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천아카데미 추계강좌] 철학의 길, 제2강: 현대철학의 지형

좋은 소개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근래에 "과학주의"란 말은 "신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비슷한 방식으로 쓰이는 어휘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칭찬으로, 어떤 이는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 와중에 논자들마다 제각기 다른 의미로 쓰고는 한다는 점에서요.

철학적인 맥락에서 "과학주의"의 뜻은 최소한 두 가지 결로 나눠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둘은 종종 함께 가고는 하지만, 꼭 반드시 함께 가지도 않죠. 이들 각각은 (사실 썩 맘에 뜨는 명명은 아닙니다만) "철학적 과학주의"와 "사회적 과학주의"로 부르겠습니다.

철학적 과학주의는 이승종 교수님께서 닐 디그래스 타이슨과 스티븐 호킹을 인용하여 훌륭하게 설명해주신 바로 그 입장입니다. '철학은 과학으로 환원가능하다' 같은 매우 "철학적"인 주장이고, 이건 뭐 소위 '분석/대륙철학' 진영을 가리지 않고 실질적인 논쟁이 벌어지는 주제죠. (뭐 타이슨이나 호킹이 이런 논쟁사를 알았을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사회적 과학주의는 학문의 사회적 구조를 둔 입장이고, 대략 '철학은 (현대)과학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방식 및 구조를 따라갈 필요가 있다'는 표어로 그 입장을 거칠게나마 나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과학주의자는 대략 사안마다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칠 것입니다.

  1. 철학의 소통 매체로서 긴 단행본 책과 짧은 학술지 논문을 비교할 경우, 과학과 마찬가지로 철학 역시 짧은 학술지 논문을 선호할 이유가 있다.
  2. 과학과 마찬가지로 철학 또한 단 번에 큰 체계를 내놓으려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빈 자리를 채워나가는 방식으로 진전해 나가야한다. (Cf. 아교세포로서의 철학)
  3. 따라서 (현대)과학과 마찬가지로 철학의 진전 역시 분업에 기초한 공동체적 작업으로 인식하는 것이 합당하며 또 바람직하다. 한 명의 고독한 천재가 번뜩이는 영감을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Cf. '낭만주의적 천재관'에 부합했던 이시다 아키라, PMS 해커가 외면받는 이유)
  4. 과학과 마찬가지로, 철학에서 역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는 덕목이 아니라 악덕으로 여겨져야한다.
  5. 물리학 및 수학에서 arXiv가 쓰이는 것처럼, 철학에서도 PhilArchive 같은 매체를 통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는 국경을 가리지 않고 실시간으로 빠르게 공유되는 것이 마땅하다. '대가의 새로운 아이디어는 최소 몇 년은 오직 그 수제자들만이 허락된 세미나실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태도는 학문 생태계에 긍정적이지 않다.

이승종 교수님께서는 <철학의 길> 강좌에서 이런 사회적 과학주의에 대해서도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이해하는게 맞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과학주의와 사회적 과학주의 양 쪽에 다 반대했을 것 같으니 '과학주의' 일반에 대한 반대의 선봉장으로 두는게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과학주의와 사회적 과학주의 중 어느 한 쪽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또한 상당히 있으며, 그 역시 나름 일리가 있는 입장 같습니다. 이렇듯 '과학주의'의 여러 의미를 따로 나눠 논의하는게 여러 의미로 향후의 생산적 논의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덧. 사실 "사회적 과학주의"가 정말로 "과학"주의인지 역사적으로 따져보는 것도 흥미로운 과제일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최초의 학술지 중 하나인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에서 나타나는 기치가 과연 현대에 "철학"으로 부르는 학제와 어떤 관련을 맺었는지 등이 흥미로운 과제가 될 것 같네요.)

사실 이미 @YOUN 님께서 이 질문에 대해서 좋은 답변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 최근 예일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논리학 필수 수강' 요건을 그냥 '형식 도구가 쓰이는 강좌면 다 됨 (예. 논리학, 확률론, 통계학, 게임이론 ...)'으로 완화했다는게 소소한 화제가 되기도 했죠. 고민해볼만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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