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1주차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서 제가 준비한 허접한 발제문도 올빼미에 올려둡니다.
@YOUN 님께서 녹화를 해주시고 있었는데, 중간에 인터넷이 팅기는 바람에 날라가버렸네요.
하버마스와 로티는 반표상주의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두 사상가는 ‘이론은 삶의 형식 변화를 촉발·유발할 수 있는가?’에 대해 대립하는 답변을 내놓는다. 하버마스의 답변은 그렇다는 쪽에, 로티의 답변은 그렇지 않다는 쪽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말해, 두 사상가는 ‘사적/공적 영역의 분리 가능성’, ‘문화 변동 속 언어의 역할’, ‘특정한 공동체적인 기준과 그것을 넘어서는 보편적 기준의 존재 여부’에서 대립한다. 두 답변의 대립은 각 사상가의 철학을 따라갈 때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1 사적/공적 영역의 분리 가능성
하버마스에 따르면 상호주관적 논쟁과 비판을 통한 타당성 주장의 상환은 사회적·문화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게 도와주는데, 이러한 언어의 논쟁적 기능은 이론의 공적 유용성을 극명하게 나타내준다. 즉, 사적인 생각은 논쟁과 비판을 거쳐 이론이 되어 ‘무엇이 진리인가에 관한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이론은 공적 유용성을 분명히 지니고 있다.
하버마스는 공적 유용성을 성취라는 의무를 외면하는 철학 이론을 ‘사적 철학’이라고 부른다. 이 사적 철학은 철학자들의 개인적 관심과 흥미 그리고 자기 창조에만 머물렀다는 점에서 ‘주관적 철학’이다. 이 부류의 대표 주자가 니체이고, 로티 또한 이 부류에 속한다. 하지만 하버마스에게 있어 철학 이론은 ‘합리성의 수호자’이기에 그러한 공적 유용성을 추구해야만 한다.
로티는 철학이 공적 유용성을 성취해야 한다는, 달리 말해 철학이 공적 영역에서 효용을 가져야만 한다는 하버마스의 입장이 독단적이라고 비판한다. 오히려 로티가 보기에 철학은 사회적으로 유용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로티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분리하고, 철학 이론을 전자에 위치시키며 그것의 공적 역할을 상당히 축소한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새로운 삶과 같은 가능성을 제시하는 방식(대안적 묘사)으로 공적 영역에 기여할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최소한 하버마스가 주장하듯이 공적인 논쟁을 통해서 철학이 정당화된 후에 공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2 문화 변동 속 언어의 역할
로티의 입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외부세계를 객관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특권화된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철학 이론은 ‘새로운 언어’를 창출하여 새로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이는 논쟁을 통해 새로운 합의에 도달해야만 새로운 문화로의 이행이 가능하다며 일반적인 이론적 검증(화용의 보편적 구조가 충족될 수 있는 이상적 담화 상황이 현실화되고 제도화되었는가 혹은 아닌가의 검증)을 중요하게 여기는 하버마스와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히려 로티는 이론적 검증이 아니라 새로운 언어 창출을 통한 세계에 대한 색다른 묘사가 철학 이론이 있어야 마땅한 자리이고, 더욱이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에 무게를 둬야 한다는 것이 로티의 입장이다.
로티는 이론적 검증을 강조하는 하버마스에 대해 그것을 통해서는 현 세계의 잔인한 면모를 포착할 수도 없고 해결할 수도 없다며 구체적인 반론을 펼치기도 한다. 로티가 보기에 하버마스는 ‘⓵인간의 본성이 존재하는데 ⓶그를 억압하는 외적 권력이 있기에 ⓷화용의 보편적이고 탈역사적 구조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구제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하버마스의 이러한 주장은 전통 형이상학의 구조를 쏙 빼닮고 있다. 그런 본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있지도 않은 것을 해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기에 그가 말하는 이론적 검증으로는 현재 해결되어야 할 잔인한 면모가 무엇이고 아닌지 찾아낼 수도 없다. 오히려 각 개인이 자신의 특수한 취향을 발달시켜나갈 수 있는 부정의 자유를 추구하도록 해주는 것이 인간의 자율성을 획득하는 좋은 길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하버마스는 매번 복잡한 얘기만 할 뿐 구체적인 예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더해 로티는 ‘토의와 논쟁의 주제는 이미 공론장 안에 있다’라는 하버마스의 주장도 문제 삼는다. 하버마스의 주장은 논쟁의 주제가 공론장 외부에서 주어지거나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사실상 같다. 그러니까 하버마스는 새로운 삶과 같은 가능성이 어떻게 논쟁의 주제가 되고 또 아니게 되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비판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 요구를 회피하는 것이다.
만일 하버마스에 대한 로티의 위 비판이 옳다면, 하버마스식의 거울을 표방하는 철학 이론은 우리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하버마스의 철학은 문제를 추상화하여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오히려 새로운 삶과 같은 가능성은 하버마스식의 철학 이론이 아닌 새로운 언어 창출을 목표로 하는 사적 철학이 제시할 수 있어 보인다. 하버마스가 의무라고 주장하는 공적 영역의 실제적 요구와 분리된 철학을 로티는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들’이라고 칭송한다. 이제 철학 이론가들은 아이러니스트 자유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3 특정한 공동체적인 기준과 그것을 넘어서는 보편적 기준의 존재 여부
하버마스는 로티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언어 창출을 통한 새로운 삶 묘사와 같은 것들도 효과를 누리려면 궁극적으로는 공적 영역에서의 검증(상호주관적 비판)을 거쳐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지식인의 주관적 만족을 위한 탐구가 실제로 만족을 주기 위해서는 공적 영역에서의 여과를 거쳐야 한다는 말인데, 하버마스는 주관적 만족과 공동체의 도덕의 구분 필요성을 도덕 영역과 인식 영역에서 구체화하여 다룬다.
첫째, 하버마스에 따르면 로티는 양립 불가능한 두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①‘사적인 완성 및 행복의 추구가 공적으로 정당화되고 승인받는 과정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와 ⓶‘지식인들의 이론은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이 겪는 고통을 경감하고 평등을 촉진하는 데 기여한다’는 동시에 주장될 수 없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주장⓶를 내세우기 위해서는 ‘이론은 포괄적인 인간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의 관점인 도덕적 관점을 고려해야만 한다’라는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로티는 특정 공동체적 기준을 넘어선 보편적 기준이 있고 지식인의 이론은 그것을 고려해야 함을 인정하고, 주장①을 수정해야 한다.
둘째, 하버마스가 보기에 로티는 언어에 너무나 큰 역할을 부여해 의미가 타당성 여부를 결정할 뿐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타당성 상환을 위한 논쟁을 통한 학습으로 인해 의미는 변동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타당성 주장은 주어진 언어적 조건 아래에서 이루어지지만 언어적 조건에 가두어져 있다고 해도 그 속의 논쟁을 통해 이 조건은 언제든 뒤바뀔 수 있다. 곧, 타당성 상환을 위한 논쟁은 언어(맥락) 초월적 힘을 갖고 있다.
로티는 자신에 가해진 하버마스의 비판이 인간 모두가 공유하는 도덕적 의무감을 전제하고 있는데, 도덕적 의무감은 세계를 바꾸는데 실제로 작동하지 않는다며 반박한다. 로티가 보기에는 하버마스식의 무조건적 의무를 강조하며 논리적으로 세계를 변화하려는 쪽보다 정서를 통한 쪽이 더욱 효과적이다. 즉, 중요한 것은 논리적 추론과 합리적 의무감이 아닌 감정과 정서의 공유다.
하버마스는 로티가 도덕 영역에서 자가당착에 빠진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진리관이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다고도 주장한다. 로티는 ‘p라는 명제는 정당화되지만 그럼에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라는 진리관을 갖고 있다. 이는 곧 ‘p라는 명제의 진리 값이 현재의 주어진 맥락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와 ‘탈맥락화된 p의 의미가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p의 의미는 지엽적 맥락을 떠나 초월적·일반적으로 사실이다)’를 구분하고 후자가 아닌 전자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그러나 후자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즉 이상화된 상황을 가정하지 않고서는 타당성 주장을 구분하고 상환하는 과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의사소통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떤 식으로든 이상화에 의존해야만 한다. 즉, p라는 명제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우리(지엽적 공동체)’에게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넘어서서 현재 같은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라고 상정해야만 한다.
로티는 또 하버마스의 비판에 반박한다. 이는 그가 언어의 기능에 대한 논쟁에서 하버마스에게 가한 반박과 동일한 양상을 띠고 있다. 첫째, 하버마스는 이상화된 상황에서 이미 진리 후보가 존재한다고 상정하는데 이것은 거짓이다. 둘째, ‘이 명제는 우리(지엽적 공동체)를 넘어 현재 같은 하늘 아래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야’라는 생각 없이 ‘언젠가는 이 명제가 받아들여질 것이야’라는 희망이나 믿음 속에서 이루어진 명제도 담론에 투입된다. 즉, 하버마스의 주장과 달리 타당성 상환을 통해 공적으로 정당화된 명제만이 담화에 올려지지 않는다.
- 김경만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사고 혹은 언어의 존재론적 문법이 가지는 문제는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이거나 혹은 억압적이라는 데 있지 않고 이 언어가 일정한 사회적 기능, 즉 고통과 억압 그리고 모욕을 관리하고 정당화하는 기능을 해왔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180). 김경만은 ‘언어가 이데올로기적이거나 혹은 억압적이다’라는 서술과 ‘언어가 고통과 억압 그리고 모욕을 관리하고 정당화하는 기능을 해왔다’라는 서술을 구분하고 있는데, 정말 둘이 구분되는가?
- 김경만에 따르면 “하버마스는 로티가 ‘개인의 이해’와 이를 초월해서 누구나 지켜야만 하는 도덕을 구분하는 데 실패”했다고 지적한다(186). 그런데 로티가 둘을 구분하는데 실패했는지 의문이다. 나아가 하버마스는 “두 문장을 구분하지 않고도 어떻게 로티가 자신의 관점이 ‘인간의 고통을 경감하고 또 평등을 증진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를 이해할 수 없을뿐더러 이는 명확히 잘못된 관점”이라고 비판한다(186). 그러니까 하버마스는 개인의 이해에 머무른 이론적 작업이 세계에 대한 재묘사를 통해 고통을 경감시킬 수도 있다는 로티의 주장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왜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 하버마스의 비판에 대한 로티의 답변이 불만족스럽다. 그가 말하는 바와 같이 논리적 추론과 합리적 의무감이 공동체의 선을 증진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한들 이것이 하버마스의 주장에 대한 좋은 반론이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