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대표적인 하이데거 해설서들을 하나하나 뒤져서 '죽음'과 관련된 부분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여기에도 공유하고 싶어서 또 다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같은 주제에 대해 연속해서 글을 올리는 것이 저의 히스테리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 같아서 다소 부끄럽지만, 이번 기회에 저도 이 주제를 철저하게 정리해야겠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사실, 이런 '텍스트 주석'은 철학적 문제와 직접 연결되지는 않다 보니, 저에게는 그동안 부차적인 관심사였습니다. 대중 서적이나 유튜브 영상 등에서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오독하는 것을 보고서도 그냥 속으로 불만을 가질 뿐이었지, 이 문제를 제가 직접 다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 보니, 다음에 이 주제로 학술지 논문을 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 입장을 여기서도 다시 요약합니다. 즉, 하이데거는 생물학적 죽음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말하는 '죽음'이란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될 가능성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 삶을 보증해 줄 영원한 형이상학적 본질이나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죽음'입니다. 더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우리의 존재 방식 속에는 '무성(Nichtigkeit)'이 항상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 언제나 '무(Nicht)'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무화(Nichten)'의 가능성이 죽음입니다. 따라서 죽음이란 (미래에 일어날 육체의 소멸이 아니라)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현존재가 떠맡는 그런 존재함의 한 방식"(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329쪽.)이라는 것이 제 일관된 주장입니다. 이제 이 입장을 뒷받침해주는 다른 연구들을 인용해보겠습니다.
(1) 정기철,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에 대한 비판적 고찰」, 『범한철학』, 범한철학회, 2007, 205-227.
이번에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과 관련된 자료들을 조사하면서 처음 알게 된 논문입니다. 이 논문의 제2장이 정확히 제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 중 두 부분을 인용하겠습니다.
그[하이데거]는 경험적 탐구로 설명되는 죽음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죽음을 자연적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자연과학적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이데거처럼 죽음을 통한 인간의 존재 전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낯설 수 있다.(정기철,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에 대한 비판적 고찰」, 『범한철학』, 범한철학회, 2007, 209 인용자 강조)
사실 근대철학사까지 죽음은 논의의 핵심주제가 아니었다가 하이데거에 이르러야 죽음 개념이 논의의 중심개념으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하이데거 사상 속에는 생물학적 죽음이 주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생물학적—의학적 죽음 규정은 사망, 곧 “끝나버림” 그 이상을 말해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음의 본질”을 규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객관적인 사건으로서의 죽음을 아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죽음 자체에 대한 해명에도 관심두지 않았다. 하이데거가 관심가지는 죽음은 현존재의 전체성을 의미 규정하는 존재양식이다. 하이데거가 죽음에 대한 이해를 통해 밝히고자 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가지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 단순한 생리적 감각이나 심리적 정서 그리고 대상 없는 느낌의 흐름이 아니라, 대상 없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현존재를 느끼고 발견하는 존재론적인 방식이다. 하이데거의 의도를 그대로 옮기자면, 그는 “현존재의 종말을 향한 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를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정기철, 「하이데거가 말한 죽음에 대한 비판적 고찰」, 209-210 인용자 강조)
(2) 이수정 『하이데거: 그의 물음들을 묻는다』, 생각의나무, 2010, 120-123(=이수정, 박찬국, 『하이데거: 그의 생애와 사상』,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185-188).
제가 이전 글의 단락 (2)에서 강조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단독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이 아니라, 현존재의 전체성에 대한 논의 맥락에서 등장하는 개념이라고 말입니다. 말하자면, 하이데거는 죽음 개념을 통해 현존재가 언제나 '미완'의 형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해설에서도 죽음은 단순히 생명이 떠나는 현상과 구별되고 있습니다.
(2.1) 죽음은 현존재의 전체성에 대한 논의 맥락에서 등장한다.
'전체존재(Ganzsein)'란 무엇인가?
'전체'란 '현존재의 '처음'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를 의미하며, 이 점에서 '출생과 죽음 사이의 존재인 '일상성'과 구별된다. […] 즉 현존재는 '죽음에 있어서 종말에 달하며, 이렇게 해서 이 존재자는 전체존재에 이른다. 현존재에게는 '부단한 미완결성'이 있으며, 이 '미완'에는 '죽음'이라는 '종말'이 '속하여' 있어서, 이것이 '현존재의 그때그때 가능한 전체성'을 경계지어 규정하고 있다.(이수정 『하이데거: 그의 물음들을 묻는다』, 생각의나무, 2010, 120-121쪽; 이수정, 박찬국, 『하이데거: 그의 생애와 사상』,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185)
여기서 볼 수 있듯이,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죽음에 대한 논의는 현존재가 '미완'의 형태로 '종말'에 이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제시됩니다. 현존재는 완결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그래서 어떤 것도 현존재의 '본질'이라고 말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2.2) 죽음은 생명의 종료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그[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이란 단지 '생명이 있을 뿐인 자가 세계 밖으로 떠나는 것' 즉 '종료Verenden'와는 구별된다. 따라서 '죽음'이 현존재에게 적합하게 '존재'하는 것은 '죽음을 향한 실존적 존재'에서뿐이다. 요컨대 '죽음'이라는 '종말'은 '현존재가 종말에 달하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라는 이 존재자의 종말을 향한 존재'를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현존재가 받아들인는 하나의 존재방식'이다.(이수정 『하이데거: 그의 물음들을 묻는다』, 121쪽; 이수정, 박찬국, 『하이데거: 그의 생애와 사상』, 185쪽)
(2.3) 존재의 방식으로서의 죽음이란 곧 우리 자신의 미완성적 성격을 의미한다.
이러한 '죽음'은 '현존재가 그것에로 태도를 취하는 어떤 것'으로서의 '가장 극단적인 미완'이라는 성격을 가지며, 최소한으로까지 감수된 '최후의 미완'도 아니며, 오히려 하나의 '절박함Bevorstand'이라고 성격지어진다.(이수정 『하이데거: 그의 물음들을 묻는다』, 121쪽; 이수정, 박찬국, 『하이데거: 그의 생애와 사상』, 186쪽)
(3) 권터 피갈, 『하이데거』, 김재철 옮김, 인간사랑, 2008.
독일 하이데거 학회의 회장이었던 권터 피갈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죽음의 문제가 '무규정성'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즉, 우리 자신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 미완의 존재라는 사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이 하이데거가 '죽음'이라는 용어로 말하고자 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런 무규정성의 문제가 "많고 적은 연령의 상태" 같은 실제 생물학적 상황과 무관하게 "삶의 모든 계기"에 놓여 있다고 강조하면서 말입니다.
하이데거가 발전시킨 "죽음으로의 선구"에 대한 분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하이데거는 이 문제를 다른 숙고들과 연결시켜 아주 독특하게 기술하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하이데거가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그것은 고유하게 앞서 있는 존재의 명시적이고 근원적인 경험, 즉 이해의 형식에 놓여 있는 열어 밝혀져 있음의 명시적이고, 근원적인 경험이 자신의 죽음의 확실성과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유하게 앞서 있는 존재의 무규정성은 내가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함께 제시된다. 그리고 이 근본적인 무규정성은 흔히 생각하듯 많고 적은 연령의 상태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계기에 놓여 있다.(권터 피갈, 『하이데거』, 김재철 옮김, 인간사랑, 2008, 105 인용자 강조)
재미있는 사실은, 피갈이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아주 위태로운 상황"에 대한 경험과 엄격하게 분리시킨다는 점입니다. 즉, 하이데거가 말하는 것은 (Martin님이 주장한 것과는 달리) "실존적 사생결단을 압박받는 순간"에 대한 기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무규정성'(저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본질 없음')의 경험이지, '사생결단'의 경험이 아닌 것입니다.
그[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진정한 "죽음으로으 선구"는 앞서 있는 존재의 무규정성으로 향하는 "선구"이며, 아주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 경험은 극단적으로 고양될 수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중시하는 경험은 앞서 있는 것이 극단적으로 표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그때에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이때 고유하게 앞서 있는 존재를 무규정성에서 이해하게 된다. 나아가 사람들은 규정된 모든 기획, 규정된 모든 계획, 모든 표상이 항상 바로 이 무규정성에 대한 대답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권터 피갈, 『하이데거』, 107쪽 인용자 강조.)
(4) 이기상, 『쉽게 풀어 쓴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 영향』, 누멘, 2010.
이기상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사도 바울의 사건을 중심으로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설명합니다. 앞의 해설들과 달리, 이기상은 실제 육체의 죽음 문제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연결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하이데거 해설조차 결국 '육체의 죽음' 자체에 강조점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까지의 삶이 완전히 죽음으로 끝났다는 것"이라는 사건을 말하기 위해 육체의 죽음을 예시로 들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키르케고르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 '전율과 환희'를 살펴보자. 하이데거는 죽음을 본 사람은 자기가 일생 동안 마음을 쏟았던 것들, 즉 존재자에 대해 초연해진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은 이제 존재자를 떠나 존재로 향하게 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회개를 가지고도 설명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이전에 사울이라는 사람이었다.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장님이 된다. 사도 바울은 사울로 살았을 때 초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그 사울이 장님이 되었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삶이 완전히 죽음으로 끝났다는 것, 존재자가 무가 된 것을 의미한다. 이를 키르케고르 식으로 말하면 전율이라 할 수 있다. 장님이 된 사울은 모든 것이 끝이라는 전율을 느끼지만 그리스도를 만나 사도 바울로 다시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그는 이제 환희 속에 새로운 눈으로 새로운 세상을 보며 새로운 삶을 살아 나갈 것을 다짐하게 된다. 이전의 사울로서의 삶과 사도 바울로서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새로운 눈은 새로운 존재 이해이다. 이제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게 되고, 이것이 환희이다. 존재자에게 빼앗긴 나의 삶을 되찾을 때, 인간은 새로운 세계에서 환희를 느끼게 된다.(이기상, 『쉽게 풀어 쓴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 영향』, 누멘, 2010, 191 인용자 강조)
즉, 사울의 다마스쿠스 경험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가 확실하다고 믿었던 모든 토대들을 '무'로 돌려버리는 경험이 바로 그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육체의 죽음은 하이데거의 요점을 어긋나게 만듭니다.) 기껏해야, 육체의 죽음에 대한 명상은 우리가 존재론적-실존론적 죽음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드는 하나의 계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권터 피갈이 "아주 위태로운 상황" 자체가 하이데거의 요점이 아니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5) 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 2014.
박찬국도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이 현존재의 전체성에 대한 논의 맥락에서 제시된다고 지적합니다. 박찬국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은 하이데거의 용어로 하이데거의 철학을 해설하기 때문에 사실 『존재와 시간』에 대한 저자의 고유한 견해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동안 지적한 요소들을 이 책 속에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5.1) 죽음은 현존재의 전체성에 대한 논의 맥락에서 등장한다.
이렇게 해서 이제 현존재를 전체로서 '예지' 속에서 확보한다는 과제가 생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존재자가 도대체 전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전개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으면서 자신이 실현해야 할 가능성을 기투하는 현존재에게는 그가 존재하고 있는 한, 장차 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직 남아 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이 부분에는 현존재의 종말, 즉 죽음이 속한다. 이 종말과 함께 현존재의 전체성이 성립하게 된다.(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그린비, 2014, 314)
(5.2) 죽음은 생명의 종료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다.
제가 이전 글의 단락 (3)에서 '아직-아님'과 '종말'이라는 개념을 가지고서 설명한 내용을 박찬국도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책 본문에서 이 내용들은 모두 볼드체로 되어 있습니다.)
현존재는 존재하는 한 항상 자신의 '아직 완료되지 않음'으로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존재는 이미 언제나 자신의 종말로 존재하기도 한다. 현존재의 존재는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인수하게 되는 하나의 존재방식이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기에 충분할 만큼 늙어 있다. 그러나 이는 현존재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고, 현존재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존재의 죽음은 현존재의 삶의 마지막에서야 나타나고 그때에야 비로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현존재는 죽음에서 회피하는 방식으로든 그것과 적극적으로 대면하는 방식으로든 자신의 죽음과 항쌍 대결하고 있다.(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329쪽.)
솔직히, 저는 박찬국이 "존재가 자신의 죽음에 대해 태도를 취할 수 있다"라고 한 부분이 썩 좋은 해설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해설은 마치 '진정한 죽음'이 따로 어딘가에 있고,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은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 단지 '진정한 죽음에 대한 태도'인 것처럼 오도하게 만들 여지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핵심은 "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은 일종의 '존재방식'이라는 것이 박찬국도 강조하는 사실입니다.
(5.3) Sterben과 Ableben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건 이전 글에서도 인용한 내용입니다. 하이데거가 강조하는 죽음이란 '사망(Sterben)'이지, 생물학적 '종명(끝나버림, Ableben)'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생물학적인 의미에서의 현존재의 죽음을 종명(Ableben)이라고 부른다. 이는 현존재가 실제로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존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태도를 취하며 현존재에게만 특유한 이런 종류의 죽음을 하이데거는 사망(Sterben)이라고 부른다. 현존재는 사망하지 단순히 하나의 생명체처럼 끝장나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가 단순히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종명할 수 있는 것도 오직 그가 사망할 수 있는 존재인 한에서이다.(박찬국,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 330)
(6) 박찬국,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동녘, 2004.
앞의 책보다 좀 더 박찬국의 해석이 강하게 들어간 책입니다. 앞선 글의 단락 (1) 말미에서도 지적하였듯이, 저는 이 글에서 박찬국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을 설명하는 내용에 다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박찬국이 결국 강조하고 있는 것도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무가 무화하는 사건"입니다. 즉, 하이데거가 '죽음'이라는 개념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사건이란 "우리가 그동안 집착해온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박탈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죽음이 존재 전체가 자신을 알리는 통로인 한, 인간이 자신이 죽음에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기분인 불안은 죽음에 대한 불안이지만 결국은 존재 전체에 대한 불안이다. 그것은 자신이 불가해한 존재 전체에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 앞에서의 불안이다. 불안에서는 존재 전체가 무의 형태로 자신을 고지한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존재 전체가 무의 형태로 자신을 고지하는 이러한 사건을 "무가 무화한다(das Nichts nichtet)."라고 했다. […] 이렇게 무가 무화하는 사건은 우리가 그동안 집착해온 모든 것에서 의미를 박탈하는 사건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의 고유한 존재를 드러내는 사건이기도 하다.(박찬국,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동녘, 2004, 119-120쪽 인용자 강조)
즉, 우리가 불변하고, 확실하고, 영원하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항상 '무'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이 '죽음'입니다. 이때의 죽음이란 '육체의 소멸'이 아닙니다. 오히려 존재하는 모든 것의 '형이상학적 토대 없음'이 죽음 개념의 핵심입니다. 우리 자신을 비롯한 모든 것들이 본질도 토대도 없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부정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기상의 예시를 사용하자면, 극단적 유대교인이었던 사울이 다마스쿠스 경험 이후에 그리스도교의 사도 바울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7) W. 블라트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입문』, 한상연 옮김, 서광사, 2012.
이전 글에서 이미 많이 인용하였지만, 여기서도 다시 인용합니다.
(7.1) Sterben과 Ableben은 구별되어야 한다.
"죽음"이라는 말로 하이데거가 언급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 죽음은 현존재가 그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게 되자마자 떠맡게 되는 존재함의 한 방식이다." (289/245). 존재함의 한 방식인 죽음? 우리는 보통 죽음을 존재하지 않음 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죽음은 미래에 떨어져 있는 어떤 사건이 아니다 . "사망함(das Sterben)은 사태져-있음(Begebenheit)이 아니라 실존적으로 이해할 현상이다 …"(284/240) 그렇다면 "더-이상-현존할-수-없음의-가능성"과 "순연한 현존-불가능성"은 삶의 종료에 관계된 것이 아니다 . […] 만약 "죽음"이 이러한 실존적 상황에 관계된 것이라면 하이데거는 인간의 삶을 다하는 것을 무엇이라 부르는가? 하이데거는 그것을 삶을-다-보냄 (demise; das Ableben)이라 부른다. (W. 블라트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입문』, 한상연 옮김, 서광사, 2012, 287 인용자 강조)
(7.2) 하이데거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생물학적 죽음 개념과는 다른 의미로 죽음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말을 어떤 유별난 방식으로 사용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한 첫 번째 철학자인 것은 아니다: 키르케고르 역시 이 말을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한 것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을 「아메리칸 뷰티」의 레스터 번햄이 "혼수상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과 비교할 만한 강력한 은유적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이 용어를 이러한 은유적 의미로 사용하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존재론적 논의를 "그저 고양하기나" 하는 문학작품으로 평가절하할 위험을 안게 된다. 하이데거는 그가 "죽음"이라는 말을 존재론적 바탕 위에서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려 한다 . 죽음은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현존재의 끝을 뜻한다. 삶을-다-보냄이 삶의 끝을 의미하듯이 말이다. "대체 어떤 의미에서 죽음을 현존재가 끝남으로서 파악해야만 하는지 의 물음이 더욱 절실해진다."(289/244)(W. 블라트너,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입문』, 259쪽 인용자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