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죽음 개념: Sterben과 Ableben의 차이

메일로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에 관해 질문을 주신 분이 있어서 그에 대한 답변을 써 보았습니다. 저는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가장 많이 오해되는 개념이 바로 '죽음'이라고 생각하는데,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이 내용에 관해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는 글을 써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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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1은 사회 심리학자 셸던 솔로몬(Sheldon Solomon)의 글이네요. 저는 이 글이 전반적으로는 하이데거를 틀리지 않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특별히, 글 초반부에서 하이데거가 에머슨 같은 미국 초월론자나 제임스 같은 실용주의자와 오버랩된다는 설명을 저자가 들었다고 하는 걸 보면, 저자가 미국 철학계에서 하이데거를 해석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죽음'과 관련된 부분의 해석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Angst results from the awareness (which need not be explicit) of the inevitability of one’s death: a uniquely personal event that cannot be overcome and marks one’s complete and utter obliteration. (인용자 강조)

라고 설명하지만, 이 부분은 옳지 않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이 결코 아닙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하는 'Ableben'이라는 용어와 하이데거 자신이 주제로 삼는 'Sterben'이라는 용어를 구분합니다. (전자는 한국어로 '끝나버림'이라고 번역되고, 후자는 '사망'이라고 번역됩니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관심을 가지는 'Sterben'이란 우리 자신의 현재 삶을 이루고 있는 조건들의 부정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 아무런 확고한 토대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래서 내가 언제든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죽음'이고, 그 사실에 대한 자각이 '불안'입니다. (가령,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도 언제든지 파산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죽음'이고, 그 사실에 대한 자각이 '불안'입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언젠가 우리 수명이 다하게 되는 특정 사건에서 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매 순간 죽음과 만나고 있고, 매 순간 죽습니다.2

그래서 저는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통찰을 얻어내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많은 대중적 해설들이 하이데거를 일상적인 ('끝나버림'으로서의) 죽음 개념과 연결시키긴 하지만, 이런 해설들은 하이데거 철학의 요점을 잘못 잡고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것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우리 삶이 언제든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모습에는 아무런 안정된 토대나, 확증이나, 보장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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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일을 주신 분이 저에게 첨부하신 인용문
  1. 실제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현존재는 그가 존재하고 있는 한 이미 자신의 아직-아님으로 존재하듯이, 그는 또한 언제나 이미 그의 종말로 존재한다. 죽음으로 의미되고 있는 끝남은 현존재의 끝에-와-있음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라는 이 존재자의 종말을 향한 존재 [종말을 향해 있음Sein zum Ende—인용자 주]인 것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현존재가 떠맡는 그런 존재함의 한 방식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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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이란 <원피스>의 아래 명장면에서 Dr. 히루루크가 말하는 '죽음' 개념에 가까운 거죠. 내가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이라고 부를 만한 고정된 대상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중요하다는 점에서요. (물론, 그렇다고 하이데거와 Dr. 히루루크의 유비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곤란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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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선생님, 랜선신학교 진행 중이신 강의 잘 듣고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를 한마디로 '본질의 부재'로서 설명하신 데는 수긍이 가나 (한국어 번역 관행과 상관 없이 일단 독일어에서 Ableben은 확장된 문학적 의미로서의 "사망"이고, Sterben이 바로 그 육체적 "죽음"을 가리킵니다), 선생님의 관점은 인간 삶의 '상대적 가변성'만을 중시하신 나머지 그의 절대적 유한성(finitude), 즉 하이데거가 진정으로 강조하고자 한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존재자(whose being by its very nature is at issue)"로서 현존재의 의미는 유폐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데거의 죽음은 단순히 "삶을 이루고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들의 부정"이 아니라 '있을수있음'(Seinkönnen), 즉 현존재의 '존재 자체'가 문제시되는 계기로서 육체적 죽음이라는 사건에 명확히 기초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처럼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앞당겨서 현재화하면서 때로는 불안으로, 때로는 여러 가지 일들에 관심(Sorge)을 가지며 살아간다. 이러한 시간이해가 가능한 것은 바로 죽음이라고 하는 현상 앞에서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가는 현존재의 삶의 방식 때문이다. [⋯] 칼 뢰비트(K. Lowith)도 지적하고 있듯이, 하이데거가 무를 주제화한 이유는 한 마디로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서동은 교수, '존재와 무(無), 그리고 절대무(絶對無)']

따라서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는 위같이 감상적인 애니 인용구가 아니라,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와 같이 실존적 사생결단을 압박받는 순간에서 존재의 근원적 의미를 묻는 장면을 예시로 들어 설명되어야 합니다.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은, 선생님이 추구하시는 듯한 "자기 동일성이냐, 타자와의 관계냐"와 같은 물음 이전에 나만의 고유함(eigenste)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무화로서 생물학적 죽음을 정직하게(Eigentlich) 대면하지 않고 타자의 시선만을 신경쓰는 삶이 바로 하이데거가 전면적으로 비판한 '비본래적(uneigentlich) 실존'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Heidegger is neither the first nor the last person to argue that the freedom and the quality of one's living depends upon how one confronts and comes to terms with one's mortality. But if this confrontation with mortality is the 'only' way to become free for one's most possibilities, it means that you and I, the children of the age of individualism, remain essentially unfree and ontologically unindividuated as long as we have not tested our current engagements in the world, our life-styles, our current projects, and our relations with others in the fire of our affective-theoretical realization that "I can die right now." [Dan Magurshak, 'Heidegger and Edwards on Sein-Zum-Tode']

그래서 선생님의 하이데거 이해는, 앞서 후기 하이데거의 사방세계 설명에서도 마찬가지로, 하이데거가 명백히 지시한 현존재의 유한성의 사태를 일상적 경험의 지평으로 부당하게 치환시킨 나머지 '존재 자체'의 역사적 탈은폐에 집중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피상적인 인생철학의 영역으로 곡해하시게 되는 것 같다는 우려가 따릅니다.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에 대한 이 해석은 단순히 "대중적 해설들"의 언어가 아니라 정통 학자들의 논문들에서도 적용되는 관점임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입장에 대한 1·2차 텍스트 근거를 엿볼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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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글을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생물학적 죽음 내지는 Ableben도 다른 우리 유한한 삶의 조건들 중 하나가 되겠군요? 생명은 재물처럼 내일 사라질 수도 있으니 말이죠. 달리 말해 생명과 재물과 연인, 친구들 모두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한 지위가 되는 건가요?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비본질적인 것들이란 점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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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반대이지요. 재물·연인·친구들은 내가 ‘있는 한’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돈은 사라져도 또 벌면 됩니다. 애인도 새로 구하고, 친구도 새로 사귀면 되지요. 오직 육체의 죽음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의 ‘고유한(eigenste) 있음 자체’를 송두리째 앗아갑니다. 하이데거에게서 전자의 ‘있는 것들’이 “존재자(Seiendes/beings)”이고, 후자가 바로 있음 자체, 즉 대문자 “존재(Sein/Being-itself)”이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없어짐을 회피하는 “존재 망각”의 비본래적 실존을 영위하기 때문에,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라는 경구가 하이데거 학자 분들의 글에서 그토록 일제히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윤 선생님의 설명은 이처럼 하이데거가 경고한 부분을 간과하신 채 존재의 문제(사느냐 죽느냐 = 있느냐 없느냐 = to ‘be’ or not to ‘be’)를 단순히 세속적 ’존재자의 문제’(돈 버느냐 파산하느냐, 잊혀지느냐 알려지느냐)로 계속 치환시켜 전달하고 계시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지요. 하이데거 독해에 있어 가장 기초적인 내용입니다. 다른 독자 여러분께서 혼동 없는 개념 정리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존재와 시간 강독》, 특히 죽음 개념에 대한 설명 부분을 직접 읽어보시고 스스로 판단하시면 됩니다. 하이데거 학자 분께 직접 말씀을 구하였으니, 정리가 되는 대로 윤 선생님의 답변 글에 드러난 심각한 오독과 문제점에 대해 주석적 근거와 함께 상세히 반론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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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기엔 Martin님이 좋은 비판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주장 <Youn은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세속적 존재자의 문제로 치환하고 있다>가 도출되는 근거를 제시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Youn님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제공하시기 이전에, Youn님의 글이 위의 주장처럼 정리가능한 이유를 말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엔 Martin님이 허수아비 때리기 논증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분명히 해야할 점은 (1) 이 글은 죽음 개념에 대한 어떠한 물음 X에 대한 답변일 뿐, 자세한 글이 아니기에 특정 포인트에 맞추어져서 쓰인 글이고, 우리는 물음 X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른다. (2) "감상적인 애니 인용구"을 곧이 곧대로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강조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첫번째 글에서 반박 지점을 찾는 것 보다는, 보론이자 상세히 적힌 그의 두번째 글 속에서 Martin님의 주장 <Youn은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세속적 존재자의 문제로 치환하고 있다>를 도출해내는 것이 훨씬 좋은 비판일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Youn님은 하이데거의 현존재의 유한성에 관한 기술을 통해 죽음 개념은 존재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로 봐야함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Martin님의 반박과는 정반대로 그는 "죽음 개념이란 결코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던가 "현존재를 '전체'로서 완성시키는 사건을 '죽음'이라고 부르면서, 일상적인 죽음 개념을 지나 존재론적 죽음 개념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것이 제2편 초반부의 내용인 것입니다"라면서 죽음개념을 단순 생물학적 문제(live or live not)도, 세속적 존재자의 문제도 아니라, 현존재의 본질과 관련된 존재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Youn님의 주장은 Martin님이 하고자하는 반박지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Martin님에 따르면 "기초적인 내용"에 부합하는 죽음 개념을 기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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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모든 의문이 해소되시도록 윤 선생님께 있어 (a) 개념의 혼동과 (b) 문헌 오독의 문제를 상세히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생물학적 죽음” 건은 현역 하이데거 학자 분들께서 한마디로만 대답해주시면 그냥 깔끔하게 끝날 문제이고, 진짜 근본적인 문제는 “존재와 존재자의 차이”가 전혀 엄밀하게 사유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건 단순히 쪽글이나 캐치프레이즈 재생산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sophisten 님도 언급하신 “유한성”이나 “현존재의 본질” 류의 개념은 적어도 하이데거에게서 ‘육체적 죽음 사태’를 배제하고 서술할 수 없으며, 이는 전세계 하이데거 학계 전체가 공유하는 ‘상식’입니다. 윤 선생님은 니힐리즘 내지 사르트르 실존주의와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을 명백히 혼동하고 있습니다. 주중에 정리가 완료될 때까지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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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솔직히 하이데거 전공자도 아니고 현상학도 잘 모르니 그냥 보고 있었는데, Youn님이 하이데거를 "심각하게 오독"하고 있다거나, 사르트르류 실존주의와 기초존재론을 혼동하고 있다거나, "하이데거 학계 전체가 공유하는 상식"을 저버리고 있다는 표현까지 쓰시면서 맹렬하게 비난하고 계시니, Martin님께서 마땅히 그 정도 수위의 비판에 걸맞은 근거를 가져오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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