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dit의 r/askphilosophy 판에서 "철학자들은 비판을 모면하려고 일부러 글을 모호하게 쓰는 일도 있나요?"라는 제목의 질문이 올라왔습니다. 의외로 건설적인 문답이 오고갔는데요.
Texas A&M의 케니 이즈와란 교수는 명망있는 현역 철학자의 관점에서 흥미로운 대답 하나를 제시했습니다.
분석철학에선 학술 발표의 질의 응답 시간 때마다 흔히 "지금 주장하시는 바가 뭔지 이해를 못하겠는데요"라는 질문이 비판으로서 제기되고는 합니다. 최소한 사회학적으로 보자면, 이쪽 집단에서만큼은 "제 말을 이해를 못하시는군요"라는 말은 스스로를 방어하는데 쓰이는게 아니라, 오히려 패배를 인정하는 뜻으로 쓰이는 것 같네요.
저의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사실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공감 포인트였습니다. 저 또한 '말씀하신 논지에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라는 비판보다도 '이해를 못하겠는데요'라는 비판이 훨씬 더 뼈아프게 느껴지거든요.
물론 이때 전제는 그 발표 자리가 해당 분야를 잘 알고 있는 동료 학자들이 함께 모인 자리라는 것입니다. 문외한이야 이해 못하는게 당연하죠. 사실 그래서 학술 발표에서는 비판적인 의미에서의 '이해가 가질 않는데요' 질문과 정말 해당 분야에 문외한이어서 묻는 '이해가 가질 않는데요'라는 질문이 미묘하지만 상당히 정밀하게 구분되서 이뤄지는 것 같기도 합니다
더불어 이런 관습이 전적으로 일반적인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를테면 일전에 올렸던 맥도웰의 일화가 반례인 것 같네요. 물론 사실 이런 일화가 어쩌면 맥도웰이 분석철학계에서 독특한 위치에 서있는 것을 방증하는 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해하질 못하겠는데요", 혹은 "이해하질 못하시네요" 같은 대답에 대해서 어떤 느낌을 받으시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께 "이해하질 못하겠는데요"는 뼈아픈 비난으로 들리시나요? "제 얘기를 이해하질 못하시는군요"라고 말하는 철학자를 접하실 경우, 어떤 느낌을 받게 되시나요?
아니, 제 입장에서는 정말 진지한 게, 제가 영미권의 도구들로 유럽 철학을 해석한다는 점이 때로는 사람들에게 일단 의심부터 받을 때가 있어서 당혹스럽습니다. 사실, 일주일 전쯤에 이 주제로 여기에 한풀이 좀 해볼까 했어요. 그러다가, 너무 개인적인 썰들이라 그만뒀지만요. 몇 년 전에 어떤 논문 썼을 때 제 동료 대학원생분이 "이 부분은 너무 이해가 잘 돼서, 오히려 이게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그 철학자가 맞는지 의심스럽다."라고 했던 게 저에게는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우 서늘하죠.. 이해가 안 간다는 얘기를 들으면 ㅠ 저희 지도교수님께 과제 피드백을 받으면 특히 초창기에 가장 많이 받았고 지금도 가끔 문단별로 받는 피드백이 "무슨 얘기하는지 잘 모르겠다"랍니다. 석사논문 쓸 때도 "이 부분은 이해가 안 되는데?" "왜 이게 반박이 되는지 모르겠는데?"하면서 많이 까였죠 ㅋㅋㅋ 저는 그런 피드백을 들으면 내가 제대로 못 썼구나 싶어서 다 뜯어 고치고 바꿔서 가져가고 하는 타입이었는데 생각보다 자기 고집 밀고 가는 사람들도 많다더라구요(현역들도요).
전문가가 “이해 못하겠는데요”라고 하면 당장 속으로 ‘이거 조졌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이야기해보고 다행히 그 사람이 잘못 읽은 거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닐 때는 글을 더 풀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며칠 심장이 무겁게 아프더라구요.
반대로 “제 얘길 이해하질 못하시네요.”란 말을 들으면 ‘요놈 보소, 조져주마’라는 생각이 들면서 물고 뜯고 맛보고 즐기려고 한 상 가득 머릿 속에 준비합니다만, 언젠가부터 머리에만 머무르게 하고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게 됐습니다. 그 이유 중 한 가지는 제가 오만하게도 평균의 문해력과 청해력은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 가지는 그런 말부터 꺼내는 사람들과의 논쟁이 좋게 끝나는 경우 보다는 실익없이 끝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해요. 그런 양반의 목적은 날 설득하는 게 아니고, 날 이기는 것인 경우가 많더군요. 어차피 싸우는 거 나도 좋아하긴 하는데, 백날 말 해봐야 무엇하나 그냥 글로 써서 다이뜨자는 생각이 앞섭니다.
일단 전문가나 동료 전공자가 내가 쓴 글을 하나도 이해 못하겠다고 말하면, 저도 alektryon님 말씀처럼 "이거 망했구나" 싶은 마음이 들 것 같네요. 해당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연구자라면 정말로 순수하게 이해가 안 가서 질문을 던졌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게 되죠. 게다가 글에 부분에 오류가 있다거나 여기가 동의가 안 된다는 정도의 지적도 아니고 글이 전공자한테 이해조차 안 될 정도라면, 대개 저자가 학계 표준에서 심각하게 벗어나 있거나, 아니면 글쓰기의 명료성에 심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니까요. 아직까지는 글 발표하면서 그 정도의 혹평은 못 들어봤지만, 혹시 지도교수나 동료(제 경우는 아마 독일철학 전공 동료)로부터 그런 소리를 듣게 된다면 진땀 뺄 것 같습니다.
이 놈의 제2심사위원을 마주하는 방식은 학자마다 다른 것 같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글이 승인되기 전까지 아무리 꼬와도 심사위원의 말은 무조건 옳다'는 자기최면을 거는 편입니다. 조금만 세심하게 읽었어도 안 할 착각을 한다면, 결국 그런 착각을 하게 용인한 제 글쓰기가 잘못이라는거죠. 특히나 저 자신부터가 '철학적 글쓰기'를 지도할 때마다
다소 거친 분류겠지만, 생각해보면...(1)아주 난해하지만 곰곰히 잘 따져보면 심오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가 있고, (2)명료하게 보이지만 실은 문제가 될 수 있는 전제를 검토하지 않고 당연시하고 있고, 동시에 그것을 읽는 학자들/학계의 경향 역시 그런 문제를 그다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어서 이해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있고, 또 (3)엄청 난해하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도 않는데 어떤 권위로 인해서 그것에 대해 문제제기가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는 텍스트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각각의 경우에 있어서 '이해'라는 것은 제각기 다른 문제상황-맥락에 놓여있는 것이겠지요...
(제가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하겠지만...제 개인적인 견해로 (1)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라베쏭의 <습관에 대하여>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3)은 선생님들 각자의 견해가 있을테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