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푸코의 칸트의 니체화 전략과 그 실패 - 권력과 저항 中

사토 요시유키는 전기 푸코가 권력 장치들에 대한 저항 가능성을 밝히기 위해 "칸트적 주체의 니체화"를 시도했다고 말한다.1) 그러나 푸코의 것으로부터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하다"라며, 그는 구조주의적 권력 이론을 비판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풀어야할 문제는 다음과 같다. '칸트적 주체'란 무엇인가?(1) 그것의 '니체화'란 또 무엇인가?(2) '칸트적 주체의 니체화'가 무엇이길래 푸코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 가능하다고 말했으며, 저자는 왜 그것이 사실 불가능하다고 비판하는가?(3) 저자가 놓친 것은 무엇인가?(4)

저자는 푸코가 이해하는 '칸트적 주체'에 대해 설명한다.2) 칸트적 주체란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라고 설명된다. 직관에 의한 다양한 경험적 표상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초월론적 표상(선험적 인식 원리의 근거)에 의해 기초지어지 때문이다. 어쨌든 칸트적 주체는 이중 조작/작용에 의해 주체는 자신의 외부를 내재화하고 자신 내부에 모든 인식 기반을 만든다.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적 주체는 "초월론적 시선을 통해 자신 외부를 내부화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칸트의 『인간학』에서 인간은 '사유하는 주체'라는 이유로 "신과 세계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가진 자로 여겨진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칸트적 주체는 "세계의 외부성을 인간의 사유라는 내부성으로 재현전화하고 그 내부에 유폐하는 자", "외부성을 억압하는 자"는 이해된다. 곧, 그는 초월론적 시선을 통해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한다.

저자에 따르면 푸코는 칸트적 주체를 탈구축하려 한다. 무엇이 문제이기에 푸코는 칸트적 주체를 탈구축하려 하는가? 칸트적 주체는 "경험적-사회적 장에 존재하는 권력 관계를 부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논의의 구도는 다음과 같다. 칸트적 주체는 "사유의 외부를 억압, 그것을 동일자로 환원, 한계의 내부에 머물고 외부의 힘 관계를 부인하는 자"이고, 이에 맞서 푸코가 내세우는 주체는 '사유의 외부를 억압하지 않고, 동일자로 환원하지 않으며, 외부의 힘 관계를 부인하지 않는 자'이다. 푸코는 이를 위해 칸트적 주체를 니체화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 이것이 관건이다.

저자에 따르면 푸코는 '종교'나 '이상'이 어떤 확고한 기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발명된 것 혹은 만들어진 것이라고 폭로한 니체의 생각에 기반하여 "인식이란 발명된 것이고 형이상학적 기원을 갖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3) 이는 인식이 인식 대상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과 인식 사물 사이에는 동일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식은 무엇에 의해 규정되는가? 니체는 인식을 '대상을 자신의 권력 아래에 두고자 하는 상이한 충동들(조롱, 탄식, 저주하려는 충동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투쟁의 효과/결과/관계'라고 여긴다. 푸코는 니체의 인식 개념 속 "충동들"을 "사회적 장에서의 힘들"로 치환한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인식은 "사회적 장에서의 힘들 사이 투쟁의 효과/결과/억제 관계"이다. 인식이란 일종의 전략적 관계의 소산이고, 인식 주체는 사회적 장에서의 투쟁에 의해 형성된다.

푸코는 권력을 "힘들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과 대결을 내포하는 힘 관계들의 다양체"라고 정의한다. 이에 기반하여 푸코의 주체 이해를 재정식화해보자면, 주체는 "사회적 장에서의 권력의 효과/결과/관계"이자 "공허한 형식"으로 드러난다. 푸코의 이러한 이해는 인식을 "즉자적 현실의 인식 가능성"으로 여긴 칸트의 것과 매우 다르다. 후자의 것과 달리 전자는 인식 주체를 권력 관계와 관련지어 설명해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주체는 구조주의적 사유에 걸맞은 주체이다.

하지만 푸코는 이러한 인식 주체 이해에 기반하면서도, 주체가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권력이란 "힘들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과 대결을 내포하는 힘 관계들의 다양체"이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어떤 실체로 환원될 수 없고, 유동적이며, 항상 힘 관계가 뒤집힐 위험을 품고 있는 전략적 관계의 총체"로 정의되고, 권력 관계 속에는 항상 저항이 있다. 이 때문에 푸코는 주체가 "사회적 장에서의 권력의 효과/결과/관계"이지만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고 여긴다.

저자는 『DP』 속 푸코의 판옵티콘 분석에 근거하여 푸코의 주장을 비판한다. 판옵티콘에는 세 개의 항이 존재한다. 교도관(자동화, 탈개인화된 권력), 수감자 상위의 자아(권력의 제한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에 대해 자발적으로 작동시키는 자, 자기 자신의 복종화의 원리), 수감자 하위의 자아(상위의 자아에 복종하는 자)가 그것이다. 교도관으로 비유된 외적 힘들과의 권력 관계에 의해 수감자 상위의 자아로 비유된 규율을 부과하는 초월적 심급이 만들어진다. 이 초월적 심급이 지배와 저항이 교차하는 다양체인 경험적 심급을 지배한다. 따라서 푸코적 주체는 초월론적 자아 —권력의 강제를 받아들이는 상위의 자아— 와 경험적 자아 —그에 복종하는 하위의 자아 — 로 나뉘어진 존재이다. 이때 초월론적 자아는 "자기 속에 권력 관계를 각인"시킨 자로서, 권력의 대행자로서 경험적 자아를 감시하고 규율화한다. 이러한 관계는 고정적이고, 역전 가능성을 갖지 않는다.

내 생각에는 푸코의 전략이 잘못됐다는 점은 『DP』를 가져오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가 ①사회적 장에서의 권력의 효과/결과/관계"이고, ②권력에는 항상 저항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로부터 "주체가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는다. 그로부터 알 수 있는 점은 ①(푸코가 말한)주체의 통일성의 해체, ②(푸코와 말한 것과 달리) 권력 메커니즘의 완벽한 작용 —주체의 권력에의 저항 불가능성— 뿐이다.

초기 푸코의 비판 철학(칸트) 비판의 구체적 내용은 이렇다 치고, 이러한 비판적 작업 자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저자가 이것을 잘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후 진행될 후기 푸코에 대한 서술에서 등장할 수도 있겠다) 물론 저자는 푸코가 "칸트적인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 구조"를 반복하고 있음을 말하지만, 푸코의 니체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저자가 푸코의 작업을 보고 "칸트적 주체의 니체화"라고 표현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푸코는 이중체 구조만 반복할 뿐이지 칸트를 계승하지는 않는가? 아니다. 푸코는 현재의 가능성의 조건과 한계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방법론 —그 정신—을 계승한다. 다만 주체의 초월적 본성에 기반하지 않고, 그것을 역사적 구성의 차원에서 비판한다는 점에서 그 내용이 다르다. 이런 의미에서 푸코의 작업은 '니체의 칸트화'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니체의 칸트화냐 칸트의 니체화냐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중요하다.


  1. 이제 푸코란 모두 전기 푸코를 말한다.

  2. 이하의 모든 설명은 (저자가 옮기는) 푸코의 칸트 이해이다.

  3. 저자는 푸코의 「진리와 그 사법적 형태」를 인용하며 이처럼 니체-푸코의 관계를 요약한다. 만약 요약이 정확하다고 한다면, 푸코의 논변은 잘못됐다. 설령 니체의 주장이 옳다고 하더라도, 니체의 주장으로부터 "인식은 발명된 것이고 형이상학적 기원을 갖지 않는다"라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출처: 권력과 저항, pp. 3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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