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철학 담론은 옆집 이웃 아저씨의 인생설교와 비슷한 신뢰성을 가졌다"

(안녕하세요. 제목은 어그로 끌려고 적었답니다. 제가 최근에 youn님의 글들을 읽다가 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한 심리학자 솔로몬의 해석을 비판한적이 있으셨는데요.

저의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에 편지를 적어서 그분에게 보내서 의견을 여쭈어 본적이 있었답니다. 여기 솔로몬 교수님의 편지 전문입니다)

"Thank you for taking the time to convey you thoughts about my take on Heidegger – I concur with your conclusion that: “Thus, in my view, your stance holds as much credibility as a neighbor's life advice, marked by a certain lack of confidence.” –

This is my definition of philosophical discourse in general – what we describe as “hipster party chatter” in the last chapter of The terror (Living with Death) –

Heidegger goes to enormous length to differentiate between actually dying and anticipation of death – but so does Ernest Becker in The Denial of Death – and following Becker, terror management theory is not about death per se, so much as the fact that intimations of mortality (conscious and unconscious – see Death Near and Far in The terror) are central determinants of human activity.

Then you summarize my view that: “Heidegger, however, suggests that acknowledging death can paradoxically free us. Contemplating mortality encourages us to live more fully, awakening us to the true essence of life. While anxiety remains, it transforms into a source of vitality, pushing us to embrace life more passionately. Through this process, death becomes not a fear but a catalyst for living with fervor, allowing us to accept our mortality” –

I stand by this view based on part 2 of Being and Time – which as Taylor Carnap argues in Heidegger’s Analytic – most philosophers ignore because it is “too psychological” –

And frankly I care very little about the extent to which my claims about Heidegger are “accurate” in terms of philosophical discourse as much as serving as foundations for theory development that yield hypothesis that can be subjected to empirical scrutiny – e.g., the fine empirical paper that I have attached.

Thanks again for your thoughtful input here --"

시간을 내어 하이데거에 대한 내 생각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전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동의합니다. “ 내 생각에는 당신의 주장은 옆집 이웃 아저씨의 인생설교와 비슷한 신뢰성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자신도 약간 자신감이 없는 설교랄까요? ” –

이것이 일반적인 철학적 담론에 대한 나의 정의입니다. 테러(죽음과 함께 살기)의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힙스터 파티 잡담"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실제로 죽는 것과 죽음에 대한 예지를 구별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도 그랬답니다. 그리고 베커를 따르는 테러 관리 이론은 죽음 그 자체가 인간 활동의 핵심 결정 요인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암시( 의식과 무의식 – 죽음의 가깝고 먼 공포 참조)은 인간 활동의 핵심 결정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 견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 그러나 하이데거는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것을 촉구하며 그것이 우리를 역설적으로 해방시켜 준다고 주장합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에 대한 반성을 낳으며 삶을 치열하게 살게 만듭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진정 깨어나게 되며 우리가 진정 삶을 살게 합니다. 불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간은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삶의 끝없는 열정을 주는 삶의 원동력임을 깨닫게 됨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죽음을 수용할 수 있게 됨니다.” –

나는 존재와 시간에서 Taylor Carnap이 주장한 것처럼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의 2부에 기초한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그것이 "너무 심리적"이기 때문에 무시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하이데거에 대한 나의 주장이 철학적 담론의 측면에서 "정확"한 정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저는 실증적 조사 대상이 될 수 있는 가설을 산출하는 이론 개발의 기초 역할을 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귀하의 사려 깊은 의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번역은 대충 대충 했습니다. ㅠㅠ 질 안좋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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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저의 편지 전문입니다. 한국어 버전은 가감이 안되있어서 좀 공격적이네요 ㅠㅠ)

친애하는 교수님

안녕하세요.

과거 교수님의 편지들 덕분에 많은 도움을 얻었던 사람입니다.

무더운 여름에 건강하신지요.

요새 심리학계가 복제 파동에 몸살을 겪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TMT이론은 이미 너무나 많은 복제가 있었기에 메타분석을 한다고 해도 복제 파동에서 살아남을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가 심리학에 관한 전문가가 아니라서 확언은 못하겠지만 제가 알기로 TMT만큼 경험적 증거가 많은 이론은 없을것입니다.

오랜만에 이렇게 편지를 쓰게된 이유는 최근에 읽은 교수님의 글에 대해서랍니다

그 글은 죽음 "수용"에 관한 교수님의 최근 견해를 담고 있습니다. 하이데거 철학을 이용한 건데요. 저도 하이데거 철학 전공자는 아니라서 확실한 해설을 못한다는점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일단 제가 이해한 하이데거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인식을 할수 있으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불안을 생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가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의 잠재력을 썩히며 사회의 관습과 성향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것을 촉구하며 그것이 우리를 역설적으로 해방시켜 준다고 주장합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에 대한 반성을 낳으며 삶을 치열하게 살게 만듭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진정 깨어나게 되며 우리가 진정 삶을 살게 합니다. 불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간은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삶의 끝없는 열정을 주는 삶의 원동력임을 깨닫게 됨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죽음을 수용할 수 있게 됨니다.

제가 하이데거 전공자가 아니라서 저의 교수님의 하이데거 해설이 정확한지 확신이 없으니 교수님도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아무튼 TMT이론의 대가인 교수님께서 죽음을 수용하게 만들 대단한 방법을 하이데거한테서 찾은 걸로 보입니다. 저도 참으로 기쁘네요. TMT이론은 이런 부분에서 취약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제가 하이데거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까 관련 글들을 찾고 있었는데요. 운 좋게도 서강대에서 하이데거 관련 석사를 따신 분에게 편지를 보내었는데 답장을 받았답니다. 저는 하이데거를 잘 모르기에 관련 전공자분의 편지를 받으니 정말로 기뻤는데요. 읽어보니 참으로 큰 충격을 받았답니다. 관련 글은 이렇답니다.

"메일로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에 관해 질문을 주신 분이 있어서 그에 대한 답변을 써 보았습니다. 저는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가장 많이 오해되는 개념이 바로 '죽음'이라고 생각하는데,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이 내용에 관해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하는 글을 써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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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1은 사회 심리학자 셸던 솔로몬(Sheldon Solomon)의 글이네요. 저는 이 글이 전반적으로는 하이데거를 틀리지 않게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특별히, 글 초반부에서 하이데거가 에머슨 같은 미국 초월론자나 제임스 같은 실용주의자와 오버랩된다는 설명을 저자가 들었다고 하는 걸 보면, 저자가 미국 철학계에서 하이데거를 해석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죽음'과 관련된 부분의 해석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Angst results from the awareness (which need not be explicit) of the inevitability of one’s death: a uniquely personal event that cannot be overcome and marks one’s complete and utter obliteration. (인용자 강조)

라고 설명하지만, 이 부분은 옳지 않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생물학적 죽음이 결코 아닙니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생물학적 죽음을 의미하는 'Ableben'이라는 용어와 하이데거 자신이 주제로 삼는 'Sterben'이라는 용어를 구분합니다. (전자는 한국어로 '끝나버림'이라고 번역되고, 후자는 '사망'이라고 번역됩니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관심을 가지는 'Sterben'이란 우리 자신의 현재 삶을 이루고 있는 조건들의 부정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 아무런 확고한 토대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래서 내가 언제든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죽음'이고, 그 사실에 대한 자각이 '불안'입니다. (가령, 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도 언제든지 파산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죽음'이고, 그 사실에 대한 자각이 '불안'입니다.) 그러니까,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언젠가 우리 수명이 다하게 되는 특정 사건에서 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매 순간 죽음과 만나고 있고, 매 순간 죽습니다.2

그래서 저는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죽음'에 대한 통찰을 얻어내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많은 대중적 해설들이 하이데거를 일상적인 ('끝나버림'으로서의) 죽음 개념과 연결시키긴 하지만, 이런 해설들은 하이데거 철학의 요점을 잘못 잡고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것은 생물학적 죽음이 아니라, 우리 삶이 언제든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모습에는 아무런 안정된 토대나, 확증이나, 보장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하이데거]는 경험적 탐구로 설명되는 죽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죽음을 자연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자연과학적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이데거처럼 죽음을 통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낯설 수 있다.(정기철,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에 대한 비판적 고찰」, 『범한철학』, 범한철학회, 2007, 209 인용자 강조)

사실 근대철학사까지 죽음은 논의의 핵심주제가 아니었다가 하이데거에 이르러야 죽음 개념이 논의의 중심개념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 사상 속에는 생물학적 죽음이 주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의학적 죽음 규정은 사망, 곧 “끝나버림” 그 이상을 말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음의 본질”을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객관적인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아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음 자체에 대한 해명에도 관심두지 않았다. 하이데거가 관심가지는 죽음은 현존재의 전체성을 의미 규정하는 존재양식이다. 하이데거가 죽음에 대한 이해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가지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 단순한 생리적 감각이나 심리적 정서 그리고 대상 없는 느낌의 흐름이 아니라, 대상 없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현존재를 느끼고 발견하는 존재론적인 방식이다. 하이데거의 의도를 그대로 옮기자면, 그는 “현존재의 종말을 향한 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를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정기철,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에 대한 비판적 고찰」, 209-210 인용자 강조)

이전 글에서 이미 많이 인용하였지만, 여기서도 다시 인용합니다.

(7.1) Sterben과 Ableben은 구별되어야 한다.

"죽음"이라는 말로 하이데거가 언급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 죽음은 현존재가 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게 되자마자 떠맡게 되는 존재함의 한 방식이다." (289/245). 존재함의 한 방식인 죽음? 우리는 보통 죽음을 존재하지 않음 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죽음은 미래에 떨어져 있는 어떤 사건이 아니다 . "사망함(das Sterben)은 사태져-있음(Begebenheit)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이해할 현상이다 …"(284/240) 그렇다면 "더-이상-현존할-수-없음의-가능성"과 "순연한 현존-불가능성"은 삶의 종료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 […] 만약 "죽음"이 이러한 실존적 상황에 관계된 것이라면 하이데거는 인간의 삶을 다하는 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하이데거는 그것을 삶을-다-보냄 (demise; das Ableben)이라 부른다. (W. 블라트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입문』, 한상연 옮김, 서광사, 2012, 287 인용자 강조)

(7.2) 하이데거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생물학적 죽음 개념과는 다른 의미로 죽음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말을 어떤 유별난 방식으로 사용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한 첫 번째 철학자인 것은 아니다: 키르케고르 역시 이 말을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을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 번햄이 "혼수상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과 비교할 만한 강력한 은유적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이 용어를 이러한 은유적 의미로 사용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존재론적 논의를 "그저 고양하기나" 하는 문학작품으로 평가절하할 위험을 안게 된다. 하이데거는 그가 "죽음"이라는 말을 존재론적 바탕 위에서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려 한다 . 죽음은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현존재의 끝을 뜻한다. 삶을-다-보냄이 삶의 끝을 의미하듯이 말이다. "대체 어떤 의미에서 죽음을 현존재가 끝남으로서 파악해야만 하는지 의 물음이 더욱 절실해진다."(289/244)(W. 블라트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입문』, 259쪽 인용자 강조)

제가 찾아보니 말입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생물학적인 죽음"으로 쓰지 않았습니다. 사실 철학자들이 이런 단어 정리를 아주 까다롭게 한다는점을 고려하면 이해 불가능한 상황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쇼펜하우어는 의식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철학의 핵으로 사용하지만 그가 사용하는 의식은 "자유의지"나"우리의 개인적 자아"를 거의 함축하지 않으며 세상을 돌아가게하는 어떠한 관념적인 무언가를 "의식"이라고 하며 니체는 권력을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것이 아닌 "세상을 움직이는 어떠한 힘으로" 이해합니다. 일반인들의 언어 사용으론 바로 오독이 일어나는거죠. 그런 측면에서 보면 하이데거를 솔로몬 교수님이 오독한것은 그럴만한 상황이라고 가정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하나 발생합니다.

1.솔로몬 교수는 "자신이 해석한 하이데거"를 참된 하이데거로 가정하고있다.

2.교수님의 주장을 뒷받침하거나 뒷받침할수있는것들은 대략적으로 세가지다

a.하이데거의 권위

b.경험적 증거

c.자신의 직감

a는 그 주장이 하이데거의 주장이 아님이 입증되었기에 더이상 사용될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2번을 한번 검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경험적 증거가 있습니까? 이에 관해서 저는 확언할수 있습니다. "없습니다."

"I want to do some research to see whether this state that Heidegger describes is potent enough that we can demonstrate its effects in an empirical setting."SHELDON SOLOMON Heidegger - Google 검색

여기서 솔로몬 교수님은 스스로가 하이데거의 경험적인 증거를 "찾고 싶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간단합니다. 그에게는 그런 증거가 없다는 것이죠.

이게 2021년 자료긴 합니다만 제가 google scholar에서 검색해도 나오는건 없더군요? 제가 못찾을걸수도 있지만 아마도 아직도 경험적인 증거는 안나왔나 봅니다.

이건 꽤나 문제입니다. 만약 경험적 증거가 없다면 이것을 신뢰성 있게 만드는게 별로 없기 때문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솔로몬 교수가 왜 죽음 심리학의 대가인 베커 교수의 견해를 "신뢰성"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경험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위대한 철학자나 사상가의 견해는 통찰력 있고 타당성이 있을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없이 많이 생각을 해내었으며 그들의 논리는 타당하며 그들은 훌륭한 통찰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근데 이런 사상가들 조차도 틀릴 때가 많으며 경험적인 통찰에서는 유효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기에 TMT 이론 또한 경험 증거가 없던 시절에는 무시당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만약 이런 통찰이 아까 말한 하이데거와 같은 거장의 깊은 사유와 논리 전개도 아니라면 이것은 이런거를 바라는것과 같습니다.

상대성 이론을 이해한 어떤 철학자가 상대성 이론을 말 그대로 "상대주의"로 이해했다고 합시다. 그러니 모든 것은 고정되지 않았으며 상대적이다. 물리학의 법칙들 까지도

이렇게 이해한것이 상대성 이론을 잘 이해한 것입니까? 잘 해봐야 끼워 맞추기이며 나쁘게 말하면 멍청한 오독입니다. 근데 웃기는것은 이런 오독들이 철학계에서 꽤나 만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리학자들은 그들의 해석을 비웃으며 그들의 철학 또한 멍청이로 치부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독을 했다는 것은 그들의 사고 자체가 견강부회로 보여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야매로 헬리콥터 설계도를 오독해서 비행기를 만들었는데 그게 제대로 날기를 기대한것과 다름이 없죠. 물론 그런것들이 그럴듯해보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것들은 결국 제대론된 검증을 통과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유란 연금술이 아니기 때문이죠. 사유의 근거란 제대로된 체계이며 제대론된 체계란 제대로된 이해에서 나옵니다. 분명 어떤 경우에는 어떤 사유를 생각할때 그걸 기반으로 새롭고 대단한걸 만들수 있습니다. 재해석이라고 하는 작업이죠. 꽤 흔합니다. 처음 주장한 사람과 완전히 다른걸 만드는거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면 이것을 재해석이라고 부르는게 거의 불가능하다는것 입니다. 왜 불가능할까요? 한번 이런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시인이 자신의 시에서 "세상을 세탁하는법"이라는 시를 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읽은 세탁기 전문가가 그 시를 기반으로 세탁을 위한 "실용적인" 방법론을 만들었다면 그게 제대로된 방법론입니까? 혹은 재해석입니까? 이것은 정말로 웃기는 일이지만 지금 솔로몬 교수님이 저지르는 오류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문학 범주에 속하는 "비유"를 경험 혹은 과학 범주에 속하는 "논증"으로 해석하고 있는것 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들에 나오는 비유적인 표현들을 소위 "다큐"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시를 제대로 이해한것도 아니며 그것을 재해석한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논리가 통한다면 "내 동생은 강아지"라는 표현은 진정으로 동물류의 속성을 가진 새로운 호모 사피엔스를 묘사하는것으로 "재해석" 될텐데 이것이 과연 정당한 일이 되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내 강아지 동생은 밥을 개걸스럽게 먹는다"는 어떤 형이나 누나가 자신의 동생을 익살스럽게 묘사하는것이 아닌 동물류의 속성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가 밥을 먹는 장면을 묘사한 과학적 혹은 경험적인 관찰로 어떻게 "재해석"될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한 어떻게 그런 기묘한 "재해석"이 실제로 동물류의 속성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에 대한 연구에 어떠한 통찰이나 이론 혹은 경험적인 증거를 제시할수 있겠습니까? 제가 과장된 비유를 한것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솔로몬 교수님의 주장은 지금 하나의 범주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것입니다.

왜냐하면 하이데거가 실제로 이렇게 죽음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실제적인 생물학적인 죽음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마치 동생을 바라보는 가족들이 그를 "강아지"로 묘사할때 생물학적인 개라는 개념에 대해서 언급하거나 말하고 있지 않은것과 비슷합니다. 그것들은 비유이며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적인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그들은 죽음이나 강아지란 개념을 비유적 혹은 문학적으로 사용하고 있는것입니다. 반대로 과학자들과 연구가들은 죽은 혹은 강아지란 표현을 경험적 혹은 생물학적으로 생각하는것이죠. 그러니 그들은 전혀 다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것인데 만약 후자의 사람이 전자의 전혀 경험 혹은 과학적인 의도가 없는 "비유 혹은 문학적인 표현을"소위 "다큐"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것을 향해서 어떤 희극적인 그러니 코미디적 인상을 가지지 않을수가 없게 되는것입니다.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인간은 갈대라고 하는 유명한 격언에서 진정 인간이 경험적 과학적 "갈대"라고 화자가 말한다고 생각하며 심지어 화자의 말에서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갈대"의 본성이나 어떠한 과학적 경험적 발견을 탐구하거나 심지어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어떤 식물학자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런 사유에서 과연 어떤 경험적 혹은 과학적으로 입증 가능한 가치있는 이론이나 진리를 발견하는 자가 있다면 저는 우리의 과학이 연금술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수가 없겠습니다.

결국 남는 마지막 근거는 c 자신의 직감입니다. 근데 문제는 아무리 전문가라도 직감을 통해서 어떠한 발견을 하기는 힘들다는 점입니다. 많은 물리학자들이 직감을 기반으로 물리학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설명하지만 그들의 직감이 거의 맞는 경우는 드문 것처럼 누군가의 직감이란 막연한 환상 혹은 불확실한 기대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더 큰 문제는 이 문제는 철학과도 연관이 있는데 솔로몬 교수님은 철학에서 전문 지식을 입증한적이 없기에 약간 더 의심이 됨니다. 또한 학자들은 마술사가 아닙니다. 스스로의 근거로서 증명되지 않은 추측들은 학자들의 것이라고 해도 신빙성을 많이 얻을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자들이란 논증과 근거로 승부하기 때문에 학자이기 때문이죠. 실제로 우주에 대해서 수학적 근거나 경험적 증명없이 나오는 것들은 아무리 대단한 물리학자라고 해도 거의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나쁘게 말하면 직감에 의존한다는 것은 마치 많이 아는 이웃집 아저씨가 인간사에 대해서 말하는것과 비슷합니다. 그에게는 사실일지라도 객관적으로 입증될 수는 없는 어떻게 보면 개인적인 믿음이니까 말입니다. 근데 더 문제가 있다면 솔로몬 교수님도 딱히 확신은 없다는것입니다.

If we could answer that, you and I could share the Nobel Prize money. Danish philosopher Søren Kierkegaard would say no. Becker’s ideas lean heavily on Kierkegaard’s notion that there’s got to be a leap of faith, a devotion to a higher power that suggests immortality is possible. But I see no reason, in principle, why there couldn’t be other possibilities. I’m thinking particularly of Martin Heidegger’s take on these matters. Heidegger was a German philosopher who came later and offered a kind of secular alternative to Kierkegaard. He says it’s quite possible to come to terms with our own mortality in a way that does not require belief in an eternal soul. His view is that we need to accept our mortality, and not just as something that will happen in a vague future moment: “Oh, I’m going to die someday.” That’s not enough. Heidegger says you must accept that you can die at any time to have what he calls a “moment of vision,” when we realize: “OK, I’m born into this world, and my lot in life really is arbitrary, yet within those constraints I can make choices. I’m going to look forward to the future and be concerned about other people around me, and life’s going to feel like an adventure filled with unshakable joy.” I like that view. I want to do some research to see whether this state that Heidegger describes is potent enough that we can demonstrate its effects in an empirical setting.

노벨상 비유와 그의 글은 그가 확신이 없음을 암시합니다. 만약 본인 조차도 확신이 없는것이라면 그의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근거들은 사실상 없다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솔로몬 교수님의 이 견해를 솔직하게 말해서 옆집 이웃 아저씨의 인생설교와 비슷한 신뢰성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자신도 약간 자신감이 없는 설교랄까요? 근데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기에 교수님의 고견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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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비판은 세가지였답니다. 아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1.하이데거에 대한 해석 자체가 틀렸기에 철학적으로 하이데거의 통찰이라고 할수 없다. 그러면 이것을 입증하기 위한 다른 근거가 필요하다
2.그러나 경험적 근거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3.마지막으로 남는 근거 후보는 직관인데 어떤 직관도 결과적으로 근거가 없으면 옆집 아저씨의 인생 설교 정도의 타당성만 있다.

인데요

제가 읽은 솔로몬 교수님의 글은... 제가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고요?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시는 것일까요?

1.나의 주장은 "옆집 아저씨의 인생 설교 수준의 신뢰성을 가진것에" '동의'한다.
2.근데 원래 대부분의 철학적 논증의 타당성이란게 그렇지 않는가? 힙스타 파티처럼 말이다.
3.나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심리학적인 이론을 만들어낼수 있는 토대인지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으며 하이데거의 '전통적'해석은 중요하지 않는다. 나는 Taylor Carnap의 해석을 지지한다.

저는 이렇게 이해했는데요. 좀 아리송하답니다. 그래서 여기 분들의 고견이 알고 싶습니다. 댓글 달아주십시오!!

그런데 하이데거에 대한 솔로몬 교수의 글의 의도는 하이데거를 근거로 자신의 이론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이데거의 철학과 자신이 연구하는 Terror management theory 에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특히 어니스트 베커와 관련하여)는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철학에 있어서는 비전문적 독자인 솔로몬 본인이 하이데거의 철학을 오해했다고 해서 자신의 전문분야인 심리학에서 주장하는 내용까지 비판하는 것은 비약으로 느끼겠지요.

The Worm at the Core: On the Role of Death in Life 는 솔로몬 교수가 공저한 2015년에 나온 심리학 관련 대중서인데 이 책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 Terror management theory는 솔로몬 교수의 CV를 살펴보면 이미 1970년대부터 연구하던 것이고 솔로몬 교수 자신은 이미 이 이론을 경험적인 검증을 통과한 이론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 이론과 적용하여 코로나 19와 관련된 형상을 연구한 논문도 출간한 것을 보면 말이지요. (Terror Management Theory and the COVID-19 Pandemic - PMC) 그러니 자신의 이론이 어떤 철학적 이론에 의해 사변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닌 (자연)과학적인 심리학 이론으로서 충분히 설득력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나저나 TMT라는 이론은 처음 들어보는데 상당히 진화심리학적인 방법인 것 같아 흥이롭네요. 심리학에는 완전히 문외한이라 진화 심리학이 여러 비판을 받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없는데 진화를 통해 형성된 생물학적 본성(?)을 근거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네요. 아마 철학을 동내 아저씨의 훈계 정도로 취급하는 자신감은 자신이 활용하는 경험적 방법론에서 나오는 자신감이 아닌가 싶습니다.

Tmt에 대해서 말하는게 아니랍니다 지금 비판 주제는 하이데거로 tmt를 정당화하는게 아니라 tmt 고유의 문제인 죽음 부정을 하이데거의 사유를 기반으로 극복하고자한 "새로운"시도를 비판한것이랍니다. Tmt를 비판한건 전혀~~아닙니다. 저는 tmt 좋아해요

실제로 이 인용문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I want to do some research to see whether this state that Heidegger describes is potent enough that we can demonstrate its effects in an empirical setting"
솔로몬 교수님이 "자신의 하이데거 이해를" 경험적으로 뒷받침할 근거를 찾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당연히 tmt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솔로몬 교수님이 생각한 하이데거의 견해를 통한 죽음 부정 극복의 과학적 근거를 찾고자 한다는것입니다

출처:https://www.thesunmagazine.org/issues/544/this-mortal-coil

솔로몬 교수님의 '하이데거를 통한 죽음 수용의 정당성을 비판했지 tmt 이론을 비판하지 않았답니다. 그분의 하이데거를 통한 죽음수용은 이 구절로 설명할수 있답니다

"그 글은 죽음 "수용"에 관한 교수님의 최근 견해를 담고 있습니다. 하이데거 철학을 이용한 건데요. 저도 하이데거 철학 전공자는 아니라서 확실한 해설을 못한다는점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일단 제가 이해한 하이데거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인식을 할수 있으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불안을 생성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가 우리가 죽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의 잠재력을 썩히며 사회의 관습과 성향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것을 촉구하며 그것이 우리를 역설적으로 해방시켜 준다고 주장합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삶에 대한 반성을 낳으며 삶을 치열하게 살게 만듭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진정 깨어나게 되며 우리가 진정 삶을 살게 합니다. 불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인간은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삶의 끝없는 열정을 주는 삶의 원동력임을 깨닫게 됨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죽음을 수용할 수 있게 됨니다."

저의 비판은 이 솔로몬 교수님의 진술의 타당성이지 tmt 이론이 아니랍니다.

제가 Being and Time… For the time being — International Society for the Science of...만 읽어보고 글을 썼네요. 작성자님이 어떤 쟁점을 지적하려는지 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솔로몬 교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인터뷰에서 지나가듯 언급한 말이고 Being and Time… For the time being 에서는 철저히 자신이 이해한 실존주의적 하이데거만을 다루는 것을 보면 철학적인 세부 사항은 그의 관심사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위의 글만 봐도 하이데거 텍스트 안에서 '불안'만을 언급할 뿐 거기에 동반되어야 할 '현존재'나 '존재물음'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결단'이 나오긴 하는데 그냥 실존적 결단 정도로 인용하는 것 같네요) 솔로몬 교수에게 있어 어디까지나 하이데거의 철학은 연구 아이디어를 얻는 하나의 방편일 뿐 그 자체로 연구대상은 아닐 테니까요. 사실 모든 심리학자가 철학을 진지하게 읽는 것도 아닐 겁니다(만약 그랬다면 Robert Sapolsky의 Determined: A Science of Life Without Free Will 은 나오지도 못했겠죠!). 솔로몬 교수가 하이데거를 더 상세히 읽었다면 《존재와 시간》2부를 참고했다면서 하이데거를 키에르케고르의 '세속적 대안'이라고 언급하지는 않았겠죠.

게다가 하이데거의 입장에서는 TMT 같은 자연주의적(혹은 실증주의적) 심리학에서 공유하는 인간관이 주요한 비판의 대상일 것입니다. 하이데거도 후설과 마찬가지로 실증과학의 침범에 대항해서 현상학적 방법론을 도입한 것인 테니까요. 솔로몬 교수는 심리학자의 입장에서 인간의 불안을 연구하는 것이니 굳이 이러한 하이데거 철학의 세부를 이해할 필요는 없겠지요. 물론 철학을 편의적으로 인용한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렵겠지만요.

친절한 응답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그런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솔로몬 교수님의 견해를 둿받침하기 위한 세개의 근거들을 검토해보았을때(이것들은 철학적 경험적 실증적 증거적 정당화 개인적 직관에 대한 의존이 있답니다) 저는 이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로서 "개인적 직관"밖에 발견하지 못했으며 이것은 솔로몬 교수님도 편지 처음에 인정했습니다

저는 철학적 순수주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단지 지금의 근거들로서는 "옆집 아저씨의 인생 충고"의 '신뢰성'을 못벗어난다는것입니다. 근데 약간 실망이었습니다. 철학을 많이 인용하고 안다는 심리학자가 "대부분의 철학 담론은 옆집 아저씨의 인생 충고의 신뢰성이거나 힙스타들의 파티다"라고 하니 솔직히 많이 실망해습니다

사실 저도 새폴스키 교수의 책과 관련해서 유튜브에 새폴스키와 다른 철학자가 토론하는 영상을 몇개 찾아봤는데 서로 자기 할말만 하는 느낌이더군요. 학제간의 대화란 모두가 해야한다고 말하지만 결국 하고 싶은 사람만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