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도르노를 공부하다가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봤습니다.
철학함에 있어 아도르노 니체와 매우 유사하다고 느껴진다.
아도르노의 비동일자와 도덕 탐구가 니체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김종기, 장진범 선생님이 이에 관해 연구한 바가 있다. 심지어 아도르노는 본인 입으로 『도덕철학 강의』에서 헤겔보다도 니체에게 더 큰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한다.
Nietzsche since, to tell the truth, of all the so-called great philosophers I owe him by far the greatest debt – more even than to Hegel.
PM 172
하지만 이런 세부적 내용이 아니라 그들이 철학을 대하는 자세 또는 철학에 대한 이해 방식이 정말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1) 내 생각에는 아도르노와 니체 모두 철학을 부정적 방식으로 진행되는 운동으로 생각한다.
아도르노의 부정적 철학적 탐구 방법은 너무 유명해서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는 이데올로기화된 현실 이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을 주제넘은 태도라고 체념하고 자기 조소하는 철학을 타파하고자 한다.
문제는 니체인데, 긍정이라는 키워드로 니체가 브랜딩되다 보니 부정과 니체가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항상 니체는 당대 인간이 처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항상 적을 두고 비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안티 크리스트』 같은 책에서 그 모습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초기작들도 예외가 아닌데, 그는 살레노스에 맞선 호메로스의 작업에 영향을 받아 『비극의 탄생』에서 쇼펜하우어를 비판하며 자신 이론을 내세운다.
(2) 나아가 두 사상가 모두 자기반성이 철학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두 철학은 특정한 입장을 취하는 철학에 회의적이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 서문 <철학의 가능성>에서 "한계설정을, … 스스로가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 성찰하는 일을, … 그러한 순진성을 탈피한 철학만이 가치를 갖는다"라고 정확히 밝힌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 서문 <변증법은 입장이 아니다>에서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인 변증법에 대해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변증법은 어떤 견해를 밝히는 이론이 아니라 대상이 그 개념에 동화되지 않는다는 점, 대상이 개념에 딱 들어맞는다는 규범과 모순에 빠진다는 점을 밝힐 뿐이다. 따라서 그에게 철학이란 특정 입장 혹은 견해를 담지하는 것이라기 보다 사유의 총체적 동일성의 극복을 위해 모순을 폭로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자기반성에 대한 니체의 강조는 『도덕의 계보』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제3논문> 9절에서 수단적 이성(도구적 합리성)을 의미하는 "루터도 즐겨 영리한 부인(Fraw Klueglin), 영리한 창녀라고 부른 이성 일반"을 언급하며, 사유가 자기반성 능력을 결여했다며 비판한다. 그러면서 <제3논문> 24절에서는 "자신을 금욕적 이상의 반대자라고 여기는 최후의 이상주의자들"을 말하면서, 그들이 사실 니체 본인과 독자 우리라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자신 스스로에 대한 해부와 비판을 감행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이 문제의식은 최종장에 해당하는 27절까지 이어진다. 니체는 자신을 포함한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기비판과 극복, "스스로를 문제로 의식"함으로써 비로소 금욕적 이상을 벗어날 수 있다며 자살 특공대 임무를 부여한다.
(3) 마지막으로 두 철학 모두 주체 중심 철학에 비판적이지만 주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아도르노는 데카르트와 같은 주체 중심 철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지만, 사유의 반성 능력을 갖춘 주체가 없다면 현실의 거짓 화해 상태도 극복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하이데거 비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하이데거가 주체의 무기력화라는 현실의 문제점을 잘 포착했다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지만, 그가 주체 개념을 폐기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는 점에 대해 비판적이다. 아도르노는 주체의 자기반성을 통해 구성적 주체의 절대성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가 인용하는 헤겔의 표현에 따르면 "주체가 함께 있을 경우에만 주체에 대한 속박이 줄어든다. (ND 131)"
니체 또한 주체 중심 철학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주체 전체를 버리지 않는다. 니체의 번개 비유가 주체 개념 전체를 버려야 한다고 해석되나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당 비유를 통해 니체는 활동하는 자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 아니라 활동하는 자가 활동과 분리되어 그 뒤에 있다고 생각하는 철학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활동하는 자는 배후 실체가 아니라 활동의 모음이다. 나아가 그는 외적 권위에 따라 휘둘려 사는 사람을 '활동의 단순한 모음'이라고 비판하며, '활동의 단순한 모음'과 '단일 주체(통일된 자아)'를 구별한다. 『즐거운 학문』의 아주 유명한 구절 "자신의 특성(성격) 에 스타일을 부여하는 것"에 대한 니체의 강조는 주체가 단순한 활동의 모음이면 안 되고 통일된 자아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읽히며, 단일 주체의 능력을 통해 니힐리즘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이 니체 철학 전체의 구도이다. 들뢰즈의 주장과 달리 니체 철학에서는 다양성이 항상 긍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성은 종합되어야 한다. 물론 주체 중심 철학의 테제와 달리 니체 철학 내에서 다양과 종합 사이의 갈등은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그에게 다양없이 주체도 없고, 주체 없는 다양은 사유를 포기한 이데올로기이다.
위의 인용문의 이어지는 문장에서 아도르노는 니체의 도덕 비판이 추상적 부정에 머무르고 말았다며 비판한다.
I would criticize Nietzsche for having failed to go beyond the abstract negation of bourgeois morality, or, to put it differently, of a morality that had degenerated into ideology, into a mask which concealed a dirty business.
ibid.
니체에 대한 아도르노의 부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내용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형상 아도르노와 니체가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 주제에 관하여 공부를 해서 논문을 내보고 싶다. 언젠가는 『부정변증법』 독해를 마무리 짓고, 『도덕철학의 문제』도 곱씹고 싶다. 나아가 시간이 주어진다면 ROUTLEDGE ADVANCES IN DEMOCRATIC THEORY 시리즈에서 최근 출판된 Vasilis Grollios의 『NEGATIVITY AND DEMOCRACY: MARXISM AND THE CRITICAL THEORY TRADITION』도 보고 싶다. 시간은 너무 빨리가고 멍청한 내 머리는 따라가기도 벅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