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신학 없는 해체주의를 향하여: 해체를 바라보는 네 가지 관점」 출판

저의 논문 「부정신학 없는 해체주의를 향하여: 해체를 바라보는 네 가지 관점」(『현상학과 현대철학』, 제95권, 2022, 161-210)이 출판되었습니다. 논문의 제목에서 등장하는 ‘부정신학(negative theology)’이란 데리다의 전문 용어 중 하나입니다. 겉으로는 형이상학을 거부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형이상학을 은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철학적 입장이 바로 데리다가 비판하는 ‘부정신학’입니다. 문제는 데리다조차 다시 부정신학에 빠지고 만다는 주장이 종종 해체주의의 안과 밖에서 제기된다는 점입니다. 이번 논문은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유사초월론적 철학으로 해석하려는 관점(가셰), 아이러니즘으로 해석하려는 관점(로티), 우편적 해체주의로 해석하려는 관점(아즈마), 차연의 형이상학으로 해석하려는 관점(가버·이승종)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들이 모두 부정신학의 문제를 철저하게 극복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네 가지 관점으로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해석을 통해 부정신학 없는 해체주의가 여전히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논증합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대한 주류와 비주류 해석을 포괄적으로 논평하면서 부정신학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들어가는 말

해체주의는 대단히 유명한 만큼이나 대단히 모호한 사조이다. 1967년에 『그라마톨로지』, 『목소리와 현상』, 『글쓰기와 차이』가 출판된 이후로 2004년에 데리다가 사망하기까지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현대철학의 중심적 사조는 해체주의였다. 데리다의 인기가 다소 사그라진 오늘날까지도 해체주의를 문학, 법, 정신분석, 정치, 신학, 건축 등 다양한 주제에 적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의 과정에서 해체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제나 많은 논란이 벌어진다. 해체를 단순한 말장난으로 치부하는 분석적 전통의 철학자들만 해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해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데리다 해석자들 사이에서도 의문은 자주 제기된다. 해체를 엄격한 철학적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 해체를 어떠한 철학적 방법으로도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관점, 해체를 서로 다른 두 가지 철학적 방법으로 구분하려는 관점, 해체를 실패한 철학적 방법이라고 비판하는 관점 사이에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류 해석은 해체를 엄격한 철학적 방법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해체가 형이상학을 성립시키는 아포리아나 모순을 폭로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즉, 형이상학은 흔히 아무런 아포리아와 모순을 허용하지 않는 철학의 체계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해체주의는 역설적이게도 형이상학이 아포리아와 모순 위에 세워진 구조물이라고 비판한다. 형이상학을 구성하는 조건이 바로 형이상학을 무너뜨리는 아포리아와 모순이라는 사실이야말로 해체주의가 보여주고자 하는 사태이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은 해체주의를 일종의 ‘유사초월론적 철학’으로 해석한다. 칸트의 초월론적 철학이 인식의 조건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처럼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형이상학의 조건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대안적 해석은 해체를 엄격한 철학적 방법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엄격한 철학적 방법이 언제나 형이상학에 근거하여 성립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즉, 해체를 엄격한 철학적 방법에 따라 논증하려는 시도는 해체주의를 형이상학으로 구성하고 만다. 우리는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해체주의를 다시 형이상학으로 만드는 오류를 경계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은 해체주의를 아무런 방법도 없이 글쓰기만을 계속하고자 하는 ‘아이러니즘’으로 해석하거나, 강한 의미의 방법을 포기하고서 약한 의미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우편적 해체주의’로 해석하거나, 형이상학을 철저하게 극복하지 못하고서 형이상학에 빠지고 마는 ‘차연의 형이상학’으로 해석한다. 해체주의가 일관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엄격한 철학적 방법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고는 해체를 바라보는 네 가지 관점을 비판적으로 비교하여 해체주의가 형이상학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해체에 대한 주류 해석은 종종 전통적 형이상학을 비판하기 위해 새로운 형이상학을 다시 끌어들이는 ‘부정신학’의 문제에 빠져 있는 것으로 의심받는다. 대안적 해석 역시 해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형이상학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 형이상학을 극복하려는 작업이 반드시 새로운 형이상학에 의존해야 할 필요는 없다. 아무런 형이상학에도 의존하지 않고서 전통적 형이상학이 상정한 이론적 구조를 비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한다. 본고는 우선 해체주의를 유사초월론적 철학으로 규정하는 로돌프 가셰의 주류 해석이 지닌 문제를 지적할 것이다(제2장). 다음으로, 해체주의를 아이러니즘으로 규정하는 리처드 로티의 대안적 해석 역시 거부할 것이다(제3장). 더 나아가, 기존 해석들을 부정신학이라고 비판하는 아즈마 히로키의 해석 역시 부정신학을 극복하지 못한다고 비판할 것이다(제4장). 오히려 부정신학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비트겐슈타인의 자연주의를 통해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보완하고자 하는 뉴턴 가버와 이승종의 해석에서 발견된다고 주장할 것이다(제5장). 그럼에도, 해체주의가 이미 그 자체로 자연주의를 포함하고 있다고 강조하여 부정신학 없는 해체주의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논증할 것이다(제6장).

이번 논문은 전적으로 이승종 교수님 덕분에 쓰일 수 있었습니다. 작년 1월에 이승종 교수님의 『비트겐슈타인 새로 읽기: 자연주의적 해석』 제1장을 읽고서 지적 충격을 받은 것이 이번 논문을 쓰게 된 결정적인 계기입니다. 이승종 교수님은 그 책에서 철학사 전체를 ‘자연주의’와 ‘해체주의’라는 관점을 해석할 수 있다는 놀라운 주장을 제시하면서, 그 둘 사이의 상호보완적 관계를 해명하였습니다. 저에게는 이러한 독해가 대단히 신선하고 흥미로워서 ‘나도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라는 생각과 ‘내가 이 글에 대한 최초의 논평자가 되고 싶다.’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습니다. 논문의 작성 과정에서도 이승종 교수님께서 도움을 주신 부분이 굉장히 많습니다. 가령, 제가 로돌프 가셰의 The Tain of the Mirror를 읽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승종 교수님의 추천 때문이었습니다. 본래 이번 논문은 가셰에 대한 논평 없이 3, 4, 5, 6장의 내용만으로 처음 구상되었다가, 이승종 교수님께서 가셰와 로티 사이의 데리다 해석 논쟁에 대해 알려주셔서 2장의 내용을 논문에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그밖에도, 논문 곳곳에 제가 이승종 교수님께 받은 지적 충격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애초에 이번 논문의 글쓰기 스타일은 이승종 교수님의 글쓰기 스타일을 의도적으로 모방한 것입니다. 한국현상학회 투고 규정상 논문에 직접적으로 ‘감사의 말’을 쓰지는 못하였지만, 이승종 교수님이 아니었다면 이 논문은 쓰일 수조차 없었거나 쓰였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짜임새는 결코 갖추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번 논문이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대한 국내의 논의에 조금이라도 기여하면 좋겠습니다. 데리다는 단순히 지난 시대의 철학적 유행 정도로 평가되기에는 아까운 인물입니다. 오히려 그의 사유는 형이상학이 다시 부활하고 있는 우리 시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 위해 더욱 절실히 요구됩니다. 우리는 ‘데리다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있는 철학자인지’와 ‘오늘날 철학이 데리다에게서 정확히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한 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 차이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이번 논문의 제2장, 제3장, 제4장, 제5장을 유익하게 읽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해체’라는 개념이 어떻게 논증적으로 해명될 수 있는지가 궁금하신 분들은 논문의 제6장이 흥미를 느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분들이 논문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논문 다운로드 링크(한국현상학회)

https://ksp.jams.or.kr/co/main/jmMain.kci

논문 다운로드 링크(DB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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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논문 출판된 것 축하드립니다. 윤 선생님의 논문 나중에 꼭 읽어보고 싶네요.

사실, 저는 '부정신학'이라고 하면 그리스도교 전통에 기반하여 디오니시우스에 의하여 정립되고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여 고도로 발전한 방법적 via negativa(부정의 길) 로서의 신비적 신학인 'Theologia Negativa'를 연상하게 되는데요,

여기서 데리다가 '부정신학(théologie négative)'이라는 고중세 신학/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그의 저작이 현대 프랑스 철학으로서 읽혀지게 함과 동시에 고대/중세적 문맥을 환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용어의 사용을 현대 프랑스 철학, 특히 현상학에 있어서 나타난 '신학적 전회'의 한 사례로도 볼 수 있을까요? 귀찮은 질문을 했다면 죄송합니다.

항상 좋은 글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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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부정신학에 대한 데리다의 언급은 '신학적 전회'의 한 사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부정신학과 데리다의 해체주의 사이의 관계를 깊이 탐구한 것이 존 카푸토이고, 특별히 그의 유명한 저서 The Prayer and Tears of Jacques Derrida: Religion without Religion이거든요.

카푸토는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부정신학을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 신학 일반을) '초본질주의'의 유혹으로부터 구해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종교 없는 종교'라는 책의 부제처럼, 형이상학적 토대나 본질 따위를 상정하지 않고서도 여전히 우리가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의 사유를 오늘날에 의미 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바로 그런 사유가 데리다의 저작 전반에서 나타난다고 해석하는 거죠. (이후에 이러한 생각은 카푸토 자신의 '약한 신학(weak theology)'으로 발전됩니다.) 반면, 카푸토 식의 신학적 데리다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입장이 마르틴 헤글룬드의 Radical Atheism이라는 저서죠.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 논문에서는 이런 종교적-신학적 주제가 직접 다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저는 논문에서 '부정신학'이라는 용어를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도 형이상학에 머무르고자 하는 입장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로 제한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데리다를 둘러싼 종교적-신학적 논의보다는, 데리다가 정말 '현전의 형이상학 비판'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잘 달성하고 있는지를 철학적으로 평가하는 데 논문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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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신 설명 감사합니다! 평소 데리다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그의 철학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논문이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데리다의 '코라(khora)'개념이 아마도 비현전의 형이상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군요. 여기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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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논문 잘 읽었습니다. 논문 게재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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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논문 40페이지에서 형식문장을 표현할 때, 일정한 간격으로 띄워쓰기는 어떻게 하신건지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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탭(Tab) 키를 사용하였습니다! 탭을 누른 다음 줄을 바꾸고 다시 탭을 누르면, 첫 줄의 글자에 맞춰서 두 번째 줄 글자가 정렬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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