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천아카데미 추계강좌] 철학의 길, 제2강: 현대철학의 지형

1. 철학자로 인정받고 싶었던 데리다

이승종: 저는 이 책[『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이 현대철학의 지형도에서 데리다를 처음으로 반대 진영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한 학술서였다고 자평합니다. 물론, 두 사람을 비교한 서양 연구물이 있기는 했지만, 문학 전공자가 집필한 탓에 그들의 철학을 거론하는 대목에서 한계가 보였다면,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은 두 사람을 철학사의 지평에 놓고 그들이 전개한 철학적 사유와 논증을 집중적으로 대비시켰습니다.

사실 이 책이 나오기 전만 해도 분석철학자들은 데리다에 대해서 대놓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 사람이 무슨 철학자야? 문학평론가 정도는 양해해 줄 수 있지만, 철학자로서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돌팔이인데?”


자크 데리다

저희[뉴턴 가버와 이승종]가 볼 때, 그건 너무 심한 말입니다. 데리다 자신이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힌 적이 있죠. 자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철학자로 인정받고 싶었다고요. 그런데 세계의 철학자들이 (프랑스이건 영미이건) 자신을 철학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마녀사냥이라고요. 그런 마녀사냥 때문에 소크라테스도 독배를 마시고 세상을 떠나야 했죠.

그럼 또 분석철학자들은 이렇게 대듭니다. “데리다, 그럼 니가 소크라테스야?” 말이 안 통하는 겁니다.

그런데 저희들의 책은, (즉 가버 교수님과 저의 책은,) 데리다가 원하는 방식으로 그를 철학사에 띄워 놓고 평가한 최초의 작업물이라고 자평을 해봅니다.

2. 우리 시대에 만연한 과학주의

이승종: 과학주의라는 것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세계관이라고 저는 봅니다. 우리나라의 TV에서도 절찬 상영되었던 <코스모스>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자인 닐 디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이라는 흑인 물리학자를 기억할 겁니다. [그 사람은] 대놓고 말합니다. “철학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과학이 다 알아서 설명해 줄 것은 설명해주는데… 철학자들은 쓸데 없는 이야기나 한다. 철학은 더 이상 용도가 없는, 폐기처분되어야 할 학문이다.”

닐 타이슨 이상으로 유명세를 누린 (지금은 아마 세상을 떠나셨죠?)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도 마찬가지입니다. 휠체어 의자에 앉아서 사유하시는 분이요. 그분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철학의 시대는 끝났다.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모든 학문들은 (철학을 포함해서) 사라져야 하거나 과학으로 환원되어야 하거나, 양자택일밖에 남지 않았다.”


닐 타이슨과 스티븐 호킹

이런 생각이 과학주의입니다. 우리 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이상 철학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타이슨의 <코스모스>를 보거나 아니면 호킹이 쓴 『시간의 역사』 같은 대중과학서를 통해서 교양을 쌓으려 하죠. 철학은… ‘뭐, 이미 과학 앞에서 끝났다고 하는데? 저런 석학들도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이런 생각이 만연해 있죠. 이게 소위 과학주의입니다. 과학이 모든 것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밖에는 없다는 거죠. “인문학은 이미 끝났다.”라고 하면서요.

저는 이러한 생각에 하이데거와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을 빌려서 강력히 저항할 겁니다. 과학주의가 얼마나 잘못 보았는지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학기를 진행하면서 계속 공부를 해보기로 하죠.

3. 뉴턴 가버 교수님에 대한 회상

윤유석: 교수님이 자주 이야기하시지만, 가버 교수님이 굉장히, 굉장히 무서운 분이셨다고 들었는데… 책을 쓰다가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조율하셨나요?

이승종: 돌아가신 분을 뒤에서 말씀드리기가 좀 그런데… 제가 몸담았던 대학의 철학과장님께서 한국에 방문하셔서 학술 발표를 하셨을 때,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승종아, 네가 모시던 가버 교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했다. 비트겐슈타인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논문 콘테스트가 미국철학회에서 있었는데, 당선작을 한 편도 내지 못했단다.” [제가] “왜요?”라고 그랬더니, “그분이 심사위원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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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 가버

그리고 미국의 철학 잡지 중에 『철학과 현상학 연구』(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라는 아주 유서 깊은 철학 잡지가 있는데… “가버 교수가 거기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는데 해촉되었단다.” 해촉되었다는 말은 쫓겨났다는 이야기거든요. “왜요?”라고 그랬더니, “그분에게 심사를 맡기는 논문은 100% 리젝이거든. 그래서 심사위원장이 화가 나서 쫓아냈어.”

뭐, 이런 분인데요. 글쎄요, 저도 그래서 엄청 고생했습니다.

4. 대륙철학과 영미철학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이유

이승종: 어느 나라나 편견과 가름이 존재하죠.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전세계적으로 대륙과 영미 사이에 자존심 경쟁, 그런 게 좀 있습니다. 저는 앵글로색슨도 아니고 유럽인도 아니기 때문에 제3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해요.

미국 사람들은 (영국도 거기에 포함이 될 텐데) 대륙철학이 군둥내 나는 헛짓거리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것을 답습한다는 거죠. ‘아직도 저 모양이야? 시대가 지금 어느 시대인데…’하고요. 미국은 과학기술 문명에 모든 학문이 방향 잡혀 있어서 철학도 예외가 아닙니다.

제가 놀란 게… 미국에 유학을 갔더니 대학원생에게 수리논리학을 필수과목으로 이수하게 하더군요. 수리논리학은 수학이죠. 지금도 기억에 나는 게, 논리학 시간에 증명 문제를 풀면서 ‘이거 많이 해본 건데…?’라고 생각했죠. 고등학교 때 제가 공부했던 『수학의 정석』의 실력 문제, 그런 수준이더라고요. ‘이게 철학에 무슨 필요가 있지?’하고 공부를 하면서도 갸우뚱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제게 큰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제가 고등학교 때 『수학의 정석』의 실력 문제를 풀었던 것이 먼 훗날 미국에 유학을 가서 대학원 과정을 거칠 때 통과해야 하는 중요한 관문에 쓰임새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수리논리학에서 A+를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거의 다 무사통과입니다. 장학금도 주고, 가려고 하는 방향이나 주제 같은 것도 학생의 자율권을 인정해줘요.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사단이 납니다. 학생을 내보내기도 하는 등 규제가 따르고요.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미국에 대해서 ‘저게 철학이야?’ 이렇게 생각하죠. ‘저게 과학 따르기지, 과학 베껴가기지, 저게 사람 냄새 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어? 적어도 철학을 하려면 그리스어, 라틴어는 기본이지!’ 그래서 여러분이 유럽으로 유학을 가면 수리논리학이 아니라 그리스어, 라틴어부터 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도, (제가 유럽인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니어서) ‘정말 해야만 하는 건가? 개인적인 방향에 따라서 필요하면 하는 건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걸 강제로 부과하는 것은 바람직한 건 아니라고 봅니다.

긴 이야기를 짧게 하자면, 문화적인 자존심이 지금도 엄연히 존재하고, 그걸 가지고 “이것이 철학이다.”라는 잣대를 만들어 가는 것 같고요. 거기서 벗어나야 인류가 더 평화롭고 창의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출발점이 서양이 아닌 동양, 특히 우리에게서 빚어지기를 갈망해 봅니다.

철학의 길 2강(1) : 현대철학의 지형

00:00-03:43 지난 강의에 대하여
03:44-04:38 들어가는 말
04:39-31:01 현대철학 배우기와 짓기
31:02-35:45 대륙철학과 영미철학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35:46-39:01 대륙철학과 영미철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39:02-41:01 대륙철학과 영미철학이 서로 대화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41:02-43:58 대륙철학과 영미철학의 대화가 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43:59-50:33 자연주의와 해체주의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50:34-53:54 Brahms - Double Concerto for Violin & Cello in a minor
54:55-59:32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자연주의, 해체주의, 과학주의(1)
59:33-1:01:20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자연주의, 해체주의, 과학주의(2)

철학의 길 2강(2) : 현대철학의 지형

00:00-04:27 자연주의와 해체주의가 오늘날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04:28-08:05 자연주의와 해체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08:06-09:11 자연주의와 해체주의 중에서 어느 쪽 입장에 더 동의하시나요?
09:12-14:00 자연사의 사실이 과연 존재할까요?
14:01-14:50 자연사의 사실에 대한 예시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14:51-17:34 자연사의 사실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어떤 논증을 통해 정당화됩니까?
17:35-21:03 비트겐슈타인의 ‘자연사’와 다윈의 ‘진화사’는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릅니까?
21:04-32:04 비트겐슈타인의 ‘보여주기’보다는 데리다의 ‘해체하기’가 더 효과적인 비판의 전략이 아닐까요?
32:05-34:16 ‘보여주기’가 적절한 비판의 전략일 수 있다면, 그 비판은 어떻게 수행됩니까?
34:17-43:14 비트겐슈타인의 ‘봄’이 다른 형이상학자들의 ‘봄’보다 더 올바르다는 근거가 있습니까?
43:15-44:44 독단에 대한 ‘해체’가 선행되어야 사태에 대한 ‘봄’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44:45-49:14 공동 연구를 어떻게 수행하셨나요?
49:15-50:42 공동 연구에서 어려웠던 점은 있었나요?
50:43-53:04 공동 연구에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어떻게 조율하셨나요?
53:05-55:26 실제 텍스트 작성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나요?
55:27-57:12 수강생과의 질문과 대답: 논리는 자연사의 사실에 포함되나요?
57:13-1:00:19 해체와 논리는 어떤 관계가 있나요?
1:00:20-1:05:08 대륙철학과 영미철학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철학의 길2강(1): 현대철학의 지형

철학의 길2강(2): 현대철학의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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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개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근래에 "과학주의"란 말은 "신자유주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비슷한 방식으로 쓰이는 어휘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칭찬으로, 어떤 이는 비난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 와중에 논자들마다 제각기 다른 의미로 쓰고는 한다는 점에서요.

철학적인 맥락에서 "과학주의"의 뜻은 최소한 두 가지 결로 나눠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둘은 종종 함께 가고는 하지만, 꼭 반드시 함께 가지도 않죠. 이들 각각은 (사실 썩 맘에 뜨는 명명은 아닙니다만) "철학적 과학주의"와 "사회적 과학주의"로 부르겠습니다.

철학적 과학주의는 이승종 교수님께서 닐 디그래스 타이슨과 스티븐 호킹을 인용하여 훌륭하게 설명해주신 바로 그 입장입니다. '철학은 과학으로 환원가능하다' 같은 매우 "철학적"인 주장이고, 이건 뭐 소위 '분석/대륙철학' 진영을 가리지 않고 실질적인 논쟁이 벌어지는 주제죠. (뭐 타이슨이나 호킹이 이런 논쟁사를 알았을지는 모를 일입니다만.)

사회적 과학주의는 학문의 사회적 구조를 둔 입장이고, 대략 '철학은 (현대)과학에서 논의가 이루어지는 사회적 방식 및 구조를 따라갈 필요가 있다'는 표어로 그 입장을 거칠게나마 나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사회적 과학주의자는 대략 사안마다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펼칠 것입니다.

  1. 철학의 소통 매체로서 긴 단행본 책과 짧은 학술지 논문을 비교할 경우, 과학과 마찬가지로 철학 역시 짧은 학술지 논문을 선호할 이유가 있다.
  2. 과학과 마찬가지로 철학 또한 단 번에 큰 체계를 내놓으려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조금씩 조금씩 빈 자리를 채워나가는 방식으로 진전해 나가야한다. (Cf. 아교세포로서의 철학)
  3. 따라서 (현대)과학과 마찬가지로 철학의 진전 역시 분업에 기초한 공동체적 작업으로 인식하는 것이 합당하며 또 바람직하다. 한 명의 고독한 천재가 번뜩이는 영감을 풀어놓는 것이 아니라. (Cf. '낭만주의적 천재관'에 부합했던 이시다 아키라, PMS 해커가 외면받는 이유)
  4. 과학과 마찬가지로, 철학에서 역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는 덕목이 아니라 악덕으로 여겨져야한다.
  5. 물리학 및 수학에서 arXiv가 쓰이는 것처럼, 철학에서도 PhilArchive 같은 매체를 통하여 새로운 아이디어는 국경을 가리지 않고 실시간으로 빠르게 공유되는 것이 마땅하다. '대가의 새로운 아이디어는 최소 몇 년은 오직 그 수제자들만이 허락된 세미나실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태도는 학문 생태계에 긍정적이지 않다.

이승종 교수님께서는 <철학의 길> 강좌에서 이런 사회적 과학주의에 대해서도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여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이해하는게 맞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과학주의와 사회적 과학주의 양 쪽에 다 반대했을 것 같으니 '과학주의' 일반에 대한 반대의 선봉장으로 두는게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적 과학주의와 사회적 과학주의 중 어느 한 쪽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또한 상당히 있으며, 그 역시 나름 일리가 있는 입장 같습니다. 이렇듯 '과학주의'의 여러 의미를 따로 나눠 논의하는게 여러 의미로 향후의 생산적 논의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덧. 사실 "사회적 과학주의"가 정말로 "과학"주의인지 역사적으로 따져보는 것도 흥미로운 과제일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최초의 학술지 중 하나인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에서 나타나는 기치가 과연 현대에 "철학"으로 부르는 학제와 어떤 관련을 맺었는지 등이 흥미로운 과제가 될 것 같네요.)

사실 이미 @YOUN 님께서 이 질문에 대해서 좋은 답변을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 최근 예일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논리학 필수 수강' 요건을 그냥 '형식 도구가 쓰이는 강좌면 다 됨 (예. 논리학, 확률론, 통계학, 게임이론 ...)'으로 완화했다는게 소소한 화제가 되기도 했죠. 고민해볼만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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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말씀하신 구분을 사용하자면, 개인적으로는 저도 철학적 과학주의에는 반대하지만 사회적 과학주의에는 여전히 꽤 동의하는 경향이 강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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