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상주의에 대한 로티의 비판에서 핵심은 무엇인가?(feat. 로버트 브랜덤)


리처드 로티

로버트 브랜덤의 "Vocabularies of Pragmatism: Synthesizing Naturalism and Historicis"라는 글을 읽고 있습니다. 로티의 수제자(?)답게 로티의 철학을 아주 잘 요약한 글이네요. 그 중에서도 다음 단락은 로티의 모든 논증에서 핵심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하기에 의미론적 표상주의에 대한 로티의 비판이 진행되는 방식이다: 규범적 관계는 어휘 내부에서만 성립한다. 어휘 외부에서 성립하는 관계는 인과적일 뿐이다. 그런데 표상은 (올바름과 올바르지 않음에 대한 평가를 지지하는) 규범적 관계인 동시에, 어휘 내부의 표상하는 것과 어휘 외부의 표상되는 것 사이의 관계라고 자칭하다. 따라서, 어휘와 환경 사이의 관계에 대한 표상적 모델은 거부되어야 한다.

In a nutshell, this is how I think Rorty's critique of semantic representationalism goes: Normative relations are exclusively intravocabulary. Extravocabulary relations are exclusively causal. Representation purports to be both a normative relation, supporting assessments of correctness and incorrectness, and a relation between representings within a vocabulary and representeds outside of that vocabulary. Therefore, the representational model of the relation of vocabularies to their environment should be rejected.

Robert B. Brandom, "Vocabularies of Pragmatism: Synthesizing Naturalism and Historicis", Rorty and His Critics, R. B. Brandom (ed.), Malden, Mass.: Blackwell Pub., 2000, 160.

한 마디로, 표상주의는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게 표상주의에 대한 로티의 모든 비판을 관통하는 논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전제-결론 사이에 성립하는 추론적 관계와 원인-결과 사이에 성립하는 인과적 관계는 동일하지 않은데, 표상주의는 그 두 가지를 혼동하고 있다는 거죠. 전자는 어휘 내재적(intravocabulary) 관계이고 후자는 어휘 외재적(extravocabulary) 관계이다 보니, 두 가지를 함께 주장하면 모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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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도웰은 "표상"을 "개념"으로 스윽 바꾸고 나서는, 더이상 모순이 없다고 말하죠. 개념은 규범적이면서 동시에 실재에 대한 rational constraint니깐요. 로티가 맥도웰을 못마땅해 하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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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로티와 맥도웰은 서로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죠. 그 두 사람이 로버트 브랜덤이나 마이클 윌리엄스와 함께 소위 '셀라스 좌파(left-wing Sellarsian)'에 속한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같은 진영에 있는 사람들 치고는 생각보다 많이 싸워서 처음에는 좀 놀랍기도 했어요. 로티는 "The Very Idea of Human Answerability to the World"라는 논문에서 맥도웰을 비판하고, 맥도웰은 "Towards Rehabilitating Objectivity"라는 논문에서 로티를 비판하잖아요. 또 각각 서로의 논문에 대해 "Response to McDowell"과 "Reply to Commentators"라는 논문에서 재반박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저는 로티와 맥도웰의 논쟁을 읽을 때마다, 뭔가 서로 논지가 잘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그 두 사람은 모두 비트겐슈타인-셀라스-데이빗슨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표상주의 전통에 대해 (특별히, 논리실증주의로 대변되는 고전적 경험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죠. 표상주의가 자연주의의 오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로티와 맥도웰이 모두 공통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다만, 둘은 강조점이 다른데, (a) 로티는 이 자연주의의 오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그러니까 형이상학적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반면에, (b) 맥도웰은 그 비판으로부터 "그러니까 일상적 실재만 존재한다."라는 결론을 도출한다고 저는 봐요.

말하자면, 그 두 사람이 '실재(reality)'나 '세계(world)'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서로 염두에 두고 있는 의미가 달라서 일종의 애매성의 문제가 생겨난다는 게 로티-맥도웰 논쟁에 대한 제 해석이에요. 사실, "형이상학적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로티의 입장과 "일상적 실재만 존재한다."라는 맥도웰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충돌할 필요가 없는 거죠. 전자는 기존 철학의 오류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고, 후자는 우리의 일상적 세계 경험을 복권시키려 하는 것이니까요.

실제로, 그 두 사람은 '실재'나 '세계'가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어요. 가령, 로티는 『실용주의의 결과』에서 전통적 형이상학이 상정한 '대문자 실재(Reality)'와 '대문자 진리(Truth)'를 우리가 일상에서 받아들이는 '소문자 실재(reality)'와 '소문자 진리(truth)'와 구별하거든요. 전자는 비판받아야 하지만 후자는 비판받을 필요가 없다면서요. 마찬가지로, 맥도웰도 "Avoiding the Myth of the Given"이라는 논문에서 '대문자 소여(the Given)'와 '소문자 소여(the given)'을 구분하죠. 고전적 경험주의가 상정한 대문자 소여는 거부되어야 하지만, 맥도웰 자신의 최소경험주의는 소문자 소여는 인정한다면서요. 그런데도 정작 두 사람이 서로 논쟁할 때는 이런 구분들이 뭉개지는 것 같아서, 저로서는 논쟁이 좀 아쉽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래서 예전에 이 주제로 썼던 논문이 「매개된 직접성: 지각적 경험의 개념적 성격에 대한 맥도웰과 브랜덤 사이의 논쟁」이었어요.

지금 보면, 이 논문을 쓸 당시 제가 문장을 너무 불친절하고 단호한 어조로 쓴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긴 한데, 여하튼 저는 로티(혹은 브랜덤)의 입장과 맥도웰의 입장이 반드시 대립될 필요는 없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어요. 두 입장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지, 근본적으로는 통합될 수 있다는 게 제 견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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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군요.
그런데 저는 로티와 맥도웰 사이에 어느 정도 실질적인 충돌이 있다고 봅니다.

로티와 맥도웰 모두 기존 철학에서의 형이상학적 실재 개념을 부정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맥도웰이 반대하는 것은 이러한 목표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거칠게 도식화해서, 로티의 스토리는 대부분 2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문제적인 철학적 입장 (예컨대 표상주의)에 대해 1) "철학적" 분석 및 문제진단을 제시하고 ("표상주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통해 모순적이다") 그 이후 2) 자신의 "메타-철학적" 지향을 통해 문제 자체를 해소해 버리는 것이죠 (신실용주의). 제가 느끼기에는, 맥도웰은 로티가 수행하는 1번단계가 디테일적으로 틀리거나 불완전하다고 보고 있으며, 따라서 2번으로의 이행 역시 성급하거나 불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첫 답글에서 익살스럽게 표현했습니다만, 표상주의 비판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로티 같은 경우 표상주의의 문제점들을 분석하고 제시한 뒤 (1번단계), 이것이 잘못된 인식론적 프레임의 결과이므로 이러한 프레임 자체를 폐기하고 자신의 메타철학적 지향으로 나아가려고 하죠 (2번단계). 그러나 맥도웰은 표상주의가 비록 문제적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진리" "실재" "객관성" 같은 개념들은 무해한(innocuous)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고 보고 있고, 실제로 개념주의적 인식론을 통해서 이것을 제시합니다. 만약 이러한 시도가 성공적이라면, 1번 단계 안에서 여전히 "철학적 해결책"이 가능하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철학적/인식론적 시도를 배격하는 급진적이고 도발적인 로티의 해결책(2번단계)을 취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즉 맥도웰이 보기에, 1번에서 2번으로 넘어가는 로티의 스텝이 성급할 뿐만 아니라, 사이렌 앞의 오디세우스처럼 그저 귀를 막고 자신의 프레임만을 내세우는 무책임한 측면까지 있다는 것입니다: "It is true that Rorty resists the blandishments of traditional philosophy, but the effect of the framework he assumes is that he can do that only by plugging his ears, like Odysseus sailing past the Sirens" (Mind and World, p.147).

맥도웰과 로티가 분명하게 구분되는 또 하나의 예시는 칸트를 둘러싼 해석입니다. 맥도웰은 개념주의적 칸트를 통해 철학적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 있는 반면, 로티는 애초에 칸트를 표상주의의 원흉 중 하나라고 보고 있을 뿐 아니라, 맥도웰이 제시하는 개념주의적 칸트를 또 하나의 "플라톤적 질병 Platonic disease" (Reponse to John McDowell, p.124)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죠. (사실 칸트에 대한 로티의 표상주의-적개심이 저로서는 가장 이해안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로티가 철학/인식론의 문제를 철학/인식론을 떠나서 "철학 외적"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맥도웰은 철학과 인식론에 좀 더 머무르면서 "철학-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물론 constructive philosophy를 도입하지 않는 한에서요). 이것이 로티와 다르게 맥도웰이 말하는 "인식론적 고찰에 대한 보다 호의적 태도 a more hospitable attitude to something that may as well be counted as epistemological reflection" (Towards Rehabilitating Objectivity, p.109)입니다. 맥도웰이 자칭하는 "최소경험주의" 혹은 "최소칸트주의" 같은 것 역시 이러한 철학/인식론에 내재적인 성향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최소 경험주의"와 "최소 칸트주의"가 가능한 한에서 로티처럼 성급하게 메타철학으로 떠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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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굉장히 정확히 알고 계셔서 댓글을 읽으면서 놀랐네요. 솔직히, 로티-맥도웰 논쟁 같은 다소 지엽적인 주제를 자세히 찾아본 분들이 얼마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적어도, 말씀하신 요점들이 로티에 대한 맥도웰의 비판에서 핵심이죠.

가령, 맥도웰은 "Reply to Commentators"에서 '철학의 영역에서 빠져나오기(opting out of this area of philisophy)'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해요. 하나는 로티가 했던 것처럼 전통적 표상주의를 성립시킨 직관들에 대해 "꺼져(Get lost, 입 닥쳐)!"라고 말하면서 문제 자체를 폐기해 버리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맥도웰 자신이 추구하는 것처럼 표상주의의 직관들을 무해하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하거든요.

두 방식 모두 넓은 의미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을 계승하는 '치유적 철학(therapeutic philosophy)'이긴 하지만, 맥도웰은 자신의 전략이 로티의 전략보다 문제 해소에 더 적절하다고 봐요. '진리', '실재', '객관성'이라는 용어들이 무엇인가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단순히 "그딴 용어 폐기하고 완전히 다른 프레임에서 철학을 시작해라!"라고 처방하는 것보다는, "이러이러한 오해만 제거하면 너가 생각하는 그 용어들을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어!"라고 처방하는 것이 질병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낸다는 거죠. 전통적 표상주의의 직관을 유지하면서도, 그 직관에서 잘못된 부분만 정확하게 제거하는 것이니까요. (비유하자면, 맥도웰이 보기에, 로티는 매독을 치료하기 위해 수은을 써서 사람까지 죽이는 의사라면, 맥도웰 자신은 페니실린을 써서 매독균만 제거하는 의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Rorty’s medicine, which matches the prescription of bald naturalism considered as a bit of therapeutic philosophy, is harder to take than mine, for someone who needs to be cured of those anxieties about how minds manage to be in touch with reality, just because it dismisses a central element of the mind-set that poses the need for therapy in the first place. To echo my response to Brandom, Rorty’s therapy undertakes, not to relieve that intellectual pressure, but to cut off its sources before there is any chance of its being felt at all. (J. McDwell, "Reply to Commentators", 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Vol. 58, 1998, 422.)

로티의 철학을 두 단계로 구분해서 설명하신 것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실제로, 브랜덤이 로티를 딱 말씀하신 구조에 비추어 설명하거든요. 로티의 철학에는 '비판적(critical)' 국면과 '구성적(constructive)' 국면이 있다면서요.

Rorty's development of this line of thought has both a critical and a constructive phase. I think it is useful to see the critique of representational models of vocabularies as centering on a particularly pregnant idea that is implicit already in the work on eliminative materialism: his pragmatism about norms, paradigmatically epistemic ones. By this I mean the thought that any normative matter of epistemic authority or privilege — even the sort of authority exercised on what we say by what we talk about — is ultimately intelligible only in terms of social practices that involve implicitly recognizing or acknowledging such authority. On the constructive side, Rorty began to explore the consequences of replacing the representational model by modeling the use of vocabularies on the use of tools. This idea, common to the classical American pragmatists and Wittgenstein, might be called 'instrumental pragmatism.' (Robert B. Brandom, "Vocabularies of Pragmatism: Synthesizing Naturalism and Historicis", Rorty and His Critics , R. B. Brandom (ed.), Malden, Mass.: Blackwell Pub., 2000, 158-159.)

칸트에 대한 해석에서도 로티와 맥도웰은 말씀하신 것처럼 다소 상이한 입장을 취하죠. 저는 이 부분은 칸트의 철학 내부에 다양한 측면들이 들어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브랜덤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로티는 "칸트의 개념적 도구를 (넓은 의미에서) 칸트의 그림을 약화시키는 데 사용(to use a Kantian conceptual tool to undermine a (broadly) Kantian representationalist picture)"(Robert B. Brandom, "Vocabularies of Pragmatism: Synthesizing Naturalism and Historicis", 160)하려 한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즉, '인과/정당화'라는 칸트적 구별을 사용해서 '현상/사물 자체'라는 칸트적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게 로티의 전략이라는 것인데, 사실 이 점에서는 맥도웰도 실제로는 거의 비슷한 것 같아요. 맥도웰도 '자발성/수용성'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칸트의 주장을 사용해서 '현상/사물 자체'를 나누려는 칸트의 주장을 비판하니까요.

다만, 칸트 해석에 있어서는 맥도웰이 로티보다 좀 더 섬세한 측면이 있긴 하다고 생각해요. 로티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칸트에 대해 비판적이기만 하고, 칸트의 긍정적인 점들은 언급하지 않으니까요. 로티의 칸트 해석에서는 칸트와 플라톤이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죠. 그에 반해, 맥도웰은 칸트가 개념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자라는 점을 적절하게 짚어내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족이지만, 정작 칸트나 헤겔을 전공하신 다른 몇몇 선생님들과 이야기해 보니, 칸트나 헤겔에 대한 맥도웰의 해석을 못마땅해 하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개인적으로, 맥도웰의 헤겔 해석은 다소 논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칸트 해석까지도 전공자분들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걸 보면서 좀 의외였어요.)

여하튼, 써주신 내용에 거의 대부분 동의해요. 적어도, 위의 내용들이 맥도웰의 관점에서는 로티에 대해 불만족스러울 만한 점이긴 하죠. 다만, 저는 이런 맥도웰의 로티 비판들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로티와 맥도웰 사이에 정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지는 여전히 따져보아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제가 보기에, 로티도 (데이빗슨이 "On the Very Idea of a Conceptual Scheme"의 말미에서 말한) "친숙한 대상들과 직접적 접촉을 재건"이라는 주제를 결코 무시하지는 않는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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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한 코멘트 감사합니다. 오늘도 여러가지를 배우고 갑니다!

사실 저는 로티-맥도웰 전장에서는 맥도웰에 호의적이긴 하지만, 맥도웰의 정적주의 내지 치유적 철학에는 좀 갸우뚱하긴 합니다. 어떤 경우에 보면 맥도웰의 치유적 해결책이 철학적 분석과 그에 따른 해결책이라기 보다는 (물론 로티보다는 섬세하다고 생각합니다 ㅋㅋ), 그저 주문을 뇌까리는 주술적 성격을 띤다고 보거든요. 예컨대 개념이 경험인과적 연관과 규범적 연관을 모두 담지한다는 주장이나 제2의 자연이 자연과 자발성을 매개한다는 주장들을 보면, 분명 이러한 사유가 매력적인 것도 맞고 이에 대해 공감이 가면서도, 구체적인 수준에서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혹은 구체적인 분석적/주석적 이슈들에 대해서 맥도웰이 너무 겉핥기 식으로 넘어간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칸트/헤겔 전공자들의 불신도 아마 이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아요. 맥도웰의 해석을 받아들일 때 발생하는 칸트/헤겔 철학 내에서의 여러 철학적/주석적 이슈들이 있을텐데, 맥도웰이 이것들을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맥도웰에게 이것을 요구하는 것이 좀 과한 요구라는 느낌도 받긴 합니다.) 이 점에서 볼 때, 맥도웰의 치유적 해결책은 그저 verbal한 차원에서의 선언 내지 약속에 지나지 않고, 일종의 conceptualism manifesto 수준에 머무른다는 것이죠.

물론 이렇게 비판하면, 맥도웰은 제가 constructive philosophy를 요구하고 있다고 반박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로티에 대한 맥도웰의 비판이, 맥도웰 본인에게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이렌 앞의 오디세우스처럼 귀를 막고 그저 conceptualism mantra를 되뇌이고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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