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글: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Ⅰ. 들어가는 말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부터 커다란 영향을 받아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였다는 사실은 많은 연구자들에게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무엇을’ 발견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어떻게’ 발전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본고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하이데거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세 명의 주요한 연구자들의 견해를 요약하고자 한다. 본고는 우선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철저하게 계승하였다고 보는 볼피(F. Volpi)의 해석을 살펴볼 것이다(Ⅱ). 다음으로,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반대하여 일종의 플라톤주의를 지지하였다고 보는 타미니오(J. Taminiaux)의 해석을 설명할 것이다(Ⅲ). 곧이어, 전기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계승하고자 하였고 후기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벗어나고자 하였다고 보는 타나사스(P. Thanassas)의 해석을 제시할 것이다(Ⅳ). 마지막으로, 세 연구자들의 해석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수행할 것이다(Ⅴ).
Ⅱ.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계승자이다: 볼피의 해석
볼피는 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대응 관계를 강조한다. 그는 “하이데거가 얼마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애썼는지”(Volpi, 1992: 120) 혹은 “얼마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자기 쪽으로 데려오기 위해 애썼는지”(Volpi, 1992: 120)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체계적 해석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볼피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존재의 다의성(plurivocity of being)’을 어떻게 포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탐구하게 되었다. 특별히, 하이데거는 1920년대에 이르러 존재가 담고 있는 여러 가지 의미 중에서도 ‘진리’라는 의미에 집중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 대한 독해에 착수하게 되었다.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가 네 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 따라 말해질 수 있다고 처음 주장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아주 이른 시기부터 하이데거의 관심을 끌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진리의 ‘논리적’ 의미보다도 진리의 ‘존재론적’ 의미가 더욱 근본적이라는 생각까지 막연하게나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하이데거의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1920년대의 하이데거는 ‘진리’를 중심으로 존재의 여러 가지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들을 주의 깊게 참고하기 시작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 속에서 자신이 찾고 있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선형이상학적 규정”(Volpi, 1992: 95)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독해는 ‘해체(destruction)’라는 방법을 따라 이루어졌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를 엄격하게 해설하는 작업을 수행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 속에서 아직 불분명하고 부정확하게 남아 있는 존재론적 사유를 발굴해내어 자신의 방식대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즉, 하이데거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적’ 진리를 넘어서는 ‘존재론적’ 진리를 어렴풋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진리 현상의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깊이”(Volpi, 1992: 97)에 대해 통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전통적 주석 작업만으로는 포착될 수 없었다. 존재론적 사유를 발굴해내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를 특정한 해석 전통이 지닌 고정된 선입견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Volpi, 1992: 97) 텍스트 자체에서는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용들을 과감하게 끄집어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해체’ 혹은 ‘존재론적 독해’란 바로 전통적 주석 작업에서 벗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에 감추어진 존재론적 사유로 다가가고자 하는 시도이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 중에서도 『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에서 제시된 ‘이론(theoria)’, ‘제작(poiesis)’ ‘실천(praxis)’이라는 구분이 ‘논리적’ 의미의 진리를 넘어서는 ‘존재론적’ 의미의 진리에 대한 사유를 품고 있다고 해석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론’을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영역들 중 단지 한 가지 영역으로 한정한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은 인간이 대상에 대해 이론적 태도 이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태도를 취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러한 논의에서 ‘이론’ 혹은 ‘논리’보다 앞서는 ‘실천’ 혹은 ‘삶’의 층위에 대한 통찰을 발굴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존재에 응답하는 인간의 탈은폐적1 태도가 지닌 서로 다른 가능성들과 양태들 중에서 이론이란 단지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하이데거는 확신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이론 옆에, 그리고 이론과 함께, 제작과 실천이라는 탈은폐적 태도가 있다. 그 태도들을 통해서도 인간은 존재와 관계를 맺으며 존재를 이해한다.”(Volpi, 1992: 103) 따라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이라는 개념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실천의 존재론화(ontologization of praxis)”(Volpi, 1992: 113)라고 일컬어지는 작업을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적 이해로부터 현존재에 대한 하이데거 자신의 실존론적 분석을 도출한다. 가령, 볼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등장하는 핵심 개념들을 다음과 같이 연결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
(1) ‘이론/제작’과 ‘눈앞의 존재/손안의 존재’: 아리스토텔레스와 하이데거는 우리가 대상에 두 가지 서로 다른 태도로 접근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즉, 한편으로, 우리는 대상을 어떠한 목적과도 무관하게 우리 앞에 단순히 놓여 있는 것으로서 다룰 수 있다. 가령, 금속에 대해 연구하는 과학자에게는 망치의 머리에 붙어 있는 쇳덩이가 단순히 Fe라는 원소로 다루어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대상을 특정한 목적을 위해 우리 손에 쥐어져 있는 것으로서 다룰 수도 있다. 가령, 탁자를 만드는 목수에게는 망치의 머리에 붙어 있는 쇳덩이가 자신의 작업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로 다루어진다. 대상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이러한 두 가지 태도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각각 ‘이론(theoria)’과 ‘제작(poiesis)’이라고 명명하였다. 또한 하이데거는 우리의 서로 다른 태도에 따라 대상이 드러내는 성격을 각각 ‘눈앞의 존재(Vorhandenheit)’와 ‘손안의 존재(Zuhandenheit)’라고 명명하였다.
(2) ‘실천’과 ‘현존재’: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실천’이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실천의 목적은 그 자신 속에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실천 외부의 어떤 것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서의 실천의 성공 속에 포함되어 있다.”(Volpi, 1992: 104) 즉, 우리의 행위들은 목적들의 계열을 따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가령, 목수는 ‘탁자를 만들기 위해’ 망치를 쥔다. 그는 다시 ‘음식을 먹기 위해’ 탁자에 앉는다. 그는 또 다시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삼킨다. 이러한 목적들의 계열은 최종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가리켜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는 ‘우리 자신’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우리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현존재(Dasein)’라는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실천(praxis)’이라는 용어와 연결되는 것이다. 볼피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실천의 탈은폐적2 태도야말로 하이데거가 자신의 분석의 기초로 삼으려는 태도라는 것이 나의 근본적인 가정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실존의 존재론적 구조, 곧 현존재의 존재론적 구조를 가리켜 보이는 근본적이고도 주제적인 규정들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Volpi, 1992: 104)
(3) ‘실천적 지혜’와 ‘양심’: 우리의 ‘삶’ 혹은 우리의 ‘실천’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숙고하는 능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실천적 지혜’라고 일컬어진다. “실천적 지혜는 좋은 실천(eupraxia)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리고 인간의 삶이 좋은 삶(eu zen)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지평을 조성하는 지식이다.”(Volpi, 1992: 119)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분석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에 대응하는 현존재의 구조는 ‘양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로서 우리 자신이 양심의 목소리를 들을 때에야 비로소 비본래적 실존을 벗어나 본래적 실존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실천적 지혜(phronesis)’와 ‘양심(Gewissen)’이라는 용어 사이의 관계를 하이데거가 명시적으로 인정한 적도 있다. “가다머의 회상에 따르면, ‘실천적 지혜’라는 용어를 번역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여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외칠 수 있었다. “실천적 지혜는 바로 양심이다!””(Volpi, 1992: 118)
(4) ‘합리적 선택’과 ‘결단성’: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 지혜에 따라 ‘합리적 선택’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론에서도 이러한 ‘합리적 선택’에 대응하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양심의 목소리를 통해 결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합리적 선택(prohairesis)’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결단성(Entschlossenheit)’에 해당한다. 현존재가 양심을 바탕으로 결단을 내리는 과정이란 윤리적 인간이 실천적 지혜를 바탕으로 합리적 선택을 내리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결단성이라는 규정은 합리적 선택을 존재론화한 것이다.”(Volpi, 1992: 120) 물론, 두 가지 개념이 아무런 차이도 없이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위 이론에서 합리적 선택은 특수한 순간에 이루어지지만, 결단성은 현존재의 존재가 지닌 특징이다.”(Volpi, 1992: 120) 합리적 선택이란 매 순간마다 일어나는 사건이고, 결단성이란 현존재의 실존에 내재된 고유한 구조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해석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철저하게 존재론으로 변형시킨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단순히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된 내용들이 하이데거에게서는 ‘존재’와 ‘진리’를 해명하기 위한 분석으로 바뀐다. 즉,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존재하는 것들을 ‘논리적’ 혹은 ‘이론적’ 태도로만 파악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현존재의 삶은 이론보다 더 깊다. 우리가 대상과 이론적 관계를 맺을 것인지 제작적 관계를 맺을 것인지는 우리가 어떠한 ‘실천’을 수행하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이론’, ‘제작’, ‘실천’이라는 구분을 통해 진리가 ‘논리적’ 층위만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존재론적’ 층위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었다.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론적 구조를 규정하려는 관점에서 볼 때, 하이데거의 관심을 끈 것은 개별적인 실천, 제작, 이론이 아니라 그 개념들의 존재론적 힘이다.”(Volpi, 1992: 104)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분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제시된 ‘실천’ 개념을 철저하게 계승하여 현존재의 삶이야말로 존재와 진리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나는 ‘존재론적’ 층위라는 사실을 발굴해낸 것이다.
Ⅲ.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배반자이다: 타미니오의 해석
타미니오 역시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일종의 재전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재전유(reappropriation)’라는 용어로 염두에 두고 있는 내용은 다소 복합적이다. 물론, 타미니오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Ⅸ권 10장과 『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에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개념들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한 내용들과는 대립되는 사유로 나아간다. 특별히, 하이데거는 ‘실천’ 개념에 주목하면서도 정작 ‘실천’ 개념 속에 담겨 있는 ‘공공성’과 ‘다수성’ 같은 함의들에는 전혀 관심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유아론적 ‘실존’을 강조하는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은 유아론적 ‘철인’을 강조하는 플라톤의 정치철학과 더욱 유사하다. “하이데거는 실천과 제작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서 무엇이 재전유되어야 하는지를 선택하면서 플라톤적 편견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Taminiaux, 1991: 129) 따라서 타미니오의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하이데거의 독해가 ‘플라톤적 편견(Platonic bias)’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그의 논의는 하이데거가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사용하여 플라톤주의에 이르는지를 다음과 같이 그려낸다.
플라톤
(1) ‘제작’과 ‘실천’: 타미니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제작’과 ‘실천’ 개념이 서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에 따르면, ‘제작’은 사물을 생산하는 작업에서만 이루어지는 제한적인 행위이고, ‘실천’은 우리의 삶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포괄적인 행위이다. 두 가지 행위 중에서 ‘실천’은 ‘제작’보다 더욱 근본적인 층위에 놓여 있다. 우리의 삶은 ‘제작’만으로 규정되지 않는 다양한 행위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 양태는 생산에 있지 않고 행위에 있다.”(Taminiaux, 1991: 111)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제작’에 대한 ‘실천’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실천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제작을 지배한다. […]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이 제작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제작이 실천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한다.”(Taminiaux, 1991: 124) ‘제작’은 ‘실천’의 한 종류이더라도, ‘실천’이 ‘제작’의 한 종류인 것은 아니다.
(2) ‘비본래성’과 ‘본래성’: 하이데거는 ‘제작’과 ‘실천’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으로부터 ‘비본래성(Uneigentlichkeit)’과 ‘본래성(Eigentlichkeit)’이라는 자신의 구분을 이끌어낸다. 일상의 행위에 매몰된 상태로 살아가는 실존은 ‘비본래적’이고, 일상의 행위로부터 벗어난 상태로 살아가는 실존은 ‘본래적’이다. 즉,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눈앞에 놓인 사물과 관계 맺는 ‘제작’ 활동에만 전념한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수많은 ‘실천’은 실제로는 제작에 국한되지 않는다. 기초 존재론은 제작에만 집중하는 인간이 자기 삶의 본래적 층위를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기초존재론은 비본래성과 본래성 사이의 기본적인 구별을 통해 규정된다. 비본래성은 일상적 편견과 관심3을 특징짓는 용어이고, 본래성은 염려를 특징짓는 용어이다. […] 이러한 구별은 제작과 실천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별을 재전유한 것이다.”(Taminiaux, 1991: 124)
(3) 실천적 지혜의 재전유로서 ‘결단성’: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인간은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실천적 지혜’를 지녀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에서 인간은 본래적 실존을 살아가기 위해 ‘결단’해야 한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결단성’ 개념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개념에 대한 재전유라고 할 수 있다. 실천적 지혜가 우리를 제작으로만 이루어진 삶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처럼, 결단은 우리를 비본래적인 실존에서 벗어나게 한다. “실천적 지혜가 지닌 열어밝히는 힘은 제작적 기예가 지닌 열어밝히는 힘보다도 더욱 우월하다. […] 이러한 모든 특징들은 결단성이라는 하이데거의 개념의 형성에 사용된다.”(Taminiaux, 1991: 125)
(4) ‘환경’과 ‘세계’: 제작에만 매몰되어 비본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환경(Unwelt)이 주어진다. 환경 속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단순히 눈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사물일 뿐이다. 환경은 고정된 사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어떠한 급진적 변화도 겪지 않는다. 매일 같이 천편일률적으로 반복되는 일상만이 환경 속에서는 계속된다. 그러나 제작에서 벗어나 본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비로소 ’세계(Welt)’가 주어진다. 이제 우리가 실천에서 지향하는 목적이 무엇인지에 따라 존재자는 각각의 고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우리가 실천에서 수행하는 행위가 무엇인지에 따라 세계는 끊임없는 변혁을 겪을 수 있다. “기초 존재론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의 퇴락한 양태인) 환경에는 머무르지만, 세계에는 머무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세계와 관련해서는, 현존재에게 머무름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주하지 않음(Un-heimlichkeit)’4이 바로 사유가 관계를 맺는 요소이다.”(Taminiaux, 1991: 128)
(5)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일상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변의 의견에 흔들림 없이 우리 스스로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선택해야 한다. 결단은 세인들로부터 벗어나 우리가 온전히 혼자서 내리는 판단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작’과 ‘실천’, ‘본래성’과 ‘비본래성’, ‘환경’과 ‘세계’ 사이의 구분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함의한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만들어나가는 사람이란 공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 사적인 것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사람이다.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은 이러한 방식으로 ‘사적인’ 결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실존론적 유아론(existential solipsism)’이다. “결단성은 하이데거가 ‘실존론적 유아론’이라고 부르는 것과 연결된다. 의견,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잡다한 논쟁은 급진화된 실천적 지혜로부터 배제되고, 단순한 관심5의 영역으로 강등된다. 현존재의 비본래적 행위로 강등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본래성과 본래성 사이의 바로 이러한 구분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구분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Taminiaux, 1991: 130)
(6) 여럿과 하나: ‘제작’만을 반복하는 일상을 초월하여 ‘실천’에 대한 자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실천’이라는 개념을 통해 언제나 공공성과 다수성을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는 완전히 상충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인간이 공적 영역에서 다양한 의견을 조율해 나가는 조화로운 실천을 지향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즉, 하이데거는 ‘실천’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얼핏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는 한 공공성과 다수성이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에서는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가 ‘여럿’보다도 훨씬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기초 존재론에서 초월이라는 개념은 비본래성에 대한 독자성의 저항을 통해, 혹은 플라톤적 용어로 말하자면, 여럿에 대한 하나의 저항을 통해 전적으로 주도된다. 공유된 행동과 공유된 말로 이루어진 공공의 영역이 실천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보지 못한 이유는 기초 존재론에서의 초월 개념 때문이다.”(Taminiaux, 1991: 131)
(7)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여럿’보다 ‘하나’를 강조하는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보다 플라톤의 철학을 더욱 닮아 있다. 플라톤은 세인들의 잡다한 의견보다 철인의 유일무이한 지혜가 국가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즉,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 개념을 사용하여 플라톤의 유아론을 도출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은 ‘플라톤적 편견’ 속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플라톤과 하이데거는 유아론적 ‘철인’과 유아론적 ‘실존’을 통해 세인들을 초월하려 한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반대 진영에 위치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유아론에 저항하여 공공성과 다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실천’ 개념을 제시하였지만,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 개념을 통해 플라톤의 유아론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실천에 대한 하이데거의 재전유는 존재에 대한 고독한 이해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플라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항을 무력하게 만든다.”(Taminiaux, 1991: 132)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유아론은 하이데거의 정치적 성향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 많은 연구자들은 실제로 하이데거의 나치즘이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으로부터 파생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적어도, 타미니오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나치즘은 단순한 인간적 오해나 실수의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하이데거의 나치즘은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에 내재된 ‘실존론적 유아론’과 ‘플라톤적 편견’에 근거한 철학적 사유의 결과이다. 즉,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 개념을 플라톤적 편견을 바탕으로 독해하는 과정에서 ‘비본래성’과 ‘본래성’, ‘환경’과 ‘세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여럿’과 ‘하나’를 서로 엄격하게 대립시켰다. 그는 다수성과 공공성을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를 벗어나 유아론을 내세운 플라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에서는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들의 의견을 무시해버리는 독재자야말로 ‘하나’라는 이념을 가장 잘 실현하고 있는 이상적 인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타미니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헤겔처럼 하이데거도 국가(politeia)에 대한 플라톤의 이미지가 도시 국가(polis)의 본질을 적절하게 반영한다는 생각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히틀러의 독일을 끔찍하게 가득 채운 ‘투쟁(Kampf)’이라는 단어를 그가 들었을 때, 그는 그 단어를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이 언급한 ”존재를 둘러싼 거인들의 투쟁“으로 망설임 없이 번역하였다. 「총장 연설」이 철인 왕이라는 플라톤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는 실제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한 관계가 도시 국가에 특징적인 다원주의적 정신이나 (플라톤과는 상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 개념에 반대된다는 사실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Taminiaux, 1991: 134)
Ⅳ. 전기 하이데거는 계승자이고, 후기 하이데거는 배반자이다: 타나사스의 해석
타나사스는 기존 연구자들의 논의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하이데거의 철학 사이의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고 비판한다. 그는 하이데거의 사유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전적으로 수용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거부하기만 한 것도 아니라고 지적한다. 즉, 타나사스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철학은 일종의 ‘양면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ambivalent Aristotelianism)’이다. 기존 연구자들은 하이데거가 마치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확실한 입장을 유지한 상태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를 독해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이러한 가정 위에서 이루어진 철학사적 설명들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특정한 측면만을 강조하기 위해 나머지 측면들을 무시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철학이 균일하고, 동질적인 자료를 이루고 있으며, 그의 사유가 선형적이면서도 균일하게 진화한다는 확신”(Thanassas, 2012: 33)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입장의 변화를 겪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독해하는 하이데거의 관점 역시 시대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철학 속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수용과 거부가 모두 나타나고 있다. 두 인물 사이의 관계를 적절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어느 시점에서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취했고, 어느 시점에서 부정적 태도를 취했는지를 살펴보는 작업이 중요하다.
마르틴 하이데거
이러한 작업을 위해서는 우선 하이데거의 철학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발전하였는지를 추적해야 한다. “우리는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에 있는 주요한 표지물들을 재구성해야 하며, 특별히 그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의 자취를 재구성해야 한다. 그 해석의 방향성이 지닌 (종종 이질적인) 다양성을 제거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다.”(Thanassas, 2012: 34) 특별히, 타나사스에 따르면, ‘하이데거의 사유의 길’은 『존재와 시간』을 구상하기 이전의 사유, 『존재와 시간』을 구상하던 시기의 사유, 『존재와 시간』을 포기한 이후의 사유라는 세 단계를 거쳐 변화하였다. 또한, 하이데거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은 첫 번째 시기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1922)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제시되었고, 두 번째 시기에는 『플라톤의 『소피스트』』(1924-1925)라는 텍스트를 통해 제시되었다. 물론, 두 텍스트 이외에도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다른 여러 가지 맥락에서 역시 논의하였다. 그러나 두 텍스트만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는 찾기 힘들다. 따라서 타나사스의 논의는 두 텍스트 사이에 드러나는 차이에 초점을 맞추어 세 시기마다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독해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타나사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참됨과 현존재」(1923/24)는 출판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기본 개념』(1924)에서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6권에 대한 언급이 다소 부차적이며 프로네시스의 이슈에 대한 구체적인 영향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1922)과 『플라톤의 『소피스트』』에 우리의 초점을 맞출 것이다. 비록 마지막 섹션(Ⅲ)에서 우리는 『존재와 시간』을 간략히 언급하고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하이데거의 관계에 대해 전반적인 평가를 시도할 것이지만 말이다.”(Thanassas, 2012: 35)
(1) 『존재와 시간』을 구상하기 이전의 사유: 하이데거는 삶의 ‘역사성(historicity)’과 실존의 ‘현사실성(facticity)’이 특정한 이론이나 논리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관점으로부터 자신의 사유를 시작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관점을 증명하는 근거를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철학적 지혜(sophia)’와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서로 대비시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의 내용은 이론적 앎과는 다른 종류의 ‘진리’가 존재할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스로 자신의 구분에 내포된 철학적 함의를 분명하게 자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철학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 사이의 구분이 진리에 대한 논의로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은 창조적 독해를 통해 오늘날 새롭게 강조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해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개념에 대한 ‘해체(destruction)’를 수행한다. ‘실천적 지혜’ 개념에 감추어진 사유를 발굴해내어 진리의 문제에 적용시키려는 시도가 『존재와 시간』을 구상하기 이전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에서 수행된 작업이었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 대한 ‘해체’를 시도한다. 그는 자신의 탐구의 출발점이자 모티브라고 선언하였던 주제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속에서 찾아내고자 한다.”(Thanassas, 2012: 41)
(2) 『존재와 시간』을 구상하던 시기의 사유: 1925년 이후로 『존재와 시간』에 이르기까지 하이데거는 점차 자기 자신만의 철학적 체계를 독자적으로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기초 존재론’이라고 일컬어지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삶의 역사성과 실존의 현사실성이 어떻게 체계화되어 있는지를 드러내고자 한다. 즉, 기초 존재론은 현존재가 살아가는 방식 속에 “거의 영원하게(quasi-eternally)”(Thanassas, 2012: 46) 존재하는 고정된 형식이나 구조가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형식이나 구조를 포착해내어 개념으로 담아내고자 하는 작업이 하이데거가 지향한 철학적 목표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전통적 철학자들이 과거에 무엇을 주장하였는지는 이제 하이데거에게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플라톤의 『소피스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하이데거 자신의 기초 존재론을 주장하기 위한 들러리 정도로 인용되고 있다. 겉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하이데거 자신의 기초 존재론만이 강조되는 것이다. 타나사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심오한 변화가 일어났다. 1924년 강의에서, 하이데거는 그리스 철학의 구체적인 개념들에 대해서는 탐구하지 않는다. 그 개념들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근본 경험들에 뿌리박혀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이제 개념들 일반과 시대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거의 영원하게 존재하는 일상성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다. 이 사실은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이 강의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단지 구실로서 기능한다는 의혹을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석은 일상성으로부터 발견되는 개념들에 대한 체계적 기획을 만들어내려는 작업을 단순히 위장하고 있는 것 같다. (Thanassas, 2012: 46)
(3) 『존재와 시간』을 포기한 이후의 사유: 『존재와 시간』에서 완성된 기초 존재론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하이데거는 ‘기초 존재론’이라는 자신의 기획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몇 년 후에, 하이데거는 ‘기초’와 심지어 ‘기초 존재론’에 대한 모든 언급을 형이상학적 일탈로 기술할 것이며, 이러한 개념들을 부인할 것이다.”(Thanassas, 2012: 55) 기초 존재론은 ‘이론’에 국한되지 않는 ‘실천’을 강조하고자 하면서도, ‘실천’을 정작 다시 ‘이론’ 속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기초 존재론’이라는 이름 아래에 역사성과 현사실성에 대한 개념들의 체계를 구성하고자 하는 작업은 자기 모순적이기만 할 뿐이다. 삶의 역사성과 실존의 현사실성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이론화될 수 없고, 이론화되어서도 안 된다. “현존재는 ‘기초’가 될 수 없다. ‘단단한’ 기초는 더더욱 될 수 없다. 현존재의 주된 특징이 인간 실존에 적용된 모든 전통적 규정들을, 특별히 실체의 측면에서 이루어진 그러한 기술들을 깨부수는 것이라면 말이다.”(Thanassas, 2012: 55)
따라서 타나사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이 복합적인 성격과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하이데거 사이의 관계를 평가한다. 즉, 한편으로, 타나사스는 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직접적으로 ‘대응’이나 ‘유사성’을 발견해내고자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자체보다는 자신의 기초 존재론을 주장하는 작업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와 시간』을 감안할 때, 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평행성이 지닌 해석적 가치가 무시할 만하고 생각한다. 또한 그러한 평행성은 종종 좋지 않은 징조를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두 철학자 사이에는 좁혀지지 않는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간극이 있다.”(Thanassas, 2012: 55)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타나사스는 하이데거의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통해 연마되었다고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실천적 지혜’와 ‘철학적 지식’ 사이의 구분은 하이데거가 역사성과 현사실성의 문제를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고민하도록 자극한 단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메스키르히에서 온 철학자는 스타게이라에서 온 그의 전임자와 함께 길을 가지는 못하였지만, 그의 ‘해체적’ 기획이 일으킨 마찰은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의 개념들을 발전시키고 날카롭게 다듬을 수 있도록 하였다.”(Thanassas, 2012: 55)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철저하게 계승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이데거는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자신만의 사유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Ⅴ. 무엇을 수용하고 무엇을 거부하는가?: 비판적 평가
볼피, 타미니오, 타나사스는 서로 다른 개념적 틀을 바탕으로 하이데거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설명하고 있다. 볼피는 ‘이론’, ‘제작’, ‘실천’이라는 삼분법을 중심으로 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공통점을 강조하고자 하고, 타미니오는 ‘제작’과 ‘실천’이라는 이분법을 중심으로 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차이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타나사스는 하이데거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이 『존재와 시간』의 기초 존재론 이전과 이후를 기준으로 변화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설명들 사이에 서로 공명하는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하이데거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바라보는 세 인물들의 입장에는 양립하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다. 우리는 세 인물들이 제시한 입장이 각각 어떠한 점에서 강점과 약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비교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하이데거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고자 한다.
(1) ‘제작’과 ‘실천’이라는 타미니오의 이분법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두 개념이 정말로 서로 대립하는 것인지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오히려 “이론적일 뿐 실천적이거나 제작적이지 않은 사유”(Aristotle, 2011: 1139a21)라는 구절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제작’과 ‘실천’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모두 ‘이론’과 대비되고 있다. 특별히, ‘제작’과 ‘실천’을 통해 ‘비본래성’과 ‘본래성’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손안의 존재’가 지니는 지위를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타미니오의 해석에서는 ‘손안의 존재’가 ‘제작’과 관련되는지, ‘실천’과 관련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타미니오는 ‘제작’을 ‘눈앞의 존재’와 연결시키고 있으면서도, ‘실천’을 ‘손안의 존재’가 아니라 ‘본래성’과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즉, ‘제작’이 ‘눈앞의 존재’와 관계 맺는 행위일 경우 ‘실천’은 ‘손안의 존재’와 관계 맺는 행위여야 한다. 그러나 ‘손안의 존재’와 관계 맺는 행위가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그 자체만으로 ‘본래적’ 실존의 행위라고 평가받는 것은 아니다. 현존재는 필요에 따라 ‘눈앞의 존재’와 관계 맺기도 하고 ‘손안의 존재’와 관계 맺기도 한다. 현존재가 ‘본래적’ 실존으로 살아가는지 ‘비본래적’ 실존으로 살아가는지는 현존재가 자신의 삶을 결단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려있는 문제일 뿐이다.
(2) ‘이론’, ‘제작’, ‘실천’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분법이 ‘눈앞의 존재’, ‘손안의 존재’, ‘현존재’라는 하이데거의 개념에 대응한다는 볼피의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다만, 볼피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하이데거 사이의 대응 관계를 과장한다. 하이데거의 철학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다른 많은 요소들이 들어 있다. 가령, (a)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도 ‘실천’이 지닌 중요성에 훨씬 무게를 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실천’이란 ‘이론’과 ‘제작’ 옆에 병렬적으로 나열되는 한 가지 행위이지만, 하이데거에게 ‘실천’이란 ‘이론’과 ‘제작’ 아래에 근원적으로 놓여 있는 현존재의 삶 자체이다. (b) 하이데거는 이론적 지식보다도 실천적 지식에 훨씬 더 큰 의의를 두고자 한다. 그는 ‘실천적 지혜’보다 ‘철학적 지혜’를 더욱 우월한 것으로 평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결코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c) ‘시간성’에 대한 강조도 하이데거의 철학만의 특징적인 요소 중 하나이다. 다르게 있을 수 없는 것, 영원한 것, 변하지 않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지는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달리, 하이데거는 시간의 지평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실존을 강조하고자 한다.
(3)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하이데거의 해석이 양면적 성격을 지닌다는 타나사스의 주장은 올바르다. 그러나 타나사스는 이러한 ‘양면적 성격’이 하이데거의 사유가 지닌 각각의 단계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는 점에서는 틀렸다. 특별히, 1925년 이전의 하이데거는 ‘해체’의 작업을 수행하였고, 1925년 이후의 하이데거는 ‘기초 존재론’의 작업을 수행하였다는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서론에서도 자신이 존재론의 역사에 대한 해체의 기획을 수행하고자 한다고 강조한다. “존재론적인 전승의 해체를 관철해야만 비로소 존재물음이 그 참된 구체성을 획득한다.”(Heidegger, 1998: 46) 오히려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해체’와 ‘기초 존재론’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존재론의 역사에 대한 해체를 통해 근원성이 증명되는 철학이 기초 존재론이고, 기초 존재론을 통해 이루어지는 철학사에 대한 비판의 작업이 해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볼피, 타미니오, 타나사스의 입장을 조금씩 교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세 입장은 모두 강점과 약점을 각각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하이데거의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을 연구하기 위한 개념적 틀과 관련해서는 ‘제작’과 ‘실천’이라는 타미니오의 이분법보다 ‘이론’, ‘제작’, ‘실천’이라는 볼피의 삼분법이 더욱 적절하다. 또한 하이데거와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는 두 인물 사이의 공통점에 초점을 맞추는 볼피의 관점보다 두 인물 사이의 차이점에도 초점을 맞추는 타미니오와 타나사스의 관점이 더욱 적절하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구별되는 지점과 관련해서는 ‘해체’와 ‘기초 존재론’을 대립시키는 타나사스의 입장이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철학적 지혜’와 ‘실천적 지혜’라는 구분에 자극을 받아 처음부터 자신만의 사유의 길을 독자적으로 걸어갔다고 보는 것이 올바를지도 모른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분명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통찰로부터 출발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개념 구분을 어느 정도 받아들였지만, 실제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아니라 자신의 기초 존재론을 항상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Aristotle, (2011) 『니코마코스 윤리학』,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길.
Heidegger, M. (1998)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Taminiaux, J. (1991) "The Reappropriation of the Nicomachean Ethics: Poiesis and Praxis in Articulation of Fundamental Ontology," in Heidegger and the Project of Fundamental Ontology, trans by M. Gendre, New York, pp.. 111-139.
Thanassas, P. (2012) "Phronesis vs. Sophia: On Heidegger‘s Ambivalent Aristotelianism," in The Review of Metaphysics, Vol. 66(1), 2012, pp. 31-59.
Volpi, F. (1992) "Dasein as Praxis: The Heideggerian Assimilation and Radicalization of the Practical Philosophy of Aristotle, " in Martin Heidegger: Critical Assessments, Vol. 2, ed. C. Macann, London/New York: Routledge, pp. 90-129.
※ 이 글은 각각의 논문들을 최대한 명료하게 요약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논문들을 직접 인용하는 부분에서도 직역보다는 의역을 통해 내용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따라서 번역된 구절들이 논문들의 본래 영어 문장 구조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하이데거의 전문 용어들을 번역할 때에도 몇몇 부분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번역어를 사용하기보다는 맥락에 맞는 번역어를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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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탈은폐적’이라고 번역한 단어는 ‘uncovering’이다. 본래 ‘탈은폐’는 하이데거의 ‘Entbergung’에 대응하는 국내 번역어이다. 영어권에서는 하이데거의 ‘Entbergung’을 ‘revealing’으로 번역한다. 오히려 영어권에서 ‘uncovering’은 국내에서 ‘발견함’, ‘발견’, ‘발견하면서-있음’ 등으로 번역되는 하이데거의 ‘Entdeckung’에 대응한다. 그러나 위의 구절을 “인간의 발견하는 태도”라고 번역하게 되면 (a) ‘발견하는’이라는 표현의 목적어가 불분명해진다는 점에서 한국어로는 의미가 다소 어색해질 뿐더러, (b) ‘발견하는’이라는 표현이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전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도 않는다. 따라서 ‘uncovering’에 가장 대응할 만한 하이데거의 다른 전문 용어인 ‘탈은폐적’을 번역어로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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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역시 1)과 같은 이유로 ‘uncovering’을 ‘탈은폐적’으로 번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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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관심’이라고 번역한 용어는 ‘preocupation’과 ‘concern’이다. 타미니오는 두 단어를 ‘Besorgnis’에 대한 번역어로 사용하고 있다. 본래 ‘Besorgnis’는 ‘배려’라고 번역되는 것이 적절하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도구들과 관계 맺는 방식,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방식, 타인들과 관계 맺는 방식을 각각 ‘배려(Besorge)’, ‘염려(Sorge)’, ‘심려(Fürsorge)’라 표현하기 때문이다. 세 단어는 현존재가 대상과 지향적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자라는 사실을 기술하기 위해 도입된 전문 용어이다. 즉, 우리는 결코 세계를 가치중립적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특정한 관심과 특정한 선이해를 바탕으로 우리가 만나는 대상에 대해 매 순간 태도를 취한다. ‘배려’란 바로 우리가 사물에 대해 취하는 일상적 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철학적 맥락에 대한 충분한 설명 없이 “비본래성은 일상적 배려를 특징짓는 용어”라고 번역하는 것은 내용 전달에 그다지 적절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두 용어는 영어 단어의 문자적 의미를 따라 ‘편견’과 ‘관심’이라고 번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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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heimlichkeit’는 일반적으로 ‘섬뜩함’이라고 번역되는 하이데거의 전문 용어이다. 그러나 여기서 ‘섬뜩함’이란 감정적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우리의 세계를 떠받치는 형이상학적 토대나 인식론적 토대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섬뜩함’이라고 표현한다. 특별히, 그는 ‘Un-heimlichkeit’이라는 단어를 주거지(heim)가 없는(un) 상태(keit)라는 어원적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즉, 하이데거의 철학은 이데아든지, 신이든지, 영혼이든지 그 어떠한 것도 세계를 안정적으로 정초하는 지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Un-heimlichkeit’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는 ‘Un-heimlichkeit’을 자칫 감정적 상태로 오해될 수 있는 ‘섬뜩함’보다는 ‘안주하지-않음’으로 번역하는 편이 더욱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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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관심(concern)’도 3)의 ‘Besorgnis’에 대응하는 단어인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