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 살짝 김이 빠진 감도 있지만, 한동안 영어권 철학계에서 '학술지 글쓰기'로 대표되는 강단철학의 현황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화두였습니다. 이를 본격적으로 촉발시킨 계기는 널리 화제가 된 Christine Korsgaard의 2022년 존 듀이 강연이었던 같은데요. 저는 강연록 전문을 읽지는 못했는데, 제가 접한 바로는
철학계의 전문화 및 분업화 조류에 대한 비판
학술지 동료 평가 제도에 대한 비판
학술지 논문 등에서 두드러지는 '나쁜 글쓰기'에 대한 비판
등이 여러 커뮤니티에서 논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강연록 전문은 구글 검색해보면 나옵니다.) 사실 관련 내용은 이미 서강올빼미에서도 익히 논의되었던걸 고려하니 기시감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조류 가운데서 더 후속 논의가 또 나온 것 같은데요. 특히 이른바 '학계의 나쁜 글쓰기'에 초점을 두었지만, 제가 느끼기엔 소위 '강단철학' 전반에 대한 비판적 논평으로도 읽히는 Regina Rini의 글이 또 화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학술지 논문의 딱딱한 글쓰기는 나쁘다!'는 한국만 치더라도 꾸준 떡밥이기 때문에 그리 새롭지는 않습니다만, 여기서 이른바 '학술 권력'의 문제까지 읽어내려는 것을 볼 때에는 사실 좀 갸웃하게 되는게 있습니다. 위 글의 댓글들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오고갔는데요.
영어권 출신이 아닌 '변방 출신'의 입장에서 이런 문제는 또 다른 결을 띠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이런 '탈강단' 조류에 대한 Francesco Berto의 날선 반론이 또 눈길을 끌었는데요.
익명의 동료 평가야말로 제가 일자리가 있는 이유랍니다. 제가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할 때는 제 신상 및 "dirty porn past" 시절(a.k.a. 제3세계 박사학위)을 숨길 수 있었다는 점 말이죠 . 이렇게 엘리트주의적인 환경에서 말이에요. 누가 '익명의 동료 평가를 없애야 한다!'라고 말하는걸 보시면, 일단 그 사람이 박사 학위를 어디서 취득했는지부터 살펴보세요.
학술적으로는 "제3세계"라고 본인께서는 여기시는 곳(=이탈리아)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현재는 St Andrews 철학과 교수라는 학계 피라미드 최정점에 올라선 학자의 이런 논평은 마찬가지로 결코 "제1세계"라고 할 수 없는 한국 학계를 배경으로 하는 입장에서도 참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얼마전 '언어 권력'에 대해서 서강올빼미에서 이뤄졌던 논의가 생각이 나기도 했구요.
이처럼 이른바 '학술 중심지'에서 일어나는 '탈강단' 조류에 대해서 (아마도) '변방 학계'에 속한 우리들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여러분들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저는 Berto의 주장에 공감이 되네요. 사실, 익명의 동료 평가가 성의 없이 이루어지는 게 문제인 것이지, 익명의 동료 평가 자체를 없애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도대체 익명의 동료 평가를 배제하고 나면 어떤 방식으로 질적인 평가를 할 수 있을지, 저로서는 뚜렷하게 떠오르는 방법조차 없네요.
저 Regina Rini의 글은 진짜 신랄하게 잘 썼네요. 그 말대로 학계가 모종의 길드처럼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글쓰기 형식을 가지고 그들만의 리그를 열고 있는 듯 보일 수 있고, 학계랑 상관 없는 사람들이 학술지 논문을 보면 확실히 낯설고 이상해 보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일단 그래도 저는 학술지 논문의 글쓰기 방식에 호의적인 편입니다. "Let x be S.." 같은 정의 내리기라든가, 가상의 반대자를 가정하는 논의라든가, signpost라든가 하는 것은 사실 글의 장황함이나 모호함을 줄이고 명료성과 정확함을 높여 내용이 한눈에 잘 들어오게 하기 위해 고안된 형식들이죠. 당연하게도 남용하면 Rini가 비꼰 것처럼 괴상한 글이 나오겠지만, 필요할 때 잘 쓰면 그것만큼 깔끔한 글쓰기 스타일도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특히나 학문이라는 전문적이고 복잡한 내용을 다루는 씬이라면요.
철학계가 자기 내부의 불필요한 복잡성을 줄이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일 수 있고, 또 비전공자들과 원활하게 교류하기 위해 쉬운 언어를 고안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철학은 학문으로서 머물러 있어야지 철학 자체가 강단 밖을 나가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외부에서 보기에 거추장스러워보이는 용어들과 형식들은 따지고 보면 고도로 복잡한 내용을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들인 경우가 많고, 사실 그런 장치들은 '형식'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이 학문으로서 성립하기 위한 울타리 역할을 합니다. 학자들이 대중을 위한 입문서를 쓸 때 서술상 정확도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도 거기에 있죠. 익명 동료 평가 제도에 관해서도 Francesco Berto의 입장이 조금 더 공감이 되네요. 저도 이 제도를 없애버리기보다는, 심사자마다 평가가 들쭉날쭉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완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글을 다 적고 나니 거의 강단철학의 열렬한 대변자가 된 것 같네요. 저도 복잡한 내용을 정확하고도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교수법이라든가 대중과의 교류라든가 하는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특히 비전공자와 전공자의 문턱에 있는 학생들의 교육이라는 관점에서 이런 부분은 철학 선생이라면 의무적으로 고민해야 할 부분이죠.
마지막으로, 만일 제가 변방 사람 중의 하나로서 중심 사람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에 조언을 해야 한다면, 게임의 규칙을 일부러 바꾸거나 느슨하게 하기 보다는 자기들 게임을 좋아하고 잘하는 변방 출신 철학자들을 좀 더 많이 키우라고 조언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필요에 따라 규칙의 변화도 자연히 일어나지 않을까요? 비서구사상과의 교류를 통해 철학의 외연과 내포가 변화하고 확장된 것처럼요.
불교 경전의 경우 종류가 매우 많다 보니 아주 심플하고 우화가 많은 초기 경전부터 극도로 논리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경전까지 종류가 다양합니다. 그러나 모두 다 그 쓰임새가 있다고 인정을 합니다. 학문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개념과 언어로 기존의 틀을 깨고 나오다 보면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자신의 논변을 펼치고 또 그런 논변을 기존의 역사적 축적물들을 인용해서 비교하면서 어려워 진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의 학술논문은 엄밀한 논변한 새로운 생각을 담을 고농축 언어를 사용하되, 다른 한편으로는 오해의 여지가 있더라도 일상적으로 풀어서 쓰는 책들도 필요로 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실 아주 어려운 철학 논변들도 논변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어려운 말들을 늘어놓지만, 논변의 입증을 종교의 진리처럼 그냥 받아들이는 상황이라면 그냥 쉬운 말로 그 핵심 요지를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