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 사회학과 김경만 교수님의 저서 『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은 하버마스와 로티 사이의 논쟁을 다룬 책입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제5장에는 그 두 사람의 논쟁에 대한 김경만 교수님 자신의 흥미로운 평가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김경만 교수님은 마이클 폴라니의 '암묵지' 개념에 근거해서 하버마스를 비판하죠. 하버마스는 과학자 집단이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를 정당한 근거에 따라 판별해낸다고 가정하고, 또 그런 가정에 따라 과학자 집단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자신의 의사소통행위 이론을 위한 일종의 '모델'로 제시하지만, 정작 실제 과학자 집단에서 일어나는 토론은 결코 민주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입니다.
마이클 폴라니는 벨리코프스키의 사례를 통해 과학이 얼마나 '암묵지'에 크게 의존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벨리코프스키는 무려 '성서 해석'에 근거하여 새로운 천문학 이론을 만들어 내었고, 실제로 그 이론으로 천문 현상에 대한 혁신적인 예측에도 성공하지만, 과학자들은 벨리코프스키의 이론을 아예 '과학'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벨리코프스키가 수행한 예측의 성공 여부와 상관 없이, '성서 해석'에서 천문학 이론을 도출하려는 시도는 애초에 진지하게 고려할 만한 과학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죠. (근본주의 기독교의 창조과학이 과연 '과학'인지에 대한 문제와도 연관된 주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저명한 과학자이자 철학자인 마이클 폴라니는 과학 공동체가 혁신적인 과학적 주장을 정밀한 과학적 검증을 통해서 확인하려는 시도에는 매우 인색하다는—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주장을 오랫동안 펼쳐왔다. 폴라니는 자신이 만들어낸 물리학 이론을 포함해서 수많은 새로운 이론들이 '개연성이 없다'는 이유로 과학 사회로부터 충분한 검증을 받기도 전에 기각되었다고 주장한다. 폴라니가 논한 많은 사례 가운데 벨리코프스키(Immanuel Velikovsky)의 사례가 있다. 벨리코프스키는 성서에 관한 새로운 해석에 입각해 천문학 이론을 만들어냈고, 이를 토대로 금성의 움직임에 대한 혁신적인 예측을 했다. 1950년에 과학자들은 다양한 천문 현상에 대한 벨리코프스키의 비정통적인 해석을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읽지도 않은 채 비난했고, 벨리코프스키의 책이 출판되지 못하도록 알력도 행사했다. 몇 년 후 우주 탐사를 통해 벨리코프스키의 예측이 부분적으로 옳았다는 사실이 판명됐을 때조차 과학자들은 이를 개연성 없는 주장이라고 무시했고 탄압했으며, 이 주장을 경험적 검증에 부치길 거부했다. 더 놀라운 것은 과학자들이 벨리코프스키의 연구를 그렇게 취급해 버린 것에 대한 어떤 정당화도 과학 공동체 외부의 집단에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느끼지 않았다. (김경만, 2015: 206-207)
중요한 점은, 과학자들이 이렇듯 벨리코프스키의 이론 자체를 과학이 아닌 것으로 기각하였다고 해서, 과학자 집단의 그 결정이 반드시 비난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민주적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하버마스라면 과학자 집단의 행위가 이데올로기에 지배된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결정이라며 비난하였겠지만, 폴라니와 김경만 교수님은 과학자 집단에게 제기되는 그런 비난이 정당하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과학'이 아닌지는 과학자 집단이 수행하는 게임에서 암묵적으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폴라니와 김경만 교수님의 입장입니다.
즉, 애초에 자신들의 암묵적 규칙에 따라 게임을 잘 수행하고 있는 과학자들을 향하여, "당신네들이 하는 게임은 아무 근거가 없다!"라고 비난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게임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지는 과학자들의 문화가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고, 그 게임에 참여하길 원하는 이상 그 문화에 따라야 한다는 요구는 당연하다는 것이죠. 가령, 체스 게임에 참여하길 원하면서도 "폰을 한 칸만 움직여야 한다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 나는 세 칸 움직일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게임 자체를 파괴해 버리는 태도일 뿐입니다. 폰을 한 칸 움직여야 한다는 체스의 규칙에 대해서는 체스 게임 바깥의 외부인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닙니다. 체스 게임에 참여하길 원하는 이상 그 규칙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 규칙을 받아들이기 싫다면 체스 게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될 뿐입니다.
폴라니가 제시한 '새롭게 정의된' 합리성 기준에 따르면 지식에 관한 모든 주장을 이상적 담화 상황의 '무조건적 타당성'에 회부하라는 하버마스의 주장은 과학하길 그만두라는 권고나 다름 없다. 하버마스가 합의와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최선책으로 강조하는, 합리적이라 가정되는 담화의 규칙들은 과학자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 규칙일 뿐이다. 하버마스의 예상과 반대로 암묵적 지식의 작동은 과학 지식 성장의 장애로 작용하지 않고, 오히려 과학자들로 하여금 토론할 가치가 있는 지식 주장과 그렇지 않은 주장을 구별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과학 진보에 실제로 기여한다. 게다가 암묵적 지식에 토대를 두고 있는 과학의 '권위'는 부정적 방식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즉 암묵적 지식은 과학자들을—부르디외의 용어를 빌리자면—'가능성의 공간'으로 인도해줌으로써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실재의 다른 측면들도 탐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김경만, 2015: 212-213 인용자 강조)
저는 이러한 입장이 꽤나 설득력 있고 강력하다고 생각합니다. <서강올빼미>에 최근에 올라온 논쟁들을 보면서도 생각한 것이지만, 모든 논쟁들은 마지막에 이르면 결국 '문화'의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과학'인가, '과학'이 아닌가?" 혹은 "이것이 '철학'인가, '철학'이 아닌가?" 같은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는, 우리 자신이 어떤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것이죠. 그 문제는 논쟁으로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라기보다는, '나는 누구인가?'를 보여줌으로써 갈라져야 하는 사안인 것 같습니다. 물론, 폴라니나 김경만 교수님의 주장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반론이 제기될 수는 있겠지만, 저는 (a) 과학자 집단을 비롯한 연구자 집단의 의사소통이 반드시 민주적이지만은 않다는 점, 그리고 (b) 그 비민주성이 때로는 비난받아야 하는 문제가 아닐 뿐더러, (c) 종종 생산적인 연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도 하다는 점에 대해 현재로서는 상당 부분 동의하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