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메스, 「포스트모더니즘의 니체 이용과 오용」

오랜만에 올빼미에 포스트모던 관련 포스팅이 올라왔길래 예전에 다른 곳에 쓴 관련 주제 글을 가져왔습니다. 흔히 니체는 포스트모던의 선구자로 알려져있는데 그러한 니체 이해에 반박하는 논문입니다.

전적으로는 아니나 저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는 편이고, 최근 포스팅한 글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논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프랑스 대가들의 니체 이해에 기반하여 니체를 바라보는 것이 정말로 옳은지 의심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유익한 논문이라 생각합니다.


게메스는 논문을 통해 니체가 해체론의 선구자가 아님을 밝히며 그를 옹호하는 자(포스트모던)와 비판자(하버마스) 모두가 허수아비 때리기를 했다고 주장한다.

0. Intro

니체 철학에 대해 비판적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많은 이들이 그를 해체의 본보기(model of deconstruction)라고 여긴다. 특히 주체의 죽음이라고 흔히 표현되는 탈 중심화된 자아(de-centered self)를 제시한 철학자로 여긴다. 하지만 통념과 달리 니체는 자아의 통일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이는 그의 자아 구성에 관한 건축술 메타포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주체의 분열 상태에 대해 말인(Last man)이라고 말할 정도로 상당히 비판적이었고, 흔히 니체의 통일된 주체 비판이라 여겨지는 것의 핵심은 현대의 주체가 단순한 지식-조각 짜깁기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 있다. 그는 통일성 자체를 비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통일된 의지 아래에서 행해지는 자기-창조적 자아를 긍정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만일 모던/포스트모던을 가르는 기점이 중심이 잡혀있는 자아의 유무라면 니체는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모던 쪽에 가깝다.

1. 도그마 거부

포스트모던 옹호자이든 비판자이든 니체가 단일 주체(singular subject), 통일된 자아(unified self)에 대해 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근거로 드는 텍스트는 활동 배후에 활동을 주도하는 실체 혹은 존재가 있다는 점을 비판하는 구절인 "활동하는 자는 활동에 덧붙여 단순히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The doer is merely a fiction added to the deed (GM1, 13)"이다. 그러나 우리는 해당 구절이 단일 주체, 통일된 자아에 대한 전면적 비판인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

해당 구절을 통한 니체 비판의 핵심은 활동하는 자가 활동 배후에 있다는 점이다. 니체의 비판 요지는 활동하는 자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 아니라 활동하는 자가 활동과 분리되어 그 뒤에 있다는 점에 있다. 그에게 있어 활동하는 자는 배후 실체가 아니라 활동의 모음이다.

이는 활동 뒤에 배후가 있다고 상정하는 실체 데카르트적 사고(이하 모든 '데카르트적 사고'는 '기독교적 사고'와 동치임)와 정반대의 사고다. 그런데 니체가 이러한 형이상학적 오류(기만)을 지적하기 위해 비판한 것은 아니다. 니체는 오류와 기만이 인간 삶의 피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류와 기만 자체에 대해서 비판의 날을 세우지는 않는다. 니체가 짚고자 하는 것은 데카르트적 세계관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미리 주어진 외적 권위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기에 허무와 안주에 빠졌다는 점이다.

현 사태에 맞서 니체는 우리의 존재 가치가 이 세상에서 우리가 활동하고 성취하는 바에 의해 정해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즉, 우리의 활동 모음인 활동하는 자에 의해 정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니체는 '활동의 단순한 모음'과 '단일 주체(통일된 자아)'를 구별한다. 일단 모든 사람이 활동의 모음인 바, 외적 권위에 의존하든 아니든 모든 사람은 활동 모음이기는 하다. 현 세계에 안주하며 허무주의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 내부에 다양한 욕망을 갖고 또 그것에 휘둘리며 다양한 활동을 행한다.1) 이렇게 외적 권위에 따라 휘둘려 사는 사람을 '활동의 단순한 모음'이라고 부른다. 자신만의 중심이 없다는 말이다. 반면 외적 권위에 비판적 태도를 유지하고 자신만의 가치를 정초한 자가 '단일 주체(통일된 자아)'이다. 그리고 허무주의 극복이 니체의 목표인 바, 단일 주체 형성이 니체 철학의 목표이자 모든 이가 추구해야 할 성취돼야 할 무엇이다.2)

이 점을 GM2가 잘 보여준다. 니체는 해당 부분에서 약속할 권리를 가진 동물을 만드는 것은 이루어내야 할 무언가로 제시한다. 그리고 약속하는 것은 "to commit one's self for the future", 이런저런 대립하는 욕망들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들을 하나로 응집하고 진정한 자신을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는 소수만 성취 가능한 것으로 제시된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포스트모던 옹호자이든 비판자이든 "활동하는 자는 활동에 덧붙여 단순히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구절을 통해 니체가 단일 주체(singular subject), 통일된 자아(unified self)에 대해 공격을 감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작 니체가 비판한 것은 (1) 활동과 활동하는 자를 분리시키는 데카르트적 사고관 (2) 그로 말미암은 단일 주체의 소여라는 잘못된 믿음과 단순한 활동의 모음(활동하는 자)이다. 오히려 니체는 (1) 데카르트적 사고관에 맞서 단일 주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행하고 (2) 그것을 자신 철학의 목표와 우리가 달성해야 할 무엇으로 제시했다.

2. 자기 형성의 건축술(The Architecture of Selbst-Bildung)

그런데 니체는 단일 주체를 형성(Unification)하는 일은 의식적 차원에서 목적 지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독특한 주장을 펼친다. 그에게 있어 단일 주체는 다양한 욕망들의 대립과 투쟁에 의해 주-욕망(Master drive)의 아래로 나머지 욕망들이 위계질서 지어지고 정렬됨의 결과이다. 본디 다양한 욕망들이 산재해있다는 것이 자연적 상태라고 한다면, 그에게 단일 주체란 자연적이지 않고 아주 예외적인 케이스이다.

주-욕망에 대한 서술은 니체와 포스트모던 사이에 큰 간극이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리오타르는 포스트모던의 시대에는 메타내러티브와 통일(unity)가 부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주-욕망에 따라 나머지 것들이 위계질서 지어짐을 말하는 니체와 리오타르의 사상이 친화적이라기보다는 적대적이고 대립한다. 니체적 의미에서 자유 영혼은 리오타르가 말하는 포스트모던적 인간과, 예컨대 본질주의적 도그마의 제약으로부터 제약되지 않음이라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통일된 자아를 논한다는 점에서 상이하다. 또 다른 예로 데리다의 니체 이해를 언급할 수 있겠다. 데리다는 니체를 반-본질주의자임을 그의 여성 비유를 통해 잘 밝혀냈다. 하지만 데리다 또한 니체의 의도와 달리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남과 총체적 무질서와 쉬이 연결시키고 말았다. 니체의 비판 대상은 자연 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데카르트적 자아 같은 초월적 통일 개념일 뿐이다.

3. 푸코의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독해

푸코는 『니체, 계보학, 역사』에서 니체가 사용한 계보학이 통일된 자아 개념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혈통을 찾아나가는 것은 토대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전에는 부동의 것이라고 여겨진 것을 흩뜨리는 작업이다." 나아가 그는 불연속 지점이 도입될 때 역사가 유효(effective history)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 역사를 통일적이고 일관성 있는 내러티브를 구축하기 위해 역사를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생기는 부조화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니체가 시기에 따라 '통일(Einheit; unity)'이라는 개념을 달리 사용해왔음을 알아야만 한다. 즉, 『반시대적 고찰』과 같은 초기 저작에서의 쓰임과 『도덕의 계보』와 같은 후기 저작에서의 쓰임이 다르다는 말이다. 해당 개념은 후기보다 초기 저작에서 약 10배가량이나 더 많이 사용됐으며, 후기에서는 부정적으로 묘사된 것과와 달리 초기 저작에서는 아주 긍정적으로 묘사됐다. 이는 니체 철학 속 비판 타겟이 시기에 따라 조금은 다르다는 점을 인지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초기 저작에서 니체는 말인과 니힐리즘을 다루었고, 통일 개념은 니힐리즘 극복을 위해 대립항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 대립은 그가 우러러보는 고전 그리스 시대에 성취된 스타일의 통일과 그가 비난하는 스타일의 통일을 이룩하지 못하는 당대 사이의 대립과 공명한다. 즉, 통일은 상당히 긍정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후기 저작에서 니체는 말인과 니힐리즘 극복을 나아가기 위해 예수-그리스도의 유산들을 건드리기 시작한다. 즉, 말인과 니힐리즘에 대해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 포인트가 조금 더 세심해졌다고 보면 된다. 이 시기에서 그는 '통일'이라는 단어를 데카르트적·초월적 의식적 주체(자아)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다. 즉, 통일은 상당히 부정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쉽게 말해, 당대의 시대적 문제를 폭로한 초기 저작에서 그는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통일'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했다. 후기에 들어 그는 자신이 얘기하는 것을 독자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자 데카르트적·초월적 의식적 주체(자아)라는 좀 더 세밀한 포인트에 비판하며, '통일'에 부정적 가치를 부여했다.

만일 이 구분이 옳다면, 푸코를 포함한 포스트모던의 니체 독해는 틀린 것이 된다. 니체는 데카르트적·초월적 의식적 주체(자아)의 의미에서 '통일'은 거부하나, 통일 자체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앞선 설명에 따라 순서상 데카르트적 자아의 통일성에 대한 후기 저작의 비판을 수용한 후에 초기저작의 메시지를 수용할 수 있다면, 데카르트적 자아가 갖는 '통일'의 거부 이후에야 초기에 말한 '통일'된 자아가 형성될 수 있고, 바로 그때에야 니체가 말하는 니힐리즘 극복이라는 목표가 달성 가능하다.

4. The politics of Estheticism(유미주의적 정치(?)) 3)

그렇다면 포스트모던은 무슨 이유로 통일된 자아에 대한 니체의 강조를 간과했는가? 시대적 상황을 고려했을 때, 통일된 자아 개념이 나치즘이나 파시즘 등과 연결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니체의 강조를 외면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두 방법으로 대처 가능하다.

첫째, 니체는 과거에 통일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그것이 없다며 과거로 회귀하자는 낭만주의자들(무솔리니)과 생각이 다르다. 니체는 통일이 이루어진 적이 없고 성취돼야 할 목표라고 생각한다.

둘째, 니체는 통일된 자아를 통해 모든 외부의 오염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전적 이유를 들먹이며 유대인을 학살하는 집단(파시즘, 나치즘)과 연결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통일된 자아는 오히려 외부의 무수한 영향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스스로가 잘 통제할 수 있는 자일뿐이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구절이 그 예시이며, 오히려 니체는 외부와의 투쟁을 긍정적으로 묘사했지 외부의 것을 절멸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의 순수 개념에 대한 거부감 또한 증거가 될 수 있겠다.

5. 노예, 주인, 말인, 고귀한 자(Slave, Master, Last Man, Overman)

우리는 지금까지 얘기를 통해 '노예와 주인', '말인과 고귀한 자' 개념쌍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통념과 달리 니체는 노예에게 부정적 면모만을 부여하지 않았다. 니체는 노예가 구성력(형성하는 힘; formative power)과 영리함을 갖추고 있다고 칭찬한다4) 그 대표적인 예가 노예가 만든 기독교이다. 그가 볼 때 노예의 내면에는 다양한 욕망이 산개해 있기 때문에 창조의 좋은 원천이 된다. 그 반대항인 주인은 다른 이유를 들며, 즉 자신 내면의 본능을 행동으로 즉시 이행할 수 있는 능력과 르상티망에 이르게 하는 억압 기제를 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이유로 칭찬한다. 그러니까 노예는 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 거세된 자이나, 주인은 노예의 입장에서 봤을 때 너무 단순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주인과 노예 모두 각각의 장단점을 갖고 있는 존재이므로, 노예가 지배하는 세상이 좋지 않은 것처럼 주인이 지배하는 세상이 니체에게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다.

리처드슨의 제안에 따르면 고귀한 자(위버멘쉬)는 이 노예와 주인의 종합을 표현한다. 그는 노예의 복잡함을 포함하면서, 또 그것을 하나의 전체로 통합해내는 그런 자이다. 그리고 이 통합은 노예 속에 있는 르상티망의 계기들을 단순히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반-르상티망적인 욕망으로 전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통합 과정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해 복잡 다양이 위계질서화되지 못한 경우, 그때의 결과물이 말인이다. 5) 이에 관한 텍스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을 처음으로 명시한 『BGE 260』에서 니체는 "모든 더 고귀하고 고도로 혼합된 문화에서는 두 도덕을 조정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라고 말한다. 『HH』에서는 "문화의 위대한 건축이 발달된 모든 곳에서 이러한 건축술의 과제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 힘들을 억압하거나 속박하여 쳐부수지 않고, 어느 정도 친화력을 지닌 다른 강력한 집단의 힘들로 서로 융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고귀한 자는 다양복잡을 하나의 행동으로, 하나의 위계질서를 갖춘 것으로 전용할 수 있는 그런 자이다. 즉, 자신 내면의 노예적인 면모와 주인적인 면모가 잘 종합된 그런 존재이다. 이렇게 주인도 노예도 아닌 새로운 통일체가 바로 니체가 말하는 이상적 존재, 차라투스트라, 위버멘쉬, 고귀한 자이다. 6)


  1. 바로 이점에서 게메스와 들뢰즈의 니체 해석이 갈린다. 들뢰즈는 니체 철학의 핵심에 다양성(multiplicity), 생성(becoming), 가능성(chance)에 대한 순수 긍정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게메스의 해석에 따르면 다양성이 마냥 니체 철학에서 좋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다양성이 '단순한 모음'에 머물 경우, 그것은 단일 주체 형성이라는 니체 철학의 목표 달성에 방해일 수도 있다.

  2. 그러니까 니체 철학이 '모든 권위에 대한 거부'로 읽히면 안 된다. 니체가 거부한 것은 그저 주어진 외부의 권위일 뿐이지, 게메스의 해석처럼 자기 자신을 정당화해주는 단일 주체 따위에 대한 권위를 거부한 것은 아니다.

  3. 크게 필요 없는 파트같고, 주장의 근거가 너무 빈약하다.

  4. 게메스는 리처드슨의 논의를 참으로 받아들이고 주장을 펼치고 있다.

  5. 니체의 논의가 헤겔의 주인-노예 변증법에서 드러나는 지양(Aufhebung) 논의와 아주 유사하다.

  6. 고귀한 자와 위버멘쉬가 구분되어야 한다는 학계 내 주장 또한 있으나, 게메스는 그 주장을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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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이런 류의 주장을 접할 때 학술 "외적"인 함축을 생각해보곤 합니다. 포스트모던 연구자들의 니체 이용이 오류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학술 내적으로 가치있는 주장인 것과 별개로, 만약 이것이 정설이 되어 포스트모던 연구자들이 니체를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면... 그건 그거대로 학술 외적으로는 (특히 니체 연구자로서는) 참 난감한 상황이 아닐까 하는 상상이죠.

비슷한 상황이 니체 뿐 아니라 다른 철학자들의 경우에도 많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가령 브랜덤이나 맥도웰이 헤겔주의를 칭할 때마다, 진퉁(?) 헤겔주의 해석자들은 이들 헤겔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곤 하죠. 또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해서도 티모시 윌리엄슨이 똑같이 말합니다. 크립키가 자신의 독창적인 비트겐슈타인 해석을 통해 마지막 불꽃을 태웠으나, 비트겐슈타인 지지자들은 크립켄슈타인이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라고 비판했고, 그렇다면 결국 비트겐슈타인을 읽을 유인이 더욱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죠.

물론 학술 연구자 입장에서 이런 외적 유인까지 고려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만약 자신의 주장이 결과론적으로 자신이 연구하는 주제를 학계로부터 소외되게끔 이바지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혹은 이것을 인지하게 된다면), 이건 이거대로 참 슬프네요 :s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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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유인의 감소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흥미롭네요! 저는 철학계와 독서문화계(?)에서 '니체'라는 이름이 너무 범람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범람하는 니체 상'을 교정하는 작업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말씀하신 반대의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겠군요.

(1)

정리가 잘 되네요! 니체의 철학이 본질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여전히 '통일성'을 중요하게 강조한다는 사실을 깔끔하게 잘 설명하고 있는 문단이라고 생각해요.

(2)

약간 다른 문제이지만, 니체 해석을 두고서 가다머와 데리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어요. 하이데거는 니체를 '마지막 형이상학자'로 해석하였는데, 가다머는 이 해석을 받아들이는 반면, 데리다는 니체가 형이상학을 완전히 떠났다고 보아서요. 저는 두 입장 중에서 어느 한쪽을 특별히 지지하지는 않지만, 글을 읽다 보니, 니체를 형이상학자로 보는 해석도 포스트모던적 니체 해석과는 대척점에 서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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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그 주제와 관련하여 윤님이 블로그인가 올빼미인가에서 쓰신 글을 봤었습니다 ㅎㅎ. 다만 하이데거, 가다머, 데리다 모두 제가 잘 모르다보니.. :smiling_face_with_t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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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고 있는 포스트모던적 니체 해석 비판 문헌들입니다. 공교롭게도 님이 번역한 Ken Gemes의 논문을 우연히 읽게된 것이 이 문헌들의 존재를 확인하게된 계기였습니다. Brian Leiter와 Ken Gemes 외에도 Brian Lightbody, Iain Morrisson, John Richardson, Peter R. Sedgwick 등 니체를 자연주의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 모두 포스트모던적 니체 해석에 비판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Brian Leiter - Nietzsche and Aestheticism (1992)
[리뷰되고 있는 Alexander Nehamas의 Nietzsche: Life as Literature (1985)은 아주 유명한 책이고 절판되기는 했지만 국역 출간되어 있습니다.]

Ted Sadler - Nietzsche, Truth and Redemption: Critique of the Postmodernist Nietzsche (1995)

Dave Robinson - Nietzsche and Postmodernism (1999)

Thomas Jovanovski - Postmodernism’s Self-Nullifying Reading of Nietzsche (2001)

Jan Rehmann - Postmoderner Links-Nietzscheanismus: Deleuze & Foucault – Eine Dekonstruktion (2004)

Jan Rehmann - Deconstructing Postmodernist Nietzscheanism: Deleuze and Foucault (2022)
[위 저작의 영역판입니다. 서울대 인문논총 제54집 (2005)에 박찬국 선생이 쓴 해설글이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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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감사합니다. 게메스를 포함하여 언급하신 PR Sedgwick, 라이터, 리처드슨 등은 현대 니체 연구의 최전선에 있는 학자이지요. 제가 모르고 있던 연구자도 몇 있군요.

말씀하신 네하마스의 책은 국문 번역되어 있지만 번역 지적을 받고 있지요. 그의 다른 책 The Art of Living: Socratic Reflections from Plato to Foucault도 읽어봤는데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네하마스는 사실 고대철학 대가기도 해서 고대와 근현대 철학을 연결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참고해봄직한 명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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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 역시 부지불식 간에 니체를 단일 주체나 통일된 자아를 거부한 것으로 이해했던 것 같기에, 한번쯤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별개로 이런 단일 주체나 통일된 자아에 대한 해석의 함축에 관해서는 좀 의문이 더 생겼는데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 잘 모르기는 합니다만, 저로서는 단일 주체 및 통일된 자아에 대한 거부가 즉각 상기된 "포스트모더니즘"의 명제들로 이어지는 불분명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은 저한테는 좀 상호 독립적인 얘기처럼 느껴졌거든요. 이를테면 단일 주체 및 통일된 자아에 대한 거부를 매우 명시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례로는 여러 불교 전통 및 데이비드 흄 등이 생각이 나는데, 이들과 포스트모더니즘과의 친연성이 필연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포스트모던"적인 독해에 그나마 더 즉각적인 함축을 갖는 니체의 입장은 관점주의인 것 같습니다. (물론 관점주의가 정말로 "포스트모던"적인 함축을 갖는지 따지는 건 둘째치구요.) 그런 의미에서 니체 틀 하에서 볼 때 단일 주체에 관한 견해와 관점주의 간에 모종의 연결점이 있겠다, 싶은 심증이 가기도 합니다만, 여전히 전 이게 좀더 명료화될만한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딴 얘기입니다만,

이 리처드슨의 해석이 요즘 니체 학계에서는 얼마나 널리 받아들여지나요? 저는 리처드슨의 저작을 보고 많이 배웠으면서도 이 해석에는 끝내 동의를 하기 힘들었는데, 요즘 분위기는 어떤지 좀 궁금해서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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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저로써 뭐라고 해드릴 말이 없네요 ㅠㅠ. 저에게도 조금은 낯선 해석인지라 다른 니체 전문가들이 쓴 서평을 좀 보려구 합니다. 그 후에 재차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리처드슨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니체 대가인 Schacht의 리처드슨의 해당 주장이 나오는 책에 대한 리뷰가 가장 눈에 띄네요.

Indeed, some of Richardson 's accounts are not only greatly oversimplified but highly questionable at best. For example, he asserts that for Nietzsche there are "three basic types of persons"-namely , "master, slave, and overman" (52). This truncated list would do Procrustes proud. One who does not already know better will come away with a very impoverished picture of Nietzsche's rich inventory of human possibilities. As if to make up for its shortness, Richardson goes on at considerable length about each "type," ascribing all sorts of traits to them that go well beyond what Nietzsche actually says about them.
Schacht, R. (1997). [Review of the book Nietzsche's System]. Journal of the History of Philosophy 35 (3), 476-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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