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양식 ; 분석 철학에서도 대작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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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질문에 여러 사람들의 사려 깊은 답변이 남겨졌습니다. 그리고 그걸 읽다보니, 꼭 한 가지 소개시켜드리고 싶은 책이 생겨 이렇게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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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분석 철학자들은 유럽권 철학자들과 달리, 말년이 되어서 자신의 철학을 총결산하는 "거대한 걸작"을 잘 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끽해봐야 논문 모음집? 나아가, 자신이 주로 다룬 영역들에 국한되지, 철학의 모든 영역을 다루려는 시도는 정말 드물게 할 뿐입니다.

이런 경향을 정면으로 거슬러서, 피터 해커(Peter Hacker, 1939-) "옹"이 4권짜리 철학의 모든 영역을 다루는 어마어마한 책을 냈습니다.

2010 - Human Nature - The Categorical Framework
2013 - The Intellectual Power
2017 - The Passions
2021 - The Moral Powers

(각권이 400페이지가 넘어가는 이 시리즈는) 첫번쩨 권은 형이상학과 언어철학, 심리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두번째는 인간의 인지적 능력, 세번째는 인간의 감정, 마지막은 (고전 그리스 철학적 의미의) 윤리학 (즉, 어떤 의미에서의 실존 철학)을 다루고 있습니다.

노트르담 철학 리뷰에도 나와있지만, 피터 해커의 작업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야망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이 스완송을 꼭 소개시켜드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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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했는데, 이 해커가 비트겐슈타인 연구로 유명한 ‘그 해커’군요. 대단합니다! 그런데, 여담이지만, 해커가 쓴 비트겐슈타인 연구 이외의 글들은 분석철학계에서 그다지 널리 읽히거나 수용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해커와 베이커의 언어철학 연구서인 Language, Sense and Nonsense : A Critical Investigation into Modern Theories of Language도 혹평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거든요. 해커의 심리철학 관련 연구도 그렇고요. 주류 학계의 아웃사이더일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의 운명을 해커를 통해 단적으로 보는 것 같다는 기분도 들고 그래요.

말 나온 김에 Language, Sense and Nonsense에 대한 리뷰를 찾아봤는데... 거의 뭐 모욕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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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우선은 축소주의-회의주의-혹은 철학적 해소라는 경향은 철학의 발전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지만, 그 주장을 한 사람들은 쉽게 철학사에서 사라지는 듯합니다. 예컨대, 근대 철학을 추동한 흐름에는 (과학의 발전, 예수회와 모험가들을 통한 다문화적 정보의 유입, 인문주의의 부흥 등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그 중 하나로) 회의주의의 부상을 들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이 흐름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거의 이름이 남지 않았고 이름이 남은 유일한 사람인 몽테뉴조차 철학과에서는 잘 다루지 않죠. 이는 부분적으로 교육이라는 것이, 잘못된 것의 교정보다는 새로운 설명을 더 선호하는 경향 때문인 듯합니다.

다른 하나는 해커 본인의 특성입니다. 저 대작은 분명 스완송이긴하지만, 오늘날 철학책이라고 보기에는 좀 미묘하고 기묘한 지점이 있습니다. 그건 아무런 각주나 인용 표기가 없다는 점이지요. 해커는 그냥 아리스토텔레스가 쓰듯, 어떠한 철학적 이론을 "대상"으로 세워놓지 않고 글을 씁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루는 주제들이 이런 인용 하나 없을 만한 주제가 아닐텐데, 라는 생각이 들곤 하죠. 어떤 의미에서 해커는 학계를 그냥 '무시'한다는 듯한 기분마저 듭니다. 뭐...아시다시피 비판 논문이라는 것도 학자의 심력을 쓰는 것인데 굳이 자기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책을 상대할 이유는 없다 보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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