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 파나지오티스 타나사스, 「프로네시스 vs. 소피아: 하이데거의 양면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2)

Ⅱ. 역사적 해체의 한계

44(3)-45(1): 플라톤의 『소피스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강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많은 분량의 중요한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여전히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에 나타난 알레테우에인의 다섯 가지 방식을 해설하면서 진리 문제를 다룬다. 그는 ‘아+레테(ἀ+λήθη)’라는 어원을 따라 ‘알레테우에인’을 ‘개시하고 있음(aufdeckendsein)’으로 해석한다. 또한 그는 “영혼은 참되다(ἡ ψυχή ἀληθεύει)”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절에 근거하여 진리를 인간 실존의 존재론적 규정으로 해명한다. 이 근원적 알레테우에인으로부터 레게인의 진리가 파생된다. 그리고 이 레게인은 사물로부터의 ‘떨어짐(Freiständigkeit)’의 가능성을 지닌다. 바로 이 떨어짐이 오류와 잡담(Gerede)의 가능성이다. 진리를 일치(adequatio)로 보는 관점 역시 레게인인이 지닌 떨어짐의 가능성에서 생겨난다. “현대의 인식론에서 진리의 ‘가치(Wert)’로의 변화는 하이데거가 여기서 ‘진리의 퇴락의 역사’라는 일반적 용어로 기술한 것을 종결짓는다.”(Thanassas, 2012: 45)

45(2)-46(1): 『플라톤의 『소피스트』』는 분명히 이후 등장할 『존재와 시간』의 기초 존재론을 예비하고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다르게 있을 수 있는 것(variable)’과 ‘다르게 있을 수 없는 것/영원한 것(immutable/eternal)’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에 주목하여 그리스인들에게 존재가 ‘현전(presence)’을 의미하였고, 존재자가 시간에 근거하여 해석되었다고 주장한다. 1924년경의 이와 같은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은 이전에 비해 크게 변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의 해석은 이전과 달리 이제 ‘시간성’을 비롯하여 현존재의 일상성에서 발견되는 개념들을 위한 비역사적 체계를 제시하길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심오한 변화가 일어났다. 1924년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구체적, 역사적으로 위치한 근본적 경험에 뿌리박힌 것으로서, 그리스 철학의 구체적인 개념성에 대해 탐구하지 않고, 개념성 일반비시대적, 유사-영원하게 존재하는 일상성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이것은, 이 강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지 구실로서 기능한다는 의혹을, 일상성에서 발견되는 개념성에 대한 체계적 기획의 형성을 위한 위장으로서 기능한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다른 말로 하면, 여기서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에서 이전에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현존재-일반’이라고 조롱받았던 것이다!”(Thanassas, 2012: 46)

46(2): 1925년의 『시간 개념의 역사에 대한 서설(Prolegomena to the History of the Concept of Time)』로부터 그 다음 해의 『존재와 시간』에 이르기까지 기초 존재론이 점차 완성됨에 따라 역사적 해체의 기획은 하이데거에게서 사실상 폐기된다. 이제 하이데거는 전통과 전통의 진정한 근원 사이의 ‘역사적’ 긴장을 대신하여 개념과 개념의 진정한 근원 사이의 ‘체계적’ 긴장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가면서, 그는 더 이상 과거와 현재 사이의 긴장의 장을 묘사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히려 모든 개념성의 근거로서 현존재에 대한 그의 비역사적 규정을 위한 역사적 외피를 획득하는 것을 추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에 따르면) 철학적 전통과 현대의 철학적 연구 사이에서, 전통의 은폐하는 기능과 우리의 개념성의 진정한 근원으로의 개시하는 회귀 사이에서 열리는 역사적 긴장은 이제 비역사적 개념성과 그것의 (동일하게 역사적이지 않은) 근거 사이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체계적 긴장에 의해 대체된다.”(Thanassas, 2012: 46)

46(3)-47(1): 타나사스는 『플라톤의 『소피스트』』에 나타난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 해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사유가 반드시 직선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1922-1926년의 강의들이 종종 이미 극복된 하이데거의 이전 시기 사유를 반영하기도 한다는 가설을 제시한다. “[…] 나는, 이 시기의 강의들이 하이데거의 사유의 진화를 항상 충분하고 정확하게 반영하지는 않으며, 그가 이미 극복한 이전 단계의 잔여물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가설을 (그러나 『선집』의 비판본 내부에서만 검증될 수 있는 가설을) 덧붙일 것이다.”(Thanassas, 2012: 46-47)

47(2):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과 『플라톤의 『소피스트』』 사이의 차이는 아리스토텔레의 해석이 지니는 역할에서 발견된다. 두 해석이 내용에서 크게 차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22년에는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이 “철학 자체와 일치하는 회고적 역사 운동의 결론”(Thanassas, 2012: 47)이자 “현사실적 실존으로부터 기원하는 철학의 진정한 표현”(Thanassas, 2012: 47)으로서 삶과 실천을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반면, 1924년에는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이 『소피스트』 해석을 위한 “단순한 ‘도입부’”(Thanassas, 2012: 47)로 제시된다.

47(3)-48(1):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에서처럼 『플라톤의 『소피스트』』에서도 이론과 실천 사이의 긴장이 있다. “이론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우선성과 그것을 없애거나 수정하려는 하이데거의 의도 사이의 긴장은, 우리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에서 관찰한 긴장은, 『소피스트』에 대한 강의에서도 다시 변하지 않고 나타난다.”(Thanassas, 2012: 48) 다만, 여기서 하이데거가 이와 같은 긴장을 순전히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자의 입장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우리는 강의에서 제시되는 문제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닌 하이데거의 문제라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하이데거가 낯선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를 해석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사실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적으로, 그[하이데거]가 어떤 입장을 편들 때, 그것을 그 자신의 철학적 견해로 반드시 받아들이지 않고서도,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자로서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Thanassas, 2012: 48)

48(2)-49(1): 하이데거는 자신의 해석에서 에피스테메와 프로네시스 등 현존재의 모든 종류의 행위를 프락시스(φράξις, 실천)을 통해 규정하고자 한다. “만약 모든 것이 프락시스(φράξις)라면, 우리는 단순히 프락시스로부터 어떠한 구별된 개념의 가능성도 박탈하며, 우리는 모든 인간 활동을 이러한 무정형적, 미분화적 행위로 환원한다.”(Thanassas, 2012: 48-49) 다만, 하이데거는 자신의 해석에서 ‘자기-관계(self-relation)’의 내용이라는 주제를 회피한다. “이러한 평가에서 그리고 그의 분석 내내, 하이데거는 이러한 자기-관계의 내용에 대한 문제를 단지 부수적으로 언급하며 황급히 회피한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들(τὰ ἀυτῶ ἀγαθά καὶ συμφέροντα)’이라는 구절을 인용하지만, 단지 그가 공허한 자기 관계의 형식으로 기술하는 ‘자신(ἀυτῶ)’에만 초점을 맞춘다.”(Thanassas, 2012: 49)

49(2):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모든 도덕적 관심이 박탈됨에 따라 프로네시스는 ‘자기-해명(self-elucidation)’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도덕적 탁월성과 관계없이, 프로네시스는 이제 단지 자기-해명의 기능만 떠맡을 수 있다! 1140b19의 ‘악덕(κακία)’이 ‘은폐하려는 경향(Verdeckungstendez)’으로 해석됨에 따라, 프로네시스는 행위를 그 자체로 투명하게 만드는 알레테우에인의 형식으로만 남는다.”(Thanassas, 2012: 49) 따라서 하이데거의 해석에서 프로네시스는 ‘양심(Gewissen)’이라는 개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이것은 다만 양심과의 인상적인 연결―그것이 단지 두 개념의 공통된 특징으로서 망각의 불가능성에 의해 정당화되기 때문에, 다소 의문이 있는 연결―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Thanassas, 2012: 49)

50(1): 프로네시스와 소피아의 관계는 이 해석에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하이데거의 해석에서 프로네시스는 도덕적 관심에서 벗어나 ‘도덕적 중립화(moral neutralization)’ 혹은 ‘이론화(theorization)’되는 반면, 소피아는 우선성과 우월성에서 벗어나 ‘이론적 중립화(theoretical neutralization)’ 혹은 ‘실천화(practization)’된다. “자기-해명의 형식으로서 프로네시스에 대한 해석은 프로네시스를, 그것의 대상이 행위하는 주체로서 인간 자신인, 이론의 형식으로 변화시킨다. 프로네시스의 이러한 ‘도덕적 중립화’에는, 소피아의 우선성과 우월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무효와 공허로 만드는, 소피아의 ‘이론적 중립화’가 뒤따른다. 그러나 프로네시스의 ‘이론화’는 프로네시스의 내재화와 프락톤(πρακτόν, 행위)에서 프라톤(πράττων, 행위자)으로의 프로네시스의 의도의 재방향설정에 근거한 반면, 소피아의 ‘실천화’는 『형이상학』 A권 1-2에 근거하여 선이론적, 기술-실천적 활동으로부터의 소피아의 기원에 대한 계보학적 재구성에 근거한다.”(Thanassas, 2012: 50)

50(2)-51(1): 하이데거는 인간 행위의 선이론적 형식에서 소피아의 ‘존재론적-이론적 설립(ontological-theoretical founding)’을 발견해내고자 한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 7절에서 소피아를 ‘기예에서의 탁월성(ἀρετή τέχνης)’으로 규정하는 부분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타나사스는 하이데거의 해석이 오해라고 지적한다. 아리스토테스는 해당 구절에서 소피아 일반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예의 영역에서 소피아에 대해 말하는 방식만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테크네에서 우리가 실제로 ‘소피아를 우해 주어진 선묘사’를 발견할 수 있지만, 이것이 소피아를 테크네의 한 사례, 한 형태 또는 완전성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하이데거 자신이 나중에 인정하는 것처럼, ‘소피아는, 애초부터, 프로네시스에 병렬되는, 현존재의 존재의 자율적 양태를 구성한다.”(Thanassas, 2012: 51)

51(2): 프로네시스와 소피아에 모두 누스가 있다는 사실은 그 두 가지가 ‘알레테우에인의 최상의 양태(highst mode of ἀλήθεύειν)’로서 최후의 것을 (다시 말해, 소피아는 최초의 원리를, 프로네시스는 개별적 경우를) 파악한다는 사실을 보증한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둘 중에서 소피아에 더 우선성을 두는 것과 달리, 하이데거는 둘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일종의 딜레마를 제시한다. 즉, 프로네시스는 좋음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소피아에 비해 자율성과 독립성이 제한된다. 그러나 이 점에서 프로네시스는 인간 존재와의 접촉을 유지하는 반면, 소피아는 인간 존재와의 접촉을 상실한다. 인간 존재와의 접촉을 유지하게 되면 자율성이 상실되고, 자율성을 유지하게 되면 인간 존재와의 접촉이 상실되는 것이다. “비록 프로네시스가 인간 존재를 자신의 주제로 지니지만, 프로네시스는 자신의 자율성을 상실하며, 그러한 것으로서 인간의 좋음에 의존적이고, 소피아는 자신의 자율성을 유지하지만, 그럼으로써 인간 존재와의 자신의 접촉을 상실한다.”(Thanassas, 2012: 51)

51(3)-52(1): 타나사스는 바로 이 딜레마가 하이데거를 역사적 해체의 기획으로부터 기초 존재론의 기획으로 이끌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소피아와 프로네시스 사이의 아리스토텔레스적 구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그의 시도를 종결짓는 딜레마이다. 이것은 해체에 대한 그의 자기 기획을 종결짓는 딜레마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기획을 폐기할 길을 그에게 보여줄 또한 궁극적으로 그를 이미 한 학기 전에 준비된 모험, 곧 기초 존재론으로 향하도록 할 딜레마이다.”(Thanassas, 2012: 51-52) 즉, 하이데거는 본래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 개념에 대한 역사적 해체를 통해 “현사실적 삶으로부터 기원하는 철학의 형태”(Thanassas, 2012: 52)로 접근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획은 이중적 방식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역사적 해체로는 (a) 현사실성으로부터 출현하는 이론에 도달할 수 없었고, (b) 이와 같은 이론의 출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로네시스 개념은 역사적 해체의 기획에서는 딜레마에 부딪힐 뿐이었다. “이러한 이중적 실패가 방금 윤곽이 그려진 딜레마에서 공표된다. 프로네시스가 현사실성에 의존적으로 남아 있는 한, 자기-해명의 양태를 구성하기란 불가능하며, 이론이 원리를 위한 순수 연구에 초점을 맞추는 한, 이론은 인간의 현사실성과 자신의 관계를 상실한다.”(Thanassas, 2012: 52)

52(2)-53(1): 1922년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과 1924년의 『플라톤의 『소피스트』』 사이에는 ‘현존재의 존재(Being of Dasein)’와 시간성(temporality)에 대한 언급이 많아졌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석 자체에서는 큰 변화가 없다. 물론, 하이데거는 『플라톤의 『소피스트』』에서 마지막으로 역사적 해체의 기획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단지 ‘존재 물음(question of Being)’이라는 주제로 들어가기 위한 도입부로서만 다루어질 뿐이다. “이러한 [역사적 해체의] 기획은, 점차적으로지만 꾸준하게, 일차적인 것으로 출현하는 물음, 곧 존재 물음의 식별과 형성에 기여하는 그리스 존재론의 요소에 대한 탐구에 유리하도록 점차적으로 폐기된다. 『소피스트』의 존재론적 질문과의 만남은 실제로, 다음 학기에 ‘기초 존재론’의 형식을 갖추게 될, 이 질문의 식별에 기여할 것이다.”(Thanassas, 2012: 53)

Ⅲ. 『존재와 시간』, 얼마간의 결론

53(2)-54(1): 『존재와 시간』의 제2부는 하이데거가 역사적 해체의 기획을 폐기하였다는 타나사스의 주장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제2부에서는 “도식론과 시간에 대한 칸트의 교설”,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 “시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고”가 주제로 다루어질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나사스는 (a) 역사적 해체를 수행하기로 한 제2부와 제1부 제3편이 결국 출판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한 반박에 반대하는 첫 번째 요점은, 제2부가 결코 출판되지 않았고, 동일한 것이 ‘시간을 존재물음의 초월론적 지평으로서 해명’할 것이라는 제1부 제3편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이다.”(Thanassas, 2012: 53) 또한 (b) 제1부의 현존재 분석론이 제2부의 역사적 해체와는 독립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 철학의 역사에 대한 해체는 현존재 분석론으로부터 이제 완벽하게 분리되었고, 제2부에 추방되었다.”(Thanassas, 2012: 54)

54(2)-55(1): 타나사스는 하이데거가 1922년에서 1929년 사이에 자신의 작업에서 ‘역사’라는 요소를 없앴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와 같은 ‘역사의 상실(elision of history)’의 결과로 『존재와 시간』이 현존재의 비역사적인 구조 위에 존재론을 정초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1922년에서 1929년 사이에, 하이데거는 ‘철학적 연구가 … ‘역사적’ 지식’이라는 그의 확실성을 수정하였고, 이제 원리적으로 비역사적이며 비역사적 현존재 위에 정초된 존재론적 탐구를 시도한다. […] 오직 이러한 역사의 상실이 『존재와 시간』의 인상적인 토대주의를 가능하게 만든다.”(Thanassas, 2012: 54)

54(3)-55(1): 그러나 현존재에게서 ‘학문적 철학(scientific philosophy)’을 위한 ‘흔들리지 않는 토대(fundamentum inconcussum)’를 발견하고자 한 하이데거의 시도는 실패하고 만다. “몇 년 후에, 하이데거는 ‘기초(fundament)’와 심지어 ‘기초 존재론(fundamental ontology)’에 대한 어떠한 언급조차 형이상학적 일탈로 기술할 것이며, 이러한 개념들을 부인할 것이다.”(Thanassas, 2012: 55) 애초에 전통적 철학의 ‘실체(substance)’나 ‘주체(subject)’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된 『존재와 시간』의 ‘현존재’ 개념에서 ‘기초’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논박적이었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기초’가―특별히 ‘단단한(firm)’ 기초가―될 수 없다. 현존재의 주된 특징이 인간 실존에 적용된 모든 전통적 규정들을, 특별히 실체의 측면에서 말하는 그러한 기술들을 깨부수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러한 기술들, 곧 실체나 주체로서의 실존에 대한 전통적 개념들 모두는, 『존재와 시간』에서 ‘탈중심화된(decentralized)’ 현존재, 곧 주변 세계에 항상 ‘열린’ (그리고 종종 흩어진) 현존재에 의해 논박된다.”(Thanassas, 2012: 55)

55(2)-56(1): 타나사스는 전통적 철학의 ‘실체’와 ‘주체’ 개념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이 역사적 해체의 기획에서 나온 것이라고 지적한다. 즉, 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현사실적 경험을 발굴해내고자 한 역사적 해체의 기획이 하이데거의 원래 의도대로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 기획은 전통적 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급진적 비판은 가능하게 하였다. “[…] 해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 아닌 하이데거의 것인 맥락에서 그러한 개념들에 대한 급진적 재구성과 수정을 허락하였다. 메스키르히에서 온 철학자는 스타게이라에서 온 그의 전임자와 함께 가는 것에는 실패하였지만, 그의 ‘해체적’ 기획의 마찰은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의 개념성을 발전시키고 날카롭게 하는 것을 허락하였다.”(Thanassas, 2012: 55)

따라서 타나사스는 하이데거에게서 곧바로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유사성을 발견해내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하이데거의 역사적 해체가 그 자체로는 실패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즉, 두 인물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간격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그러한 평행성(parallelism)의 해석적 가치가, 『존재와 시간』을 감안할 때, 무시할 만하고, 종종 부정적 표지를 품을 수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두 철학자 사이에는 기초적, 근본적,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Thanassas, 2012: 55) 또한 하이데거의 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급진화’, ‘전유’, ‘재구성’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는 해석학적으로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급진화’, ‘대응’, ‘재점유’, ‘전유’, ‘역전’, ‘유비’, ‘재구성’과 같은 기술적 용어들의 기여는 해석학적 유효성이 적다. 이판티스가 최근에 강조한 것처럼, 『존재와 시간』 속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은 그러한 학설지적 작업(doxographic undertaking)으로는 규정될 수 없다.”(Thanassas, 2012: 56)

56(2)-57(1): 타나사스는 콘토스의 해석을 예시로 사용하여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즉, 한편으로, 타나사스는 콘토스가 타미니오나 볼피에 반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소피아’와 하이데거의 ‘본래성’ 사이의 관계를 더욱 설득력 있게 해설하였다고 인정한다. “콘토스는 옳았다. 소피아가 테크네로부터의 자신의 기원 때문에 비본래성의 한 형태로 남아 있는 반면, 『존재와 시간』의 ‘본래성-비본래성’ 쌍이 ‘프락시스’와 ‘포이에시스’ 사이의 아리스토텔레스적 구분을 반영한다는 타미니오의 입장을 그가 비판할 때 말이다. 콘토스는 세 갈래 배열을 대치시킨다. ‘테크네-프로네시스-소피아’ vs. ‘비본래성-(자연적) 염려-본래성.’ 이러한 세 갈래 도식은 타미니오에 의해 제시된 양가성보다는 설득력 있다.”(Thanassas, 2012: 56)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타나사스는 (a) 소피아를 이론의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반아리스토텔레스적 시도와 (b) 이론적 요소에 대해 경계하는 『존재와 시간』의 내용을 콘토스가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한다. “만일 『존재와 시간』의 본래성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소피아를 ‘표상한다’면, 이러한 표상은 표상하는 것과 표상되는 것 양쪽을 변형시키고 왜곡한다. 또한 만일 하이데거의 지속적인 열망이 프로네시스와 소피아의 일종의 통일적 융합이라면, 그러한 통일은 불충분한데, 왜냐하면 프로네시스는 자신의 내용을, 곧 잘 행위함(εὖ φράττειν)을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별된 부분들의 통일이 아닌데, 왜냐하면 구분 자체가 폐기되기 때문이다.”(Thanassas, 2012: 56-57)

57(2): 타나사스는 마지막으로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해 대답하고자 한다. 첫째로,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출판된 『존재와 시간』의 부분에서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는가?”(Thanassas, 2012: 57) 타나사스에 따르면, 그 이유는 (a) 하이데거가 역사적 해체의 기획을 포기하였고 (b) 하이데거의 개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적 기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존재와 시간』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책이지만, 이 사실은 단지 그 책의 발생에 적용된다. 그 책의 내용의 측면에서, [『존재와 시간』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는] 이와 같은 특징짓기는 오도적이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움으로 철학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지만, 『존재와 시간』에서 그의 대답은 단순히 반아리스토텔레스적일 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와의] 이러한 만남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킨다.”(Thanassas, 2012: 57)

57(3)-58(1): 두 번째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왜 여전히 흥미롭고 우리를 사로잡는가?”(Thanassas, 2012: 57) 타나사스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 주의사항을 지적한다. 하이데거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은 사실 (a)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자체에 주목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고, (b) 하이데거의 철학이 발전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하이데거주의자들에게도 중요하지 않다. 단지 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의 사태에 주목하는 사람들에게만 흥미로울 뿐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은 궁극적으로 사태(Sache) 자체에 열려 있는 사람들에게만 흥미롭다. 그것이 존속하는 긴장의 영역을 묘사하는 한에서만 논쟁으로 남아 있고 철학적 의의를 지니는 사태 말이다.”(Thanassas, 2012: 58)

58(2)-59(1): 타나사스는 하이데거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이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 사이의 관계 문제와 관련해서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즉, 그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단순히 ‘역사적 해체’의 기획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기초 존재론’의 기획에서 실패하였다. 그의 실패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는 주제화되지 않은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 사이의 관계 문제를 드러내어 새로운 방식으로 고찰하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하이데거의 ‘실패’는 궁극적으로 성공적인 것으로 증명되었는데,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과 그의 만남은 그 만남을 고려하지만 그 만남에 국한되지는 않는 문제들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소피아와 프로네시스 사이의,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 사이의 관계가, 실천적 지식과 실천적 진리라는 바로 그 개념과 마찬가지로, 그것들 중 하나이다. 다른 것은, 자기-충족적 활동으로서(『니코마코스 윤리학』)와 그 이후 실천적-기술적 기원의 인지적 과정의 결과로서(『형이상학』)의 소피아에 대한 이중적 기술이다.”(Thanassas, 2012: 58) 특별히, 그의 해석은 이론적 지식을 실천적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한 하이데거 자신의 철학적 시도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우리는 하이데거가 소피아를 자신의 기원에 근거하여 규정한다고, 그리고 이러한 재정위가 바로 소피아에 실천적 의의를 할당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까? 이 문제들은 분명하고 명백하게도 하이데거에 의해 제기되었는데, 왜냐하면 그 문제들이 그 자신의 철학으로부터 발생하고 그 자신의 철학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가 결정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의 의의는 사라질 수 없다.”(Thanassas, 2012: 59)

참고

Panagiotis Thanassas, “Phronesis vs. Sophia: On Heidegger‘s Ambivalent Aristotelianism”, The Review of Metaphysics, Vol. 66(1), 2012, pp. 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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