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의 두 가지 의미: 응용현상학과 초월론적 현상학

최근에 현상학에 대한 발제문을 쓰게 되었는데, 그 내용 중 일부를 여기에도 옮겨 봅니다. 저는 많은 분들이 현상학을 어렵게 느끼시는 이유 중 하나가, '현상학'이라는 분야의 이중적 성격에 있다고 봐요. 현상학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a) 개별 경험과학의 영역을 정초하는 '응용현상학(applied phenomenology)'과 (b) 지향성 일반의 구조에 대해 탐구하는 '초월론적 현상학(transcendental phenomenology)'을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현상학과 관련된 대부분의 논의들이 그 둘 중 어느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평소에 했거든요. 철학과에서는 '현상학'이라는 이름으로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의 '초월론적 현상학'만을 이야기하고, 다른 분과에서는 '현상학'이라는 이름으로 종교 현상학, 현상학적 사회학, 예술작품의 현상학 같은 '응용현상학'만을 이야기하다 보니, 그 두 가지가 어떻게 '현상학'이라는 하나의 이름 아래에서 서로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분들이 적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래 발제문은 그 두 현상학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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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현상학은 의식의 지향성을 바탕으로 각각의 학문들에 맞는 각각의 방법을 제공하고자 한다. 우리는 현상학과 개별 학문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표6>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가령, (a)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일어나는 신체 현상을 신경생리학적으로 연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사랑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실험과 관찰을 통해 처음 상정된 가설을 증명해내고, 증명에 오류가 없는지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신경생리학적 연구 자체는 경험과학에 속한다. 그러나 (b) 연구자는 사랑에 대한 자신의 신경생리학 연구를 진행시키기 위해 우선 ‘사랑’이라는 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를 (조작적 정의나 작업가설의 형태로) 대략적으로라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신경생리학 연구자가 탐구해야 하는 ‘사랑’이라는 현상이 무엇인지를 엄밀하게 기술하기 위해서는 자유변경과 본질직관을 수행하는 형상과학이 요구된다. 더 나아가, (c) 이러한 본질직관의 근거는 의식의 지향성에 대한 탐구에 놓여 있다. 우리의 의식이 대상과의 지향적 관계 속에서 매 순간 대상 영역을 구성한다는 사실은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해명된다.


<표 6>

(11) 한편으로, 현상학이란 경험과학을 정초하는 형상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상학이 맡고 있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본질직관을 수행하여 각각의 학문 영역에서 전제된 기본적 개념들의 본질 구조를 해명하는 작업이다. 종교 현상학, 현상학적 사회학, 예술 작품의 현상학을 통해 형상과학으로서 현상학이 지닌 특징을 살펴보자.

종교 현상학: 서로 다른 종교의 형태들을 비교하여 그 속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본질을 발견해내고자 하는 작업이 종교현상학에서 이루어진다. 특별히, 종교 현상학은 구체적인 종교 현상들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종교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을 극복하고자 한다. 가령, 칸트 이후로 종교란 도덕적 질서를 상징적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영역이라는 선입견이 널리 퍼졌다. 리츨과 같은 신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가 칸트가 말한 ‘목적의 왕국’과 다르지 않다고도 생각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이후의 종교 현상학적 탐구는 종교가 도덕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하고 독특한 본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가령,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종교적 체험의 본질로 ‘두려우면서도 매혹적인 감정’을, 게라르두스 반 델 레에우(Gerardus van der Leeuw)는 ‘힘에 대한 숭배’를,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 ‘원형적 대상의 반복’을 종교의 본질로 기술하였다.

Gerardus_van_der_Leeuw

현상학적 사회학: 현상학적 사회학은 콩트 이후의 실증적 사회학과 대비된다. 실증적 사회학은 주제가 되는 사회 현상을, 미리 상정된 이론이나 이데올로기에 따라, 설문조사나 통계 같은 계량화된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들은 대개 사회 구성원이 기존에 지니고 있는 상식 뒤편에 더 깊은 사회학적 진실이 은폐되어 있다는 가정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현상학적 사회학은 (사회학자의 관점이 아닌) 사회 구성원의 관점에 따라 사회 현상을 기술하고 이해하려는 시도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기존 사회학에서는 자주 무시되었던 사회 구성원들의 ‘일상생활세계’와 ‘상식’이 현상학적 사회학에서는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일상생활세계와 상식이 어떻게 구조화되어 있는지에 대한 탐구가 현상학적 사회학의 주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가령, 슈츠에 따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세계는 ‘대면적 관계’, ‘동시대인의 세계’, ‘선대인의 세계’, ‘후대인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알프레드 슈츠(Alfred Schutz), 피터 버거(Peter Berger), 토마스 루크만(Thomas Luckmann)가 대표적인 현상학적 사회학자라고 할 수 있다.

Alfred_Schütz berger

예술 작품의 현상학: 예술 작품의 현상학에서는 우리의 미적 체험에 대한 기술을 바탕으로 예술과 관련된 다양한 논의가 다루어진다. 즉, 미적 대상이 자연물이나 일용품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미적 대상이 예술 작품이라고 여겨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요구되는지, 각각의 예술 장르는 서로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지 등에 대한 본질직관을 수행하는 분야가 예술 작품의 현상학이다. 이러한 연구는 예술사에 대한 서술이나, 작가의 일생에 근거한 작품 분석이나, 시대적 배경에 근거한 작품의 의의 비평과는 구별되는 특징을 지닌다. 예술 작품의 현상학을 위해서는 작품에 대한 역사적, 전기적, 사회적 배경 지식이 미리 요구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작품에서 체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품을 분류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훨씬 중요하다. 예술 작품의 현상학에서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는 로만 인가르덴(Roman Ingarden)과 미켈 뒤프렌(Mikel Dufrenne)이 있다.

(12) 다른 한편으로, 현상학은 종종 세계를 구성하는 의식의 지향성에 대해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초월론적 현상학만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실, 철학에서 ‘현상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때에는 주로 초월론적 현상학에 초점이 맞춰진다. 즉, 우리의 태도에 따라 각각의 대상 영역이 성립한다는 사실, 각각의 대상 영역이 각각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각각의 세계 너머에 상정된 형이상학적 실재가 사실 아무런 필증적 명증성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 등에 근거하여 기존 형이상학과 인식론의 여러 가지 잘못된 가정들을 비판하고 교정하는 작업이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수행된다. 가령, 순수의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세계 구성에 대해 탐구하고자 하는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조에 근거한 삶의 실천적 배경을 강조하고자 하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현상학, 순수의식이 아무런 본질도 지니지 않는 ‘무’라고 강조하는 사르트르(Jean Paul Sartre)의 현상학, 대상에 대한 지각이 신체성에 의존한다고 지적하는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현상학, 우리의 주관으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적 요소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미치는 영향을 기술하는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현상학 등이 모두 일종의 초월론적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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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의 분과를 명료하게 알 수 있는 일목요연한 정리 감사드립니다. 결국 "본질직관"이란, 어떤 분야가 되었든 그것을 겪어보는 주관적 체험의 기술로써 이루어지는 작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군요. 마침 선생님 블로그에서 현상학의 "신학적 전회"에 대해 논쟁하셨던 부분을 재미있게 봤었는데요, 마리옹 류의 학자도 마지막의 초월론 현상학에 속하겠지요? "초월·신비적 존재"의 대안으로서 해석학적 말놀이의 '공동체'를 중시하시는 것이 선생님의 견해라고 이해하였고, 이것이 현재까지도 일관된 관점이시라면, 선생님께서는 마리옹의 경우는 초월론 현상학의 퇴행을 상징한다고 보실까요? 아니면 마리옹 역시 그런 사회로서의 타자를 "선물·계시" 등의 용어로 풀어서 썼을 뿐이라고 이해하실까요? 나아가 조금 더 확장된 질문을 드려도 괜찮다면, 이같은 해석학적 '타자' 개념과 소위 정통신학의 "절대타자" (즉, 종교로서 믿어야만 하는 100% 초월적 신) 개념을 어떻게 기독교인으로서 개인적으로 융화시키시는지, 가령 후자가 전자에 흡수되는 관계인지 아니면 둘은 전혀 만날 수 없지만 양립 가능하다고 보시는지,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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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네, 마리옹도 일종의 초월론적 현상학의 흐름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저는 이해해요.

(2)

저는 마리옹의 현상학에 대해서 깊이 공부한 적이 없지만, 마리옹이 반드시 '퇴행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물론, 저는 '현상학적 봄'이라는 방법론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긴 해요. 그래서 현상학에 근거한 철학보다는, 다른 방식의 철학을 수행하는 게 더 낫다고 보고요. 하지만 이 점만 제외한다면, 후설에서 마리옹까지에 이르는 현상학의 역사가 현대철학에 여러 가지 귀중한 통찰들을 제시하였다는 데 동의해요.

(3)

조금 복잡한 질문이긴 하지만, 단순하게 나누자면, 저는 (레비나스류의) 현상학이 말하는 '타자' 개념이 일종의 '형식적 타자'고, (바르트류의) 신학에서 제시되는 '타자' 개념이 일종의 '내용적 타자'라고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은 '야웨'라는 인격신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우리의 기존 선입견을 뒤흔드는 타자적 사건에 주목하였다면, 현상학은 그런 타자적 사건이 (종교적 영역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다른 다양한 영역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구조로, 비슷한 과정으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거죠. 가령,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사건, 새로운 책을 읽는 사건, 새로운 장소에 방문하는 사건 등도, 마치 유대-그리스도교의 야웨가 인간의 선입견을 무너뜨려버리는 사건처럼, 그만큼 급진적이고 강렬할 수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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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시간 감사합니다! 확실히 (3)번이 재미있네요 ^^ 결국 그 인격신의 관념도 전통적 초월보단 내재로 설명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어떤 원경험의 세계를 지시하시는 것인지 앞으로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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