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연구에서 사료 인정에 관한 입장들

이번에도 다른 곳에 쓴 글을 가져온것이라 '-다' 체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니체 연구에는 사료 자격에 관련한 몇가지 입장이 있다. 사실상 결론이 나서 전공자들 사이에 큰 이견이 없는 것도 있고, 이견이 있는 것도 있다. 전자가 바로 『힘에의 의지』에 관한 것으로, 그것은 더 이상 니체 연구 사료로 사용될 수 없다고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 합의는 ①'그것은 출간된 서적이 아니며 니체가 폐기한 사상이다'와 ②'그것은 부당하게 조작된 텍스트이다'라는 두 근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는 널리 알려져 있다.

후자가 바로 『유고』에 관한 것으로, ①'그것이 니체 연구 사료로 사용될 수 있냐 없냐'와 ②'사용될 수 있다면 그것이 논증 근거로 사용될 때의 강력함의 수준이 출간된 서적과 견줄 수 있는 것인가'로 이루어져있다. 국내 니체 학회의 논문들을 보면 『유고』를 많이들 인용하고 있으므로, 니체 연구 사료로 사용될 수 있다는 쪽에 가깝다고 보인다. 그리고 경험상 그들이 유고를 인용할 때, 자신이 논증 근거로 유고를 사용한다는 것이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주석을 본적이 없다. 곧 그것이 논증 근거로서 사용될 때 출간된 서적들과 동등한 수준의 강력함을 갖고 있다고 여기거나 이런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으로 짐작된다. 반면 내가 자주 참고하는 영미권과 독일권, 특히 영미권은 『유고』를 근거로 사용하는데 회의적인 입장에 가깝다고 보인다. 최소한 그들은 논증 전개상 유고를 인용한다면, 그것이 약한 지지 근거임을 인정한다며 주석처리 해두거나, 그와 비슷한 구절이 출간된 서적에서 발견된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논증을 강화한다. 이러한 입장은 '『유고』는 니체의 사고 실험장이므로 거기에 있는 많은 구절들은 실험 재료일 뿐 실험 결과가 아니다'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곧 유고의 많은 구절들이 니체의 사유들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편집자인 니체의 선별에 의해 그의 철학 체계에는 포함되지 못한 글뭉치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유고의 구절을 인용할 때 그것과 흡사한 것이 출간된 서적에 있느냐 없느냐는 '이것이 좋은 근거를 가진 논증이냐'의 관건 사안이 된다. 나는 이러한 입장에 아주 가까운 편으로, 유고를 인용할 때 부수적인 정당화 작업을 거치지 않은 글들을 꺼려한다. 동시에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는 사실 석사 논문을 포함한 나의 글 대부분을 실패한 작업으로 생각한다. 짚고 넘어갈점은 다만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하여, 니체의 유고들을 독해할 필요가 없다거나 참고자료로 쓰지 않아야 된다는 것은 분명 절대 아니다. 니체 연구자라면 혹은 자신이 니체를 안다고 하려면 출간된 것과 미출간된 것들 모두 다뤄야 한다. 유고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정보도 있고, 유고와 출간된 서적들을 겹쳐 보아야만 진면목이 드러나는 경우들도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1885-1888년의 글만을 담은 좀더 신뢰할 만한 유고가 출판된 적 있으며 1), 이 시기 니체 유고에 대한 값진 통찰을 제시하는 자료도 있다. 2)

그런데 『유고』 가운데에서도 특수한 위치를 갖는 것들도 있다. 국내 학회의 전집 3권에 실린 《씌어지지 않은 다섯 권의 책에 대한 다섯 개의 머리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들도 분명 미출간된 원고이므로 유고에 속한다. 그렇기에 유고를 연구 사료로 강하게 인정하지 않는 쪽은 그 텍스트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이 특수한 위치를 가진다고 얘기하는 이유는 이것들이 사실 소수에게는 출판된, 편집자인 니체에 의해 분명히 선별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그 텍스트들은 바그너에게 보내는 글인데, 니체가 초기에 바그너에게 보낸 텍스트들은 바그너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서 낭독되었기에 최소한 약한 의미에서는 출간된 텍스트이다. 그렇기에 몇몇 학자들은 이 텍스트들은 니체 스스로가 완성됐다고 보는 텍스트로 여겨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이 텍스트들이 출간된 서적들과 동등한 정도의 위치를 갖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위의 사정을 고려한다면, 그 텍스트들이 원칙적으로 『유고』라는 이유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또 지양해야할 자세라고 말한다. 3)사실 나는 이러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그리스 국가>와 <호메로스의 경쟁>을 담고 있는 《씌어지지 않은 다섯 권의 책에 대한 다섯 개의 머리말》이 정치철학자로서 니체를 다루는데 있어 아주 중요하고 강력한 근거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1. Nietzsche, Friedrich. Nietzsche: Writings from the late notebook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3.
  2. Montinari, Mazzino. Reading Nietzsche. Vol. 22.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2003.
  3. Acampora, Christa Davis. Contesting Nietzsc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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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자료를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텍스트를 찾아서 댓글로 링크 띄워둡니다.

abstract을 보니 저자의 핵심 주장은 (1) 영미권 니체 학계는 출간 서적에 미출간 유고보다 더 높은 신뢰점수를 주고 그에 기반하여 저술한다 (2) 그러나 그러한 점수 부여 원칙은 잘못된 것 같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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