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과 투표권: 인권에 대한 로티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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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로티

요즘 시간이 날 때마다 로티의 논문을 뒤적이면서 인권(human rights)에 대한 내용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5년 정도 전쯤에 로티의 어느 논문에서 인권과 투표권을 비교한 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있거든요. 최근에 우연히 인권과 관련된 짤막한 인터넷 에세이를 접하고 로티가 떠올라서 그 논문을 다시 살펴보려고요.

기본적으로, 로티는 인간의 본성 속에 인권이 내재되어 있다는 주장에 반대해요. 인권이 우리의 사회, 공동체, 규범, 연대성, 언어 등에 앞서 마치 고정적 대상처럼 저 바깥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전통적인 철학에서는 실재, 합리성, 윤리,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세계 속 어딘가에 사물처럼 존재하고 있고, 우리는 그 사물들에 '실재', '합리성', '윤리',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로티는 언어가 저 바깥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표상(represent, 재현)한다는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해요(표상주의에 대한 로티의 비판에서 핵심은 무엇인가?(feat. 로버트 브랜덤)). 오히려 우리 인간들이 '실재', '합리성', '윤리', '아름다움'이라는 언어를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함으로써 그런 대상들이 창출된다고 강조하죠.

사실, 인권에 대한 로티의 이런 견해는 로티의 글 전반에서 매우 흔하게 찾아볼 수 있어요. 로티가 후기에 쓴 글들 중 상당수는 인권이라는 주제를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언급하거든요. 가령, "Solidarity or Objectivity"처럼 얼핏 상대주의나 객관성 같은 인식론적 주제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글에서도 인권에 대한 구절이 나오죠.

What is disturbing about the pragmatist's picture is not that it is relativistic but that it takes away two sorts of metaphysical comfort to which our intellectual tradition has become accustomed. One is the thought that membership in our biological species carries with it certain "rights," a notion that does not seem to make sense unless the biological similarities entail the possession of something non biological, something that links our species to a nonhuman reality and thus gives the species moral dignity. This picture of rights as biologically transmitted is so basic to the political discourse of the Western democracies that we are troubled by any suggestion that "human nature" is not a useful moral concept. (R. Rorty, "Solidarity or Objectivity", Objectivity, Relativism, and Truth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0, 31.)

로티가 굳이 인권 개념을 문제 삼는 이유는, 이 개념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완고하게 남아 있는 플라톤주의적 형이상학의 가장 대표적인 잔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인권은 여전히 현대사회의 정치-윤리적 이슈에서 핵심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죠. 생명 윤리, 젠더 갈등, 난민과 이민자 문제, 종교적 관용에 대한 논쟁들은 언제나 '인권'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벌어지잖아요. 이 개념이 우리의 정치-윤리적 사고 속에 너무나 깊이 박혀 있는 나머지, 인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부도덕해 보일 정도죠. 로티는 이렇게 말해요.

Human rights foundationalism is the continuing attempt by quasi-Platonists to win, at last, a final victory over their opponents. (R. Rorty, "Human Rights, Rationality, and Sentimentality", Truth and Progres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170)

그런데, 로티가 인권을 다룬 구절은 정말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제가 찾고 있는 구절은 '인권'과 '투표권'을 비교하는 구절이거든요. 제 기억으로, 로티는 인권이 마치 투표권처럼 한 사회가 임의적으로 부여하는 권리라고 주장했어요. 가령, 우리나라에서 만 18세부터 공직선거에 참여할 권리를 국민들에게 주는 것은 순전히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이유 때문인 것이잖아요. 대한민국 국민의 유전자 속에 "너는 만 18세가 되면 피카츄가 라이츄로 진화하듯이 청소년에서 유권자로 진화한다."라고 내재되어 있지 않은 거죠. 로티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면서 인권이라는 것도 자연(본성)에 내재된 권리가 아니라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권리라고 강조해요. (물론, 더 정확히 말하자면, 로티는 '발견/발명'이라는 이분법 자체가 잘못된 사고라고 지적하지만요.)

하지만 제 기억 속 이 구절이 도대체 로티의 어느 논문에서 나온 것인지 아무리 찾아도 모르겠네요. 제가 요즘 다른 일들 때문에 로티를 집중적으로 볼 시간이 없어서 틈 날 때마다 뒤적이고 있는데도, 2주째 제 기억 속 구절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네요. 아마 Truth and Progress라는 로티의 논문집 어딘가에 있었던 것 같은데, 수록된 논문들을 눈으로 훑고 PDF 파일로 단어를 검색해 봐도 제 기억과 일치하는 내용이 나오지가 않네요. 혹시라도 비슷한 구절을 발견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댓글로 제보 부탁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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