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 님이 작성하신 글을( 과학자들은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 김경만, 『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 제5장 ) 읽고 원래는 댓글로 남기려 했으나, 생각해보니 사실 현재 글에서 논의되는 주제와 다소 동떨어진 부분이 있어서 별도의 글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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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글의 주제처럼 “과학 이론이 어떠한 측면에서 발전되고 형성되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요? 저는 과학철학에 대해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에, 전통적인 과학철학자들처럼 과학 이론이 생성되는 맥락과 그 정당화 과정을 구분하여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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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철학에서는 이를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의 구분”이라고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더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사실과 가치판단과 관련된 복잡한 논의로 확장될 수도 있겠지만요.)(참고: 발견의 맥락과 정당화의 맥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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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과학철학적 입장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쿤의 철학을, 바로 이 ‘발생적 오류’ 문제 측면에서 비판해 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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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간단한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제가 즉흥적으로 떠올린 것이므로 다소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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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과 발생적 오류 문제
만약 “과학 이론이 어떤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등장했는지 설명하는 것”과 “그것을 판단하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려고 볼 때 예를 들어, 쿤의 이론을 만약 극단적으로 해석한다면:
“뉴턴 역학은 17세기 유럽의 특정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훗날 필연적으로 상대성이론에 의해 대체될 운명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이론이 등장한 과정을 그 이론의 진리성 평가와 혼동하는 발생적 오류에 빠질 위험이 있다.
물론 이 예시는 제 개인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단순화한 것이므로 완벽하지 않을 수 있지만, 여기서 이론의 탄생 배경, 과정이 그 정당성을 결정짓는 요소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철학적 관점에서 과학 이론의 생성 배경이 그 정당성 평가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보시는지, 아니면 이것이 구분된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질문을 정리를 하면
과학 이론의 발견, 형성 과정과 정당화 과정을 구분해서 보시는 편이신지,
아니면 두 과정을 상호연관지어 이해해야 한다고 보시거나 그런 편이신지.
(+ 여기서 질문의 의미를 명료하게 위해서 "자연과학"에 대한 이야기로 한정해서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사회과학은 '가치' 관한 문제가 좀 심각하게 얽혀 있으니까요.)
사실 전 이제 철학이든 어디든 사람들이 너무 다 달라져버린 과학에게 "하나의 거대한 과학"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쿤이라든가 포퍼라든가, 초창기 과학 철학자들에게 "과학"이란 기본적으로 물리학이었습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그들의 이론은 '물리학'을 염두해 둘 때 가장 잘 이해가 된다 여겨집니다. (영미권 분석 종교 철학이 기독교 - 아브라함계 종교를 염두해 둘 때 가장 잘 이해가 되는 것처럼요.)
(2)
여하튼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물리학이나 화학 같은, 흔히 물상과학이라 부르는 학문에 대해서는 이러는 편입니다.
다만 생물학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여러 생물학 저작들을 보면서, 연구자의 편견 (과 그걸 만들어낸 사회적 배경)에 따라서 이론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물리학/화학에 비해서 훨씬 더 사회적 배경에 따른 영향이 강하다 개인적으로 느낍니다.
요근래 트럼프 덕분에 핫한 젠더/섹슈얼리티 문제처럼 말이죠.)
(3)
수학이나 컴퓨터 공학 같은 영역도 있을텐데, 이 영역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철학계 내에서도 상황은 비슷하지 않을까....합니다. 수학은 과학의 일부라고 말하면서도, 항상 따로 놀았고, 컴퓨터 공학은 AI를 통해 이제서야 물리학과 대등한, 기술이 아닌 [연구를 할 가치가 있다 여겨지는]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발견/정당화'의 구분에 근거한 비판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정당화'의 맥락에서 보더라도, 지금 우리가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과학 이론이 반드시 단단한 정당화의 토대를 지니고 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더라고요.
요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장하석 교수님의 『물은 H2O인가?』를 훑어보고 있습니다. 화학의 역사를 실제로 추적하면서, 플로지스톤 이론이 왜 폐기되었는지, 물의 분자구조가 왜 H2O로 결정되었는지, 그 과정이 과연 '정당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문제가 없는지를 다루는 내용이에요.
장하석 교수님은 플로지스톤 이론이 너무 이른 시기에 정당한 이유 없이 폐기되었고, '원자', '원소', '분자' 같은 개념들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성되는 것도 얼마든지 정당할 수 있다는 놀라운 주장을 제시하더라고요. 저는 과학사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 주장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 지 쉽게 결정하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정당성'에 대한 평가가 대단히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힐러리 퍼트남은 우리가 이론의 정당성을 평가할 때 의존하는 '단순성(simplicity)', '아름다움(beauty)', '그럴듯함(plausibility)' 같은 개념도 일종의 미적 가치가 반영된 개념이라고 지적합니다. 사실/가치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거죠. 이런 점에서 보더라도, '정당성'이라는 개념이 과연 과학에 대한 우리의 평범한 직관(가령, "과학은 실재를 반영한다.")을 보장하는지 저에게는 다소 의문스럽습니다.
그동안 XX의 철학이라는 형태로 여러 개별 과학의 철학이 등장했지만, 항상 물리학(그것도 양자역학 혹은 시공간의 철학)과 생물학 혹은 수학에만 집중될 뿐, 상대적으로 화학이나 지구과학 나아가 기술(technology) 전반에 대해서는 책이 굉장히 적거나 피상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기술에 관해서는 유럽권, 특히 독일권 매체 미학과 비교하면.......창피한 수준이었다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듭니다.)
그러나 AI의 출현 전후로, 철학계도 AI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그에 따라 "컴퓨터 공학의 철학" 같은 컴퓨터 공학 그 자체에 대한 관심 (과 연구의 질)이 증가하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질문 했던 것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더 명확하게 드러난 것 같습니다.(인용해주신 자료들도 참고하겠습니다.)
말씀해주신 장하석 교수님의 『물은 H2O인가?』에서 제시된 플로지스톤 이론 등 과학사적 사례를 듣고 보면,(다른 곳에서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론을 단순히 그 발견의 배경에 의존해 판단하지 않더라도, 동시에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기준 역시 주관적일 수 있다는게 다시 한 번 생각 되네요. 또 말씀해주신 퍼트남의 지적처럼, 그런 미적 기준들이 사실과 가치의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면, 우리가 과학 이론을 '확실하다'고 평가하는 것 자체도 여러가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아마 여러 인식론적 고찰과 관련이 있을 것 같네요.)
다만, 사실 제가 처음 질문에서 생각했던 것 중에는, ‘정당성’ 개념 자체가 아무리 불확실하고 미묘할지라도, 그것이 이론의 발생 배경이나 맥락과는 개념적으로 구분되어 그래도 별개로 어떻게 다루어질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모호함을 가정하더라도 어떤 기준으로 과학 이론의 정당성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 여지에 대해서 YOUN님께서 혹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게 있으신지에 대해 마지막으로 좀 여쭙고 싶습니다.
(컴퓨터 공학이라는 용어를 쓰셔서 첨언하자면) 컴퓨터 과학과 컴퓨터 공학을 구별하는 것도 내부인들에게는 꽤나 사골인 이슈입니다.
전자는 좀 더 원리적인 탐구를 목적으로 행해지는 데 반해 (이를테면 카이스트 문수복 교수 연구실에서 진행된 "트위터는 소셜 네트워크인지, 뉴스 미디어인가") 후자는 좀 더 구체적인 문제 풀이에 집착하죠. (여기는 제목도 "CNN 방법을 이용한 대규모 금융데이터 이상현상 감지"같은 식입니다.)때문에 후자를 중점으로 두는 저널과 전자를 중점으로 두는 논문 구조도(물론 당연히 겹치기도 하지만) 많은 차이점을 보입니다.