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는 본래 무신론적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대한 마르셀의 비판

가브리엘 마르셀의 "Some Reflections on Existentialism"이라는 논문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마르셀은 실존주의가 근본적으로 '무신론적'이라는 대중적 통념에 반대하면서, 우선 실존주의의 뿌리가 그리스도교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네요. 우리가 철학사에서 흔히 실존주의의 원형으로 평가하는 아우구스티누스, 파스칼, 키에르케고어 같은 인물들이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말이에요.

[…] 사교계 여성분들에게는 숙명적인 오류가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실존주의는 근본적인 형태에서 본래적으로 무신론적인 것으로 여겨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한 호기심 많은 여성분들에게 어떻게 제가 그리스도교 실존주의자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교 실존주의자란] 일종의 정신적 둥근 사각형이라는 거죠. 물론 이러한 질문은 키에르케고어에 대한 무지를 암시합니다. 키에르케고어는 의심의 여지 없이 오늘날 실존주의라고 불리는 사조의 창시자였고, 가장 깊은 의미에서 종교적이었으며, 그리스도교 사상가였죠. 우리의 동시대인들에게서 우리가 발견하는 그러한 실존철학의 기원에 이 덴마크 사상가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자신의 선구자들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 실존이 파스칼―그의 중요성도 분명히 두드러집니다―에 의해 뿐만 아니라 이미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도 강조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G. Marcel, "Some Reflections on Existentialism", Philosophy Today, Vol. 8(4), 1964, 249)

그 이후의 내용에서는 사르트르의 소위 '무신론적' 실존주의에 대한 비판도 나오네요. 삶에 대한 종교적 열정이 없었던 사르트르는, 자유를 일종의 '부족'이나 '결핍'으로 이해함으로써, 결국 역설적이게도 유물론과 굉장히 유사한 형태의 철학을 전개하게 되었다는 지적입니다.

실존한다는 것은 개인 혹은 주체가 된다는 것이지만, 주체가 된다는 것은 선택한다는 것이고, 이는 또한 정열에 사로잡힌다는 것입니다. '정열에 사로잡힌다(impassioned)'는 이러한 말은 키에르케고어 자신의 사유를 가장 명확하게 특징 짓는 말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실존과 자유를 설명하는 연결점을 분명하게 이해합니다. 이러한 연결점이 사르트르에 의해서도 발견되지만, [키에르케고어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합시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는 사르트르가 탁월하게 비종교적이고, 반종교적인 사상가라는 사실 때문에 자연스러울 뿐입니다.

키에르케고어에게는, 중심이 여하튼 그리스도로 남아 있습니다. 모든 자유로운 실존자가 그분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그 자신이 실존적으로 존재하는, 다시 말해, 비대상적인, 절대적 실존자로서 여겨지는 그리스도 말입니다. […] 그리스도가 키에르케고어의 사유에 가져다 준 이러한 절대적 측면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는 제거되었는데, 그에 따라 자유 자체가 나쁜 것으로 심지어 도착적인 것으로 바뀌기도 한다는 사실 쉽게 드러납니다. 이것은 사르트르가 "인간은 자유롭도록 선고되었다."라고 말하는 데까지 이르는 한 사실입니다. 이 말은 자유가 인간에게, 최소한 어떤 의미에서는, 부족이나 결핍의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르트르에게는, 존재가 자신의 부족이나 박탈에 의해 내적으로 짐 지워집니다. 이것은 바로 의식을 거역하는 박탈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역설적이게도, 사르트르가 19세기 혹은 심지어 18세기 유물론자들을 따른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형이상학에 의해 제기된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가, 내가 믿기로는, 자유의 철학이 되고 싶어하는 실존철학과 언제나 이러한 동일한 자유를 질식시키기 직전에 있는 유물론 사이의 모순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G. Marcel, "Some Reflections on Existentialism", 250-251)

마르셀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르셀이 분명히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는 생각됩니다. 확실히,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이 자유를 지향하는 실존주의를 강조하면서도 자유를 결코 허용하지 않는 일종의 유물론을 자신의 형이상학적 입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다소 역설적이긴 하죠. 그 이외에도, 사르트르에게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순한 사실일 뿐,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서 추구하고 실현해야 할 상태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삶을 살아내고 싶다는 강렬한 '종교적 열정' 같은 동력이 사르트르의 철학에서는 다소 희미하다 보니, 자유가 '속박', '결핍', '박탈', '짐', '부담'으로만 묘사되는 것 아닌가 해요.

물론,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반드시 기성 종교를 통해 제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저는 이런 식의 이유가 언제나 '종교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자잘한 문제들을 완전히 망각할 정도로 깊이 몰두할 만한 가치를 발견했을 때에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도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서 의미가 있을 텐데, 이런 식의 가치를 표현하기에 과연 '종교'나 '신앙'보다도 더 적절한 용어가 있을까 해서요. (하물며 애니메이션 오타쿠들조차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 속 캐릭터를 '신'처럼 숭배하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캐릭터에 갈아 넣잖아요.) 그래서 저는 일종의 '종교성'이라는 것이 없는 실존주의가 가능할 수 있을지 다소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사르트르에 대한 마르셀의 비판도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저에게는 읽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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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끔 실존주의를 논할때 실존주의의 계보를 소크라테스까지 내려가서 찾는 사람도 보이기도 합니다.

  2. 확실히 사르트르는 자유를 형벌처럼 묘사하죠.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삶을 사는데 열정을 가지고 추구해야할 무언가가 존재하는지는 (아는게 없어서)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부연설명을 좀 하자면, 사르트르의 자유는 기존 자유의지 지지자들의 자유와는 좀 다른 면모가 존재하긴 합니다. 기존 결정론vs자유의지 논쟁에서 자유의지는 흔히 '선택의 자유'를 의미하는데, 사르트르는 그런 선택에 있는 '해석'의 면모가 진정한 자유를 드러낸다고 봅니다.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1830년 리옹에서 있었던 폭동을 예시로 들면서 노동자들의 폭동이 단순히 임금하락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임금 하락으로 자신들의 생계가 비참해지는 것 에 대해 생각해 보고,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를 상상할 때, 즉 “노동자들의 괴로움이 그들에게 있어 허용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자신의 괴로움을 바꾸려는 계획을 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폭동이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단순히 임금하락이 원인이 아니라, 과거의 사실들 중 임금하락에 부정적인 가치를 노동자들 스스로 부여하고 이대로는 생계가 비참해진다는 부정적인 해석을 해냈기 때문에 폭동이 일어났고, 이렇게 과거의 사실들을 선별해내고 해석하는 작업이야말로 자유의 구조라 할 수 있다 보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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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글 잘 읽어보았습니다. 몇가지 점에서 사르트르의 입장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 간단히 제 생각을 말씀드려보려고 합니다.

사르트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는 신이 없다면 절대적 기준을 정할 존재가 없는 것이기에, 우리의 행동을 정당화할 (초월적 혹은 선험적) 가치를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도덕적 무정부 상태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게 됩니다. 어느 텍스트에서 자유를 문자 그대로의 '속박'이나 '결핍'으로 이해하는 입장이 개진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러한 표현은 자유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앙가주망의 관계에 대해 이해하여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거에요. 즉, 사르트르에 따르면

나는 나 자신과 모든 사람에 대하여 책임이 있으며, 내가 선택하는 어떤 인간의 개념을 창조한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방곤 역, p.21, 문예출판사, 2023)

라고 합니다. 여기에 이어서 사르트르는 인간의 불안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것은...스스로를 결정하는 자기일 뿐만 아니라 자아와 동시에 전 인류를 선택하는 입법자라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은 자신의 전적인, 그리고 심각한 책임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위의 책, p.21)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신이 없으면 선도 악도 없으니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더이상 신이 선을 규정하고 우리는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 아니니, 우리가 스스로 진지하게 판단하여 선하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함으로써(즉, 앙가제(engager)하여) 전 인류에 대한 책임의식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막대한 책임 의식이 있기에 '불안'을 느끼게 되며, 정답을 제시해 줄 절대적 존재로서의 신이 없으니, 스스로 올바른 것을 계속 찾아야 하는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에는 개인 각자의 진지한 사유와 실천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맑스주의자이기도 했지만, 제가 알기로 최소한 후기의 사르트르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주장한 것으로 압니다. 유물론에 의할 때 개인을 자유로운 주체로 규정할 수 없으며, 유물론은 기존의 관념론적 부르주아 철학과 마찬가지로 기만적이라고 했지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에서 사르트르는 "우리는 물질계와는 구분되는 명확한 가치의 전체로서의 인간계를 형성하고자 한다."(위의 책, p.40)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YOUN 선생님께서,

사르트르에게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단순한 사실일 뿐,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서 추구하고 실현해야 할 상태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라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그 존재가 본질에 앞서고, 이는 우리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책임'은 "모든 타인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위의 책, p.19)"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운명이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것에 대해 사르트르는 "...그보다 더 낙관적인 이론은 없다"(위의 책, p.39)고 말합니다. 그는 인간은 자유롭기 때문에 비겁한 인간이 영웅적 인물로 변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낙관주의로서의 실존주의를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절대적 질서에 의해 절대적으로 규정된다면 그 어떤 변화의 희망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 우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올바른 방향으로 실현시키려는 열정적 동기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끊임없이 재발견하며, 앙가주망을 통해 자신의 행위가 모든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지를 사유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새길 때,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삶/자유가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서 추구하고 실현해야 할 상태가 아니라'는 견해는 재고될 여지가 있다고 보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자잘한 문제들을 완전히 망각할 정도로 깊이 몰두할 만한 가치를 발견했을 때에야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도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서 의미가 있을 텐데, 이런 식의 가치를 표현하기에 과연 '종교'나 '신앙'보다도 더 적절한 용어가 있을까 해서요.

만약 여기서 말하는 '가치'가 '종교'나 '신앙' 이외에 다른 용어로 표현될 수 없다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도 분명 '종교'나 '신앙'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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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만, 저는 두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1)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개념은 자유에 대한 불안을 해결해 주는가?

사르트르가 '책임'의 문제에 대해 매우 강조했다는 점은 저도 부정하지 않아요. 말씀하신 '앙가주망'이라는 개념이 이 점을 잘 보여주잖아요. 하지만 저는 사르트르의 철학이 앙가주망 개념을 강조한다고 해서, 우리가 자유 앞에서 처하게 되는 부담의 문제에 대해 대답이 제시되었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오히려 바로 이 앙가주망 개념이 사르트르의 철학에서는 '시선의 투쟁'이라는 갈등 상황과 얽히면서 자유의 부담감을 훨씬 심화시키니까요. 즉, 우리 자신이 주체로서 "전 인류를 선택하는 입법자"가 되려 하듯이, 우리의 타자들도 똑같이 그런 선택을 하려 한다는 것이 갈등을 일으키는 핵심 요인이죠. 우리가 우리의 시선에서 타자의 의미를 결정하려 하는 것처럼, 타자도 자신의 시선에서 우리의 의미를 결정하려 하다보니, 결국 우리와 타자 사이에는 누가 주체가 되어야 하는지를 둘러싼 시선의 투쟁이 발생하니까요. 그래서 사르트르의 철학에서 자유는 필연적으로 시선의 투쟁으로 우리를 이끌게 되고, 그 투쟁에서 누가 주체가 될 것이고 누가 물화될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대결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저는 이해해요. 누군가의 자유는 누군가의 부자유일 수밖에 없다고 사르트르는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타인을 '지옥'으로 규정하는 『닫힌 방』의 유명한 대사도 나오는 거고요. 저로서는 사르트르의 자유 개념을 우리가 전제하고서도 이런 식의 지옥 같은 끝없는 투쟁 과정을 벗어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요.

(2)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과연 성공적으로 통합하는가?

더욱이, 마르크스주의의 적극적인 옹호자였던 사르트르가 과연 유물론을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고 할 수 있는지는 많은 논란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사르트르 생전에도 그의 마르크스주의적 입장 때문에 메를로퐁티와 카뮈가 결별을 선언한 사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저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결코 손쉽게 화해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사르트르 본인은 '주체'를 강조하는 실존주의를 통해 변증법적 유물론을 비판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 그 시도가 과연 사르트르 자신의 생각만큼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의문으로 남는 거죠. 인간이 하부구조의 지배를 받는다는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존적 자유를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고, 인간에게 자유가 있다는 실존주의의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하부구조를 통해 사회와 역사의 발전을 설명하려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통찰을 포기해야 하니까요. 실제로, 진태원 교수님이 칼럼에서 이 점을 잘 지적하시고 계시네요.

그런데 전통적인 역사유물론이 간과한 개인적 주체에 입각하여 마르크스주의를 재구성하려는 사르트르의 노력은 여러 가지 심각한 난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사르트르 스스로 문제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만약 역사가 총체화라면, 마르크스주의는 엄밀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인간 역사가 다양한 개별 역사들로 해체된다면, 혹은 만약 투쟁을 규정하는 내재성의 관계 안에서 다른 쪽에 의한 한쪽의 부정이 원칙적으로 탈총체적이라면,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진리라고 할 수 없다.”(<변증법적 이성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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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에 정말 친절하게 댓글을 남겨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대해 간단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사르트르의 앙가주망 개념은 자유에 대한 불안을 해결해 주는가?**에 대해

선생님께서 지적해 주신 '시선의 투쟁'에 대한 이론이나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언명은 특히 사르트르의 전기, 즉 '존재와 무'로 대표되는 시기(이런 용어는 자의적이지만 특별히 사르트르를 왜곡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의 견해를 반영하는 것이라 보입니다. 2차 대전 이후, 사르트르 사상의 후기 단계에서는 괄목할 만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죠.

즉, '변증법적 이성 비판'의 시기에 사르트르는 개인이 아닌 집단적 주체를 강조하고, 이 '집단'과 역사/사회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2차 대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이러한 사상의 변화가 이전 단계를 완벽히 극복하고 어떤 논리적 문제도 남겨두지 않은 발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시선의 투쟁'과 같은 문제틀에서 발전적으로 벗어나려는 시도를 했고, 이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거에요.

(2)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과연 성공적으로 통합하는가?**에 대해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선 제가 깊이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주의자로 개종하고 마르크스주의적 이론들을 받아들였지만 이후에 마르크스주의가 자꾸 교조적으로 흘러가자 이에 대해 환멸을 느꼈고,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통합하려는 시도도 하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애초에 YOUN 선생님께서 올리신 글에 대한 답변인 위의 제 글은 사르트르가 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를 성공적으로 통합하였는지의 여부와는 상관이 그다지 없는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진태원 선생님의 글을 소개해 주시고, 깊이 있는 답변까지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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