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이 읽어서 끊어진 책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제본이 끊어져버린 적이 있으신가요? 저의 경우에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하버마스의 『진리와 정당화』가 그런 책들입니다. 특히, 국역본 『존재와 시간』은 제본이 꽤 튼튼하게 되어 있데도, 어느 순간 표지 이음매가 너덜너덜해져서 테이프로 붙여 놓았습니다.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도 정말 많이 읽었는데, 이 책은 안타깝게도(?) 표지가 다 해지기는 했지만 책이 끊어지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비닐 커버로 표지를 감싸 두었습니다.

물론, 책이 끊어질 정도로 읽었다고 해서, 반드시 제가 그 책들을 세밀하게 다 파악했다고 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또, 애초에 책의 제본 상태가 나빴을 수도 있는 것이고, 제가 책을 험하게 다룬 것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적어도 저 책들 만큼은 정말 애착을 가지고 많이 읽은 것들이라, 괜히 남들에게 "끊어질 정도로 많이 읽었다."라고 자랑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최근에 또 한 권의 책이 끊어졌는데, 그 책이 바로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입니다. 지금 제 지도 교수님이신 이승종 교수님이, 뉴욕주립대학교 철학과 교수였던 뉴턴 가버와 함께 공동 집필하신 책입니다. 데리다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은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은 꽤나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연구서입니다. 데리다-비트겐슈타인 비교 연구 분야에서, 헨리 스태튼이 쓴 Wittgenstein and Derrida라는 책과 함께, 영어권에서는 최근까지도 많이 읽히고 있는 이 분야의 고전적 연구거든요. (두 인물을 비교하는 연구가 은근히 많은데, 그 연구들은 항상 스태튼의 책과 저희 지도 교수님의 책을 참고합니다.) 저도 지난 학기 초부터 데리다에 대한 논문을 하나 쓰기 시작하였는데, 논문에서 이 책을 중요한 참고 자료로 사용하였거든요. 그러면서 이 책을 다시 꼼꼼하게 읽다 보니, 몇 주 전에 책 앞부분이 끊어졌더라고요.

얼마 전에 지도교수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교수님께서 요즘 무슨 책을 읽냐고 물어보셔서,

"방학 때 교수님이 쓰신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을 열심히 읽었는데,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책이 끊어졌네요."

라고 민망함과 팬심을 담아서 말씀드렸습니다. 저자 앞에서 저자 책을 열심히 읽었다고 말하기가 꽤 망설여지더라고요.

한 학기동안 쓴 데리다 논문 초고를 오늘 아침에 교수님께 보내드렸는데, 방금 전에 교수님께서 굉장히 좋은 글이라고 과분할 정도로 칭찬하는 메일을 보내주셨네요. 어느 학술지에 투고해도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 하시면서요. 메일 내용에 글을 굉장히 꼼꼼하게 읽어보신 흔적들이 묻어 있어서, 교수님의 칭찬이 더 가치 있게 느껴지네요.

사실, 글을 쓰면서도 제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어서 정말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애초에 데리다 자체도 난해한 인물인데, 이번에 쓴 제 논문 초고는 데리다를 둘러싼 논쟁사를 다루고 있어서 논의가 훨씬 더 복잡한 데다, 데리다를 설명하면서도 글쓰기 스타일은 분석철학 교과서에서 나올 법한 형식을 강하게 취하고 있어서요. 그래서 이런 글쓰기를 과연 일반적인 데리다 연구자들이 선입견 없이 받아들여줄지, 설령 받아들이려고 하더라도 여기에 쓰인 논증들을 이해할 수는 있을지 정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저조차도 제 글에 확신이 없었는데, 지도 교수님이 확신을 주시니 굉장히 힘이 되네요. 특히, 저는 이 분야에서 저희 지도 교수님이 최고의 권위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해서, 다른 어느 누구의 평가보다도 이 평가를 신뢰할 수 있어서 든든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메일 내용 전체를 여기에 다 올려서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데, 아직 논문을 게재하기도 전에 이런 공개된 장소에 메일을 올리는 게 좀 부담스러워서 마지막 한 구절만 자랑삼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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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위편삼절이네요. 연구에 대한 대단한 열정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건강하시고, 학문에서 큰 성취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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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ㅎ 기분 좋은 자랑글이네요.

아, 이 불확실성 끝에 지도 교수님 인정만큼 기쁜 게 없지유.

저에게도 쓰면서 마치 울 교수님이 내가 살피지 못한 결정적 오류를 짚어내거나 내가 읽은 게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밝혀질까봐 불안해했던 나날들이 있었는데요. 너무 좋다고 내가 인용하고 싶어서 그러니 출판할 생각 없냐고 그러신 날에는 뛸 듯이 기쁜 마음을 누르며 교수실에서 나왔었던 기억이 나네요.

힘들고 외로운 길에 그런 기억들이 지속하게 해주는 힘이 되는 것 같아요. 홧팅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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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존재와 시간 얼마나 읽으신겁니까.. 요즘 수업때문에 비극의 탄생을 다시 보고 정리하고 있는데 진절머리나서 못읽겠습니다.. 제 비극의 탄생도 곧 사망할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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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정신현상학 책은 원본하고 영역본 둘 다 뜯어졌네요 (독어본이 어딨는지 모르겠어서 영역본만 올립니다!)... ㅋㅋ 대논리학은 너무 많이 뜯어져서 페이지들을 테이프로 다 붙이느라 책 옆에 테이프들이 다 삐져나와있고요 ㅎㅎ 이제 철학책은 웬만하면 제껀 놔두고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보려고 합니다 ㅋㅋ

여담으로 제가 아는 한 교수님은 책이 다 뜯어져서 그냥 고무줄로 묶고 지퍼백에 넣고 다니십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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