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 '등에'의 말본새: 철학자는 어떻게 소통해야하나?

2천 하고도 몇 백년 전, 아티케 사람 소크라테스는 길 가던 사람을 붙잡고 헤아리기 힘든 도발적 질문을 던지길 즐겨했습니다. 물론 그 말로는 좋지 못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만간 끝날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전통은 현재까지도 제도권에서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이런 전통적 관습이 현대 사회, 특히나 대면 강의실이 아닌 대중 매체에서도 유효할까요?

저명한 생명윤리학자인 제프 맥맨(Jeff McMahan)은 2010년 일간지 뉴욕 타임즈에서 철학 관련 꼭지인 '더 스톤(The Stone)'에 윤리적 난제인 '포식자 문제(Predation problem)'를 소개하는 글을 한편 펴냈습니다. 육식 동물의 존재는 야생에서 많은 불행을 초래하기에, 생태학적 문제들이 초래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육식 동물은 존재하지 않는게 윤리적으로 더 낫다는 주장을 소개했죠. 분명 대중적 관점에서는 아주 '도발적인' 주장이라 할만합니다.

육식 동물들 (The Meat Eaters) - http://opinionator.blogs.nytimes.com/2010/09/19/the-meat-eaters/

해당 글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매우 나빴습니다. 그 다양한 인신 공격의 양상은 현재도 링크된 기사에 남아있는 약 500여개의 댓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맥맨은 이런 반응에 답하는 속편을 써서 다시 투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글 말미에 이 다양한 반응에 관한 일종의 메타적 평론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포식자들: 답변 (Predators: A Response) - https://opinionator.blogs.nytimes.com/2010/09/28/predators-a-response/

Earlier I noted that by far the most common objection to my article was that I ignored the likely consequences of the elimination or even the mere reduction of predation. If you have the patience, review the first 152 comments on my article. You will find this objection stated in 28 of them — that is, in one of every 5.4, or nearly 20 percent. Given that I explicitly stated and addressed that objection, and later reverted to it six times, it seems clear that many, and probably most, of the readers of the article gave it only a cursory glance before pouncing on their keyboards to give me a good roasting. But at least those who replicated the objection I had stated deserve credit for saying something of substance. What’s particularly disheartening is that their comments are greatly outnumbered by those that make no reference to my arguments and never touch on a point of substance, but instead consist entirely of insults and invective. If you take your own moral beliefs seriously, the way to respond to a challenge to them is to make sure you understand the challenge and then to try to refute the arguments for it. If you can’t answer the challenge except by mocking the challenger, how can you retain your confidence in your own beliefs?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인신공격을 하는 독자들의 모습을 개탄하며 맥맨은 어쩌면 소크라테스에게 독주를 내렸던 아테네인들을 연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점에 관해 이견을 보이는 Del Covington의 댓글 하나가 생각할 여지를 줬습니다.

I find the hurt feelings on display in your final paragraph quite revealing. The suggest you are either disingenuous or naive. Let me explain.

You say that the outraged roar from your respondents "disheartens" you. Moreover, you claim that "many, and probably most, of the readers...gave it only a cursory glance before pouncing on their keyboards to give me a good roasting." You even seem to evince some surprise at this.

Really? Come on. What did you expect? You pick an intensely provocative topic, proceed to argue an outlandish position then act nettled when much of the response arrives in the form of heat and smoke.

Did you really expect to occasion a flowering of careful, reasoned discourse upon and within the terms you have stipulated (and in quite exacting detail?) If that was your goal then why pick a topic guaranteed to provoke so much knee-jerk derision?

Answer: You like to play provocateur. Which is ok with me, but don't feign disillusionment when your provocations do in fact provoke. It undermines your ethos. The merits of your argument as an argument to one side, there is an odor of ivory tower snobbery to your concluding paragraph. Why can't the unwashed masses at least follow the course of my argument and rebut it on the merits? Why must I endure these "insults and invective?"

The answer should be self-evident. Most newspaper readers--even NY Times philosophy blog readers--lack the time and discipline to attempt a rebuttal on your terms and in your favored manner of discourse. Which is no freakin' surprise. That's a tall order for those who do not write arguments for a living.

So they responded viscerally because your propositions touch a nerve. And while the conditional form of your argument ("high degree of confidence") provides you some defense against a slew of social/biological engineering objections--call them skepticism of your better mousetrap--that doesn't at all blunt its invitation to outrage.

All of which is to say that by animating your argument with such a radical proposal--whether theoretical or practical--you succeed at looking 'edgy' but also forgo your chance at persuasion. Do you really want to influence people's views or do you prefer to seem clever?

'독자들 대부분은 글을 찬찬히 읽어나갈 여유도 없는 현대인들인걸 뻔히 잘 알텐데, 그런 사람들의 역린을 건드리는 도발기를 걸어놓고는 "이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하는걸 보니 애석하다"라고?

뭐, 도발을 하는 것은 좋다. 그렇지만 도발을 걸어놓고서는 도발에 걸린 사람을 보고 놀란 척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마라'

라는 댓글의 요지는 저한테는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렸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대중들과의 철학적 활동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볼만한 여지가 생겼는데요.

최소한 많은 강단철학은 소크라테스를 본받아 '도발적인 테제'를 중심으로 한 토론 및 변증 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 테제에 감정적으로 대응할 것이 아니라, 그 숨겨진 전제를 찾고 그 변증 과정을 따져묻는 방식이죠. 그런 측면에서 적어도 강단의 관습에 익숙한 저한테 사실 맥맨의 논증 방식은 퍽 익숙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Covington의 댓글은 이런 소크라테스적 방식이 현대 사회, 적어도 신문, TV, 유튜브 등의 매스 미디어에서는 잘 통할 수 없음을, 오히려 역효과만 낳을 것 같다는 심증을 주는 것 같습니다.

과연 이런 생각이 옳은 걸까요? 소크라테스적 방식은 적어도 현대 대중 철학에서는 수명이 다한 걸까요? 과연 요즘 세태에서 철학자는 대중과 어떻게 소통을 해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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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네요. 유튜브 썸네일들이 어그로를 끌어야 조회수를 높일 수 있는 것처럼, 철학도 요즘은 어그로를 끌어야 하는 시대인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약간 다른 맥락인 것 같긴 하지만, 저는 굳이 ‘등에’ 역할을 자처하기보다는 스피노자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게 더 좋지 않나 싶네요

스피노자는, 타인들이 그에게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들이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는 단지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일깨우고, 보게 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제3의 눈으로서의 증명은 요구하거나 심지어는 설득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지 영감을 얻은 이 자유로운 전망을 위해 안경을 만들거나 안경 렌즈를 세공하려 할 뿐이다.(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26-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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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눈에는 마치 여유(참을성)가 고대에는 있었고 (현대의 많은 문제들로 인해) 현대에는 사라진 것처럼 말하면서, 여유의 문제를 사람의 문제가아니라 시대의 문제로 돌리는 비겁한 주장으로 보입니다.
물론 현대적 삶의 방식이 여유(참을성)를 갖기에 부정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에 충분히 동의하나, 동시에 주지해야할 사실은 그런 여유(참을성)는 소크라테스의 시대에도,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느 인류 역사에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시대에 따른 문제일까요 아니면 인간에게 딸린 문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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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게 맞다면, 철학이야말로 발생론적으로는 여유, 여가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요. 물론 그렇다고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만 철학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지만, 철학이 여유와 큰 관련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그래서 여가가 주어지는 귀족들이 많이 하던 것이 철학 아니겠습니까. 노예들이 철학을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요. 에픽테토스가 노예로 태어나긴 했지만, 그 자신의 철학대로 몸의 종속에 구애받지 않은 정신적 여유가 있던 사람이라 철학자로 죽은 것 아닐까 합니다. 에픽테토스가 가지고 있던 그런 정신적 여유를 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길 희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아요. 오늘날 명목 상 노예는 여러 나라들에서 사라졌지만, 실제로 생활을 들여다보면 끊임없이 무언가에 종속되어 그것의 강요와 명령 속에서 살고 있으니 기능적인 노예는 굳건히 존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속박을 풀어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인지도 의문스럽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본성 상 자연적인 방식으로 살다가 죽는 것이 더 좋을 지도 모르지요.

오히려 Covington의 댓글은 다른 흥미로운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 같아요. 옛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혜란 것은 고정된 지식의 묶음이 아니라 적절한 적용에 있다고 하잖아요? 공자가 인에 대해 자로가 물을 때 다르게 답하고 안회가 물을 때 다르게 답하듯, 붓다가 '시교'를 강조하여 듣는 자의 상황과 조건에 따라 설하듯, 소크라테스가 대화자의 태도와 수준에 맞추어 문답을 행하듯, 진정 지혜로운 자라면 자신이 설득하고자 하는 바와 설득하고자 하는 대상, 그리고 설득을 위해 선택한 매체 등의 본성을 잘 고려해서 말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그런 점에서 맥맨이 일간지에 도발적인 주장을 하면서도 그 '대중적' 반응에 대해서 개탄하는 것이 여러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할 겁니다. 어떤 점에서는 그의 부분적인 무지 내지는 부족한 지혜를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구요. 그게 Covington의 지적이겠지요.

이 질문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라면 지혜에 그 답이 있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대중을 향해 연설한 유일한 사례가 그의 <변명>일텐데요. <변명>의 종지부를 다시 읽어보는 것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것 같습니다.

ἀλλὰ γὰρ ἤδη ὥρα ἀπιέναι, ἐμοὶ μὲν ἀποθανουμένῳ, ὑμῖν δὲ βιωσομένοις: ὁπότεροι δὲ ἡμῶν ἔρχονται ἐπὶ ἄμεινον πρᾶγμα, ἄδηλον παντὶ πλὴν ἢ τῷ θεῷ. Apol. 42a.
하지만 이젠 시간이 왔군요. 난 죽으러, 당신들은 살으러 갈. 우리 중 누가 더 좋은 일로 가는지는 모두에게 확실치 않지요, 신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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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식견이라 괜한 말을 더 보태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만, 과연 소크라테스적 방식의 핵심이 정말 도발적인 질문들을 던지는 것에 있는 것인지는 좀 의문스럽네요. 만약 우리가 소크라테스적 방식을 플라톤의 대화편에서 전해진 그 대화법으로 받아들인다면 말이에요. 사실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가 다짜고짜 도발적인 질문이나 논제들을 던진 것 같지도 않아보이고, 그런 도발적인 것들을 제기하는 것 자체에만 목적을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요.

오히려 소크라테스적 방식은 대화 상대자와 공동 연구를 잘 이뤄나가기 위해 난제나 걸림돌을 검토하는 방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적 방식은 다양한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1) 논제를 제기하는 사람과 그 대화 상대자 사이에는 적어도 공통적인 지평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2) 논제를 제기하는 사람과 대화 상대자 모두 그 지평에 대한 일정 수준의 앎이라도 갖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3) 논제를 제기하는 사람과 대화 상대자가 공동의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의도 또한 마찬가지로 있어야 하지 않나 싶네요.

만약 이것이 충분히 수용될만한 입장이라면 맥맨의 문제는 이 세 가지를 모두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이러한 점에서 철학이 단순히 도발적인 논제나 질문을 쏟아붓는 활동이 아니라는 게 더 드러나는 거 같아요. 사실 도발적인 말을 하는 게 철학의 본령이라면, 네이버 뉴스 댓글창들도 아카데미아 정도로 봐야 할테니 말예요. 오히려 철학의 핵심은, 플라톤이 지적했던 것처럼 "근거를 대는 것(logon didonai)"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도발적인 것들은 단지 사실상 철학에 부수적인 것은 아닐까 생각해요.

추가적으로, 맥맨의 문제는 도발적인 문제를 던졌다는 점에 있는 게 아니라 도발적인 문제에 대한 해명이 요구되어야 하는 지점에서 뒤로 후퇴한 것에 있지 않나 싶어요. 간략하게 말하면, 유체이탈 화법 같이 보입니다.

이건 정말 무책임하지 않나 싶습니다. 맥맨의 이러한 반응이 오히려 철학과 대중을 더 멀리 떨어뜨리는 것 같아요. 자신의 도발적인 논제를 문제삼는 사람들을 "내 논증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문제의 핵심을 건드리지 못한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자신을 옹호했던 사람들과 저들을 갈라치기 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좀 과한 반응이겠지만, 저는 맥맨의 이 반응이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고찰한 철학자'가 '이 문제들을 잘 고려하지도, 고려할 필요도 딱히 없는 다른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왜 일방적인 비난이 문제가 되고, 이 사람들이 넘겨 짚은 핵심 논증이 뭔지 밝혀주는 것도 논제를 제기한 사람의 책임은 아닐지... 이 지점에서 Covington의 댓글이 시사하는 점이 참 많습니다.

사실상 Covington의 지적은 어떤 태도를 문제 삼는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소한 진정성이 있어야 하고, 이 진정성은 문제를 던진 사람 자신이 초래한 또다른 문제, 혹은 난감한 상황에서 자신을 떼어놓지 말아야 한다든지, (지적 배경의 격차나 다른 조건들로 인해서) 자신의 논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에게만 친숙한 문제를 던져놓고 '왜 저들은 내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지?'라는 태도를 취하지 말아야 한다든지 말입니다. '도발적'인 것을 제기하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활동인 변증, 토론, 그리고 그를 위해 요구되는 솔직하고도 진정성 있는 태도를 경시하면 안된다는 것 같아요. Covington의 마지막 문장이 상당히 의미심장하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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