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선생님, 랜선신학교 진행 중이신 강의 잘 듣고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를 한마디로 '본질의 부재'로서 설명하신 데는 수긍이 가나 (한국어 번역 관행과 상관 없이 일단 독일어에서 Ableben은 확장된 문학적 의미로서의 "사망"이고, Sterben이 바로 그 육체적 "죽음"을 가리킵니다), 선생님의 관점은 인간 삶의 '상대적 가변성'만을 중시하신 나머지 그의 절대적 유한성(finitude), 즉 하이데거가 진정으로 강조하고자 한 "자신의 존재를 문제삼는 존재자(whose being by its very nature is at issue)"로서 현존재의 의미는 유폐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데거의 죽음은 단순히 "삶을 이루고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들의 부정"이 아니라 '있을수있음'(Seinkönnen), 즉 현존재의 '존재 자체'가 문제시되는 계기로서 육체적 죽음이라는 사건에 명확히 기초하고 있습니다.
특히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처럼 주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앞당겨서 현재화하면서 때로는 불안으로, 때로는 여러 가지 일들에 관심(Sorge)을 가지며 살아간다. 이러한 시간이해가 가능한 것은 바로 죽음이라고 하는 현상 앞에서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가는 현존재의 삶의 방식 때문이다. [⋯] 칼 뢰비트(K. Lowith)도 지적하고 있듯이, 하이데거가 무를 주제화한 이유는 한 마디로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서동은 교수, '존재와 무(無), 그리고 절대무(絶對無)']
따라서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는 위같이 감상적인 애니 인용구가 아니라,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와 같이 실존적 사생결단을 압박받는 순간에서 존재의 근원적 의미를 묻는 장면을 예시로 들어 설명되어야 합니다.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은, 선생님이 추구하시는 듯한 "자기 동일성이냐, 타자와의 관계냐"와 같은 물음 이전에 나만의 고유함(eigenste)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무화로서 생물학적 죽음을 정직하게(Eigentlich) 대면하지 않고 타자의 시선만을 신경쓰는 삶이 바로 하이데거가 전면적으로 비판한 '비본래적(uneigentlich) 실존'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합니다.
Heidegger is neither the first nor the last person to argue that the freedom and the quality of one's living depends upon how one confronts and comes to terms with one's mortality. But if this confrontation with mortality is the 'only' way to become free for one's most possibilities, it means that you and I, the children of the age of individualism, remain essentially unfree and ontologically unindividuated as long as we have not tested our current engagements in the world, our life-styles, our current projects, and our relations with others in the fire of our affective-theoretical realization that "I can die right now." [Dan Magurshak, 'Heidegger and Edwards on Sein-Zum-Tode']
그래서 선생님의 하이데거 이해는, 앞서 후기 하이데거의 사방세계 설명에서도 마찬가지로, 하이데거가 명백히 지시한 현존재의 유한성의 사태를 일상적 경험의 지평으로 부당하게 치환시킨 나머지 '존재 자체'의 역사적 탈은폐에 집중하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피상적인 인생철학의 영역으로 곡해하시게 되는 것 같다는 우려가 따릅니다. 하이데거의 죽음 이해에 대한 이 해석은 단순히 "대중적 해설들"의 언어가 아니라 정통 학자들의 논문들에서도 적용되는 관점임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입장에 대한 1·2차 텍스트 근거를 엿볼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