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삶-긍정(life-affirmation)과 삶-강화(life-enhancement) 개념 구별

니체가 말하는 주인과 노예의 구분이 명징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경우 니체의 삶 긍정(affirmation)·강화(enhancement)·부정(denial)·보존(preservation) 개념을 칼같이 구분해버린다. 예컨대, 니체 철학에서 '삶-긍정'과 '삶-부정'이, '삶-강화'와 '삶-보존'이 대립하며, 그러고선 긍정과 강화가 연결되는 개념이고 부정과 보존이 연결되는 개념이라 이해한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니체를 이해하는 경우, 그의 철학 전체 그림을 모두 놓친 것이거나 놓치게 된다.

<주인/노예> 도식에서 출발하자면, 두 특성 모두가 문화 창조와 진보 및 정신적 개발의 전제조건이다 (BGE 188). 주인만이 혁신을 이뤄내지 않는다. 니체의 이상적 인간 또한 두 특성이 하나의 영혼에 상호침투된 결과이다 (BGE 260). 물론 니체는 모든 노예적인 것이 가치 창조의 능력을 지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분명 노예적인 것 또한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 예가 금욕적 사제이다 (GM3 15). 어쨌든 핵심은 <가치 창조자(creator)/가치에 따르기만 하는 무리(herd)> 도식과 <주인/노예> 도식은 일치하지 않고, 도식 간의 포갬(overlap)이 있다는 것이다.

문화 발전을 포함한 모든 혁신이 주인과 노예라는 대립하는 두 특성의 상호침투의 결과라는 니체의 주장은 내가 나와 다른 무엇과의 갈등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에게 있어 삶-긍정이란 이런 불가피한 역동성을 인정(say yes)하고 자신과 대립하는 것을 무화시키지 않는 태도를, 삶-부정이란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과 대립하는 것을 무화시키려는 태도를 뜻한다. 달리 말해 삶-긍정은 타자를, 힘에의 의지의 아곤적인 구조를, 자신과 대립하는 것이 영원히 반복됨(eternal recurrence)을 인정하는 관점을, 삶-부정은 그러한 아곤적 생성에 대한 허약함을, 타자의 필수성을 인정하는 능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삶-긍정적 관점은 (자신과 대립하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 삶을 창조해나간다는 의미에서 삶-강화 개념과 연결될 수 있지만,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삶의 필연적 조건(역동성)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삶-강화를 넘어서는 개념이자 **광의의 긍정(global affirmation; Great Yes)**이다. 삶-부정적 관점 또한 삶-강화와 연결될 수 있다. 삶-부정적 관심 또한 자신의 삶의 방식을, 자신만의 힘의 형태를 촉진하는데 관심이 있다. 삶-긍정의 방식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삶을 강화하는 대표적인 예시로 니체가 제시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AC 34-35, 39-40). 그들의 삶-부정적 관점은 협소한(local) 의미에서, 즉 그들의 삶 형태만을 강화하기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어떤 것을 긍정(의욕)하는 힘("yes-creating force")이라고 여전히 부를 수 있다. 이와 달리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 삶 강화의 완전한 부재가 바로 "자살적 허무주의"이다 (GM3 28).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다시 도식을 짜보자면 <삶-강화/자살적 허무주의>와 <삶-긍정/삶-부정>이라는 두 구별이 있을 수 있다.

『GM3 13』이 위 구별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해당 장에서 우리는 삶-부정적 관점을 취하면서도 협소한 의미에서 삶을 긍정하고, 또 자살적 허무주의를 취하지 않고 자신 삶을 강화하는 인간상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인간상은 첫 단락에서 논한 착종된 니체 철학 도식에 따르면 간파 불가능하다. 니체는 금욕적 이상의 삶-강화하는 힘을 인간의 "병적인 성격"과 연결한다. 다음의 구절은 삶-부정적 관점을 취하는 금욕적 이상이 협소한 의미에서 죽음이 아닌 삶을 긍정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 죽음과 싸우며 죽음에 대항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삶을 보존하기 위한 기교이다.

이어지는 구절은 금욕주의적 이상이 생산적 힘을 갖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삶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됐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상이 인간을 지배하고 권력을 쥘 수 있었다는 것, 특히 인간의 문명화와 사육이 관철된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랬다는 것은 역사가 가르쳐주는 바이다.

이어 니체는 금욕주의의 긍정하는 힘이 금욕적 사제를 매개로 하여 "병든 인간"에게 삶을 강화하는 수단을 제공했다고 밝힌다. 즉, 삶-부정적 관점을 취하는 금욕적 사제는 병든 인간에게 삶-강화의 수단을 제공하는 생산적 힘을 가진 자이고, 병든 인간은 그를 따름으로써 삶에 부정적이면서도 "삶을 보존하고 긍정"하게 된다.

금욕적 성직자는 다르게 존재하고 다른 곳에 있고 싶어하는 갈망이 체화된 자이고, 실로 이러한 갈망이 최고도에 달한 자이며, 그러한 열렬한 갈망의 진정한 정열과 격정 자체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갈망의 힘이야말로 그를 지상에 붙잡에 두는 사슬이다.

그런데 그러면 왜 사람은 병이 들어 삶-부정적 관점을 취하게 된 것인가? 이 병을 유발한 것은 무엇인가? 이 문제가 남아있다. 그러니 "고통 자체와 고통받는 자가 느끼는 불쾌감"과 싸우는 금욕적 사제와 달리 "고통의 원인이나 진정한 병"의 원인을 추적하고 싸우는 것이 바로 니체의 진짜 목표라고 할 수 있겠다.


(*)표시: 별첨.

참고 출처: LJ Hatab 2008, pp.14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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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이 흥미롭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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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과 정확히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니체의 긍정 개념과 관련해서 한 가지 질문 드려요. 예전에 학부 시절에 들었던 수업에서 이런 내용이 있었거든요.

니체는 영원회귀를 긍정하는 능력의 시금석으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긍정한다면, 부정적 덕목들은 어떻게 취급해야 하겠습니까? 그 덕목들도 회귀하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영원회귀에서는 모든 것이 매개되지 않고 반복되는 형태만 되어야 합니다. 부정성이 들어서면 이승은 고통이요 천국에 가서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일직선적인 역사관이 생깁니다. 헤겔식으로, 현금의 것을 부정하는 식으로, 역사의 진행이 이루어집니다. 모든 것의 긍정은 반복이라는 형태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 상태가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부정적 덕목들, 가령 동정심이나 원한이나 양심의 가책도 되돌아와야 하겠습니까?

바로 이 때문에 니체가 사용한 긍정의 ‘시금석’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영원회귀는 긍정하는 힘을 시험해보는 것이지, 모든 것을 무작정 돌아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초인의 긍정’과 ‘당나귀의 긍정’이라는 표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당나귀의 긍정은 부정적 긍정입니다. 나쁜 덕목은 영원회귀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무 구분 없이 긍정하는 것이 당나귀의 긍정입니다. 반면 초인의 긍정이라는 것은 선택으로서의 영원회귀입니다. 바로 힘을 외부로부터 부정적으로 매개하는 것들은 다시 회귀해서는 안 된다는 선별적인 긍정이 영원회귀의 근본에 있습니다.

일정한 기준을 전제하고서 무엇을 긍정해야 하는지와 무엇을 부정해야 하는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사실 저는 지금까지도 이 내용이 정확히 이해되지는 않아요. (a) 얼핏 '영원회귀'라고 일컬어지는 반복의 가능성 자체가 긍정과 부정을 나누는 기준이 되어야 할 것처럼 보이는데, (b) '초인의 긍정'과 '당나귀의 긍정'을 구분하려면 영원회귀에 다시 다른 외적 가치 기준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게 이상해서요. 이게 니체 철학 내부의 상충하는 입장들인 것인지, 아니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장치가 니체 철학에 있는 것인지, 아직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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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답변에 앞서 솔직히 제가 영원회귀 개념에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른다는 점부터 말씀드릴게요.

(1) 기본적으로 니체의 정치사회철학적 면모를 탐구하는데 있어 영원회귀 개념은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니체라는 도구를 통해 정치사회철학을 하는 제 입장에서 영원회귀 개념은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2) 저는 영원회귀 개념에 큰 비중을 두고 연구하는 것 자체에도 꽤나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영원회귀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구절이 사실 몇 없기 때문입다 (『즐거운학문 340-342』, 『차라투스트라』 속 단문 및 출간저작 몇몇, 마지막으로 『유고』 곳곳).
일단, 저는 니체 연구에 있어 『유고』를 연구 사료로 채택하는데 부정적인 입장입니다(니체 연구에서 사료 인정에 관한 입장들). 그래서 영원회귀와 관련해 아주 유명한 다음의 유고 구절을 통해 이론을 구축하는 작업에도 회의적이구요.

내 사상이 가르치는 것: 다시 살고자 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과제이다-너는 꼭 그렇게 될 것이다!
KSA,9 11[163]; 책세상 니체전집 12권 pp.500-501.

마찬가지로, 『차라투스트라』를 연구 사료로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에도 또한 부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문학적 색채가 강한 작품으로 어떤 철학을 구축해내는 게 쉽지 않으며, 최소한 저에겐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제 입장이 크게 독특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래서 말씀하신 『차라투스트라』 속 "당나귀의 영원회귀"같은 것들을 철학적 개념화하길 꺼립니다.

the philosophical participants are avoiding the poetic work that Nietzsche said was the key to understanding his doctrine(eternal recurrence 별첨)— Thus Spoke Zarathustra
Gemes, K., & Richardson, J. (Eds.). (2013). The Oxford Handbook of Nietzsche . Oxford University Press.

scholars today, as we have seen, dismiss as absurd the idea that life eternally recurs, ignore or misread those places in which Nietzsche claims to have discovered this, and argue that Nietzsche’s published writings show no interest in the truth, warrant, or cosmological aspects of eternal recurrence.
ibid.

(3) 그래도 아는 한 최대한 답변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일단 인용하신 수업 강의록의 주장 "영원회귀는 기본적으로 힘을 외부로부터 부정적으로 매개하는 것들은 다시 회귀하지 못하게 선별한다"에 반대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를 "영원히 존속하는 시간 속에서 모든 것들이 같은 것으로 회귀(변화, 운동)한다"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영원회귀의 가르침에 따르면, 자신의 삶에서 결코 회귀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예컨대 강의록 속 '부정적으로 매개하는 것들')까지도 영원히 반복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마주해야합니다. 바로 이런 윤리적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 니체의 의도(강의록 속 '긍정하는 능력의 시금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대립하는 것이) 영속한다라는 쪽으로 해석하는 편이 ‘힘과 힘 사이의 상호 의존성(혹은 권력-저항의 필연성)’을 말하는 니체의 주장과 정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경우, 주장(a)에 따르면 모든 것이 회귀하지는 않기 때문에 (a)는 틀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주장(b)처럼 영원회귀를 받아들이면, 회귀하는 모든 것 바깥에 또 무엇인가가, 순수한 이론적 관점(일종의 세계 외 존재)이 존재한다는 것이므로 모든 것이 회귀하지 못합니다. 외부의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이 같은 것으로 회귀한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이전의 회귀'와 '나중의 회귀'를 구분할 수 있어야하기 때문에, 결국은 "단순히 회귀의 수"을 기준으로 해서라도 구별해야만 합니다. 이 경우도 역시 "회귀의 수"가 반복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회귀하지 못합니다.
저는 이렇게 영원회귀가 엄밀한 개념화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니체가 애초에 이러한 역설을 의도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니체는 존재의 영원함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세계에 시간(생성)의 영원함을 도입하는 영원회귀라는 사고실험을 통해 무시간적으로 보였던 초월적 기준(실재)가 허구는 아닐지, 나와 관계없이 별개로 존재하는 외부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게해주는 선생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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