하였지만 그 전반적인 내용은 받아들일 만하다. 수학이 존재론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바디우를 비판하는 부분은,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는 해도, 쟁점을 잘 건드렸다고 생각한다.

(11) 이런 점에서 스크루턴의 책은 각 장별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을 조금씩은 담고 있다. 물론, 몇몇 저자에 대해서는 아주 기초적인 해설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도 하지만 말이다. 가령, 알튀세르와 라캉에 대한 비판은 너무 피상적이고, 로티에 대한 논의에는 결정적인 오해가 스며들어 있고, 하버마스에 대한 내용은 완전히 엉터리이다. 다만, 포스트모더니즘을 외부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글들 중에서는 이만큼이나 성실하게 쓰인 책도 드물 것이다. 적어도, 카르납, 콰인, 소칼 같은 그동안의 비판자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순전히 무의미일 뿐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하였던 것과 달리, 스크루턴은 어설프기는 해도 부분적으로는 생산적인 논의를 제시한다.

(12) 말하자면, 스크루턴은 각 저자가 제시하는 입장을 대략 이해하고는 있다. 다만, 그는 그 입장이 어떠한 철학적 귀결을 낳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파악하는데 실패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각각의 입장으로부터 '근대적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옹호를 이끌어내어 버리는 당혹스러운 논의가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라는 속담이 그의 책이 지닌 전체 구성을 요약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개별 학자들에 대한 부분적으로 흥미로운 해설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에 대한 적절한 평가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는 점에서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1.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은 용어를 이 글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전개된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해체주의, 정신분석학 등 서로 상이한 철학적 담론을 통칭할 마땅한 용어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로저 스크루턴, 『우리를 속인 세기의 철학가들』, 박연수 옮김, 도움북스, 2019, 34쪽.

  3. https://www.youtube.com/watch?v=nrROtYlyKqg 자막 수정 및 인용자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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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이 모든 계보들에 대한 논쟁은 어떤 의미에서 '순수하게 학술적인 영역'을 이미 벗어난 것 아닐까....싶어요.

어쩔 수 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은 좌파 정치 - 혹은 진보 이데올로기와 엮여버렸으니깐요. (마치 중세 철학에서 아퀴나스와 스코투스의 논쟁이 단순한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 수도회 간의 정치적 다툼으로 읽혔고, 불교 학파 간의 논쟁이 정치적 다툼으로 읽힐 수 있는 것처럼요.)

그런 의미에서 시간이 지나야만, 이 모든 것들의 '사회적 맥락'이 사라지고 보다 '학술적인 관점'에서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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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러튼의 이 저작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아주 상세하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드려요 ^^

여기에서 스크러튼이 만약 이 다양한 철학자들을 '뉴레프트'와 같은 잘못된 유개념으로 다 묶어버리지 않고, 따로따로 그들의 저작들을 자세히 짚어가면서 왜 그들의 주장이 타당하지 않은지를 혹은 사실상 넌센스인지를 설득력있게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책 한두권 분량으론 안되겠지만요.

즉, 여기서 비판자의 실책이 비판을 받는 자의 무류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제대로 해명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아마도 공정한 의견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 더 첨언하자면, 비판하는 이는 타인 비판을 통해 동시에 자기 비판을 수행하는 구조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러한 '비판의 윤리'가 이 저서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불리는 문제영역에서 아직도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그것이 아직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긴 글 잘 읽었습니다. 수고 많으셨고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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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잘은 모릅니다만, 로저 스크루턴은 "정통파 분석철학자"인지 약간 갸웃하게 되는 면모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본 포럼에서도 종종 호명되는 티모시 윌리엄슨과의 지면상 논쟁에서

인간 세계, 즉 에드문트 후설이 '생활세계(Lebenswelt)'로, 윌프레드 셀라스는 '이유의 공간(space of reasons)'으로 칭한 바 있던 그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과학적 서술에서는 사라져버린 개념 및 개념화다. 순수성, 순진함, 비극성, 희극성, 우아함, 세련됨 같은 것은 과학이라는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식의 유려한 글쓰기를 보면 로저 스크루턴은 또 흥미로운 위치를 점하는 철학자가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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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는 스크루턴이 『현대 철학 강의』에서 보여준 면모 때문에 당연히 이 사람은 전형적인 분석철학자라고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어요. 분석철학의 역사와 주제를 아주 표준적인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어서요.

그나저나, 스크루턴이 '생활세계' 개념과 '이유의 공간' 개념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한다는 점은 상당히 통찰력 있네요. 저는 스크루턴의 설명처럼 두 개념이 모두 인간 세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작 후설과 셀라스를 같이 놓고서 이야기하는 글들을 본 적이 없어서요.

특히, 셀라스를 설명하는 많은 논문들이 '이유의 공간'이나 '현시적 이미지'를 종종 '추론', '정당화', '이유' 같은 너무 분석철학의 이론적인 용어만으로 설명하는 게 아쉬웠어요. 정작 셀라스 본인은 "Philosophy and the Scientific Image of Man"에서 후설이나 실존주의를 직접 언급하는데도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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